마음을 잃었다.
우리 강아지 상구는 태어난 지 13년이 넘어서 사람나이로 치면 할아버지급은 된다. 상구는 모르는 게 없는 능구렁이다. 상구는 간식을 먹고 싶으면 간식벨을 마구마구 울려댄다. 화장실에 볼 일이라도 보고 나면 기어이 간식을 줄 때까지 칭얼거린다. 나의 퇴근을 알아채고 날뛰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린다. 퇴근 후 내 행동에 온 신경을 쏟는다. 언제쯤 자기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 줄 것인지 그것에만 관심이 쏠려있다. 실수로라도 산책 가방을 만지면 입에 함박웃음을 흘리면서 표정으로 나를 압박한다. 슈퍼를 갈 때 입는 복장과 산책을 갈 때의 옷차림도 정확히 구분한다. 산책 갈 복장을 하고 내가 늑장을 부리면 못내 서운한 눈빛을 보낸다. 슈퍼에 다녀올 복장으로 돌아다니면 '다녀 오시든지 말든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방관한다.
상구는 내가 출근할 때는 거들떠도 안 본다. 졸린 눈꺼풀을 겨우 조금 올리고 다녀오든지 말든지 하셔라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는 받아 본 적도 없다. 상구가 보기에 내가 우리 집 서열 꼴찌다. 나는상구에게 물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누나들이 나갈 때는 꼬리를 흔들고 아쉬워하면서 나에게는 그런 모양새를 보여준 적이 없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만 조금 치켜떴다가 바로 감아 버리고 마는 그게 출근 인사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달랐다. 출근하려고 챙기는 나를 자꾸 따라다녔다. 왜 그러냐고 묻는 나에게 묘한 눈빛을 보냈다. 밥을 챙겨주고 간식과 물도 확인하고 나는 출근을 서두르며 코트를 입었다. 갑자기 상구가 짖었다. 나는 당황했다. 새벽 다섯 시에 짖다니~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민폐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나가려고만 하면 상구가 짖었다. 다른 날은 쳐다도 안보는 녀석이 이게 뭔 일이랴? 싶었다. "조용해라. 다녀올게." 상구에게 이야기를 해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움직이기만 하면 짖었다. 난감했다. 뭔 일이지?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전날밤에 너무 추워서 상구와 산책을 안 갔다. 퇴근이 너무 늦었고 온몸이 춥고 떨려서 잠이 들어 버렸다. 약을 한 봉지 먹었는데 그 약이 깊은 잠에 빠지게 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버렸다. 상구는 배신감을 느낀 모양이다. 일어났으면 산책을 가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출근하는 모양새를 보고 몹시 서운했던 모양이다. 상구와 신뢰가 무너지는 아침이었다. 출근 가방을 들어도 짖고 코트를 걸쳐도 짖었다. 할 수 없이 상구 산책 가방을 들었다. 그제야 조용하다. 산책을 안 갔더니 나를 못 나가게 하는 것이구나.
상구의 일과 중에 산책이 반드시 들어 있었다. 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약속을 지켰다.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상구산책, 몸이 아파서 열이 머리끝까지 오르는 날에도 상구 산책을 빼먹지 않았다. 상구가 우리 가족이 된 이후로 한번 도 어긴 적 없는 일과였다. 딸들이 집을 비운 사이 나는 그 신뢰를 깨 버렸다. 상구와의 산책이 내게는 꾸준하게 지켜야 하는 루틴이 아니었다. 결국 그 새벽에 상구 산책을 시켰다. 산책을 시키고 집을 나서자 상구는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덕분에 출근길은 택시를 잡아야 했다.
신뢰의 뜻은 굳게 믿고 의지함이다. 상구의 우리 가족에 대한 신뢰는 무한했고 오로지 자기에게 잘해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상구와의 신뢰는 무한 맹목적이었다. 상구와의 신뢰는 주기만 하면 되고 받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 단순하게 여겨지던 단어 신뢰, 그런데 나는 요즘 신뢰라는 단어가 무섭다. 사람간의 신뢰는 너무 복잡해서 무섭다.
사람 간의 신뢰는 맹목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람의 신뢰는 무한하고 맹목적인 것만은 아닐 때가 더 많다.
마냥 주어도 행복하지 않고, 마냥 받아도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나는 굳게 믿고 의지했지만, 그 신뢰를 받는 상대는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또한, 상대의 신뢰가 내 마음을 부담스럽게 만들 때도 있다.
동료들이 나에게
“그러실 줄 몰랐어요.”
“왜 나를 그렇게 생각하셨어요?”라고 반문하면 당황스러워진다.
나는 죽도록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서운해하거나,
방치했던 사람에게서 무한 신뢰를 받는 상황이 되면, 그 혼란은 더 커진다.
상구와 우리 가족 사이의 신뢰와, 사람들 간의 신뢰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상구와의 약속을 어겼을 때는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사람들 간의 신뢰가 무너졌을 때는 마음이 복잡하다.
신뢰라는 벽은 단단해 보이지만,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리고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멀고 험하다.
참아야 할 말과 행동이 있고, 견뎌야 하는 시간과 희생이 따른다.
만약 마음에도 색깔이 있어서, 신뢰의 색이 선명하게 보인다면 어떨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도 색으로 구분될 수 있다면, 신뢰를 잃지 않도록 조심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신뢰라는 단어가 한층 더 깊고 무겁게 다가온다.
반장의 지게 위에, 신뢰라는 덩어리 하나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