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최저임금이 바뀌면 계약서도 다시 써요 (반장일지 13)

신년마다 다시 쓰는 생산직 계약서

by 파인트리

우리 둘째가 유난히 딸기를 좋아합니다. 사시사철 언제나 딸기 하나면 둘째의 환심을 살 수 있습니다. 진열된 좋은 딸기를 보면 우리 부부는 물론이고 첫째와 막내도 '좋은 딸기 있다!!'라는 감탄사와 함께 자동 반사적으로 지갑을 엽니다. 계획적 장보기를 하느라 항상 메모를 들고 다녀도 딸기만 보면 온 가족이 둘째를 생각하면서 충동 구매를 하게 되는 연유 랍니다..


둘째는 좋아하면 찾아보고 공부하는 성격이예요. 딸기가 모양이 왜 예쁜지, 향기는 어떤 게 좋은지, 맛은 어찌어찌해서 좋아지는지 찾아보고 가족들에게 설명을 곧잘 해 줍니다. 둘째 덕분에 온 가족이 딸기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은 있어요. 과즙이 풍부하고 새콤 달콤한 설향딸기, 커다란 크기에 당도가 높고 딸기 향이 유난히 진한 킹스베리, 색깔이 뽀얀 것이 딸기인가? 의심하게 하는 신데렐라 딸기, 단단한 과육과 풍부한 단맛을 주면서 수출도 많이 된다는 금실 딸기, 종류도 많은 딸기들을 둘째의 교육 덕분에 구별까지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중에 우리 둘째가 좋아하는 딸기는 금실 딸기입니다. 나는 마트를 가든 재래시장을 가든 금실딸기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둘째의 좋아하는 모습이 어른 거리고 둘째의 함박웃음이 떠오르거든요. 딸기를 보고 행복해하는 둘째의 행복한 몸짓이 나를 행복하게 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딸기를 집어들어요. 나도 모르게 어느새 전화를 하고 있지요. "엄마가 딸기 사 가지고 집에 간다." 시크하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아이가 딸기를 볼 때면 활짝 웃습니다.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딸기를 들고 집에가는 동안 나도 마냥 기뻐져요.



신년입니다. 작년의 9680원에서 10.030원으로 최저 시급이 올랐어요. 모든 현장 근로자들은 계약서를 다시 써야만 합니다. 이때마다 고참들은 혹시나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어요. 하지만 정부가 정한 기초시급에 근속연차를 포함해서 시급은 1mm 자란 손톱만큼 올라요. 역시 고참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금액이지요. 주는 쪽은 부담이고 받는 쪽은 서운한 협상이 매년 초면 이뤄지고 있어요.


생산직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자동화된 부품 같은 존재라서 숙련도의 가치를 그리 높게 평가받지 않습니다. 방금 들어온 신입직원도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한 축을 채운 것처럼 정해진 위치에 배정하면 자동 반사적으로 움직이게 되거든요. 제조는 겉에서 볼 때는 그저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로 보여져요. 이 빠진 동그라미 자리는 누구라도 채울 수 있다는 게 제조현장의 현실이어서 그런지 식품회사 생산직이 받는 대접은 어느 회사나 비슷비슷 합니다.


그래도 단단한 고참 조각이 흐물거리는 신입 조각을 부여잡고 어쨌든 동그라미를 만들어 굴리느게 현장 입니다. 흐물거리는 신입 조각이 단단하게 될 때까지 노력과 고됨은 옆에 있는 고참의 몫이지요. 나는 동력을 발휘하는 고참들의 힘을 회사가 알아 주었으면 했지요. 고참들의 동력에 기름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항상 고참의 기름은 땀과 눈물 뿐인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인정 받지 못하는 고참들의 경험은 쉽게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요. 항상 이 점이 아쉽습니다.


고참은 오래 써서 삐걱대고 신입은 윤이 덜 나서 삐걱대고 둘다 삐걱대는 톱니 바퀴를 어찌하면 잘 굴릴수 있을까? 이 삐걱 대는 사이에 기름을 넣어 줘야 하는것은 회사인데 회사는 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것 같아 아쉽지요. 삐걱대는 사이를 땀 과 눈물이 벌써 메꾸고 있기 때문에 잘 돌아가는 것으로 느껴지거든요. 현장 관리자라는 자리는 이런게 보여서 서글퍼요. 현장 관리자라는 자리는 이런 아픔을 같이 느껴서 서글퍼요. 단순하게 기쁨을 찾아주는 그런 조직 생태계면 좋으련만 조직 은 그렇지 않으니 그 또한 서글픕니다.


기뻐할 만한 답을 주는 직장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회사는 계획한 대로 성장하고 이익이 팡팡 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그런 힘을 가진 반장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계약서를 쓰는 동료의 마음을 활짝 웃게 해 주고 싶어요. 계약서를 쓰고 돌아서 나가는 동료의 마음에 '뿌듯'을 넣어 주고 싶어요. 아, 그런데 나도 결국 힘없는 직원일 뿐이예요.


동료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맙다. 감사하다. 잘한다. 최고다."라는 격려뿐입니다. 그래봤자 말 뿐이라 미안하다 ." 맨 날 술이야"라는 노래 제목도 있는데 나는 맨날 말 뿐입니다. 딸기를 보면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둘째처럼 우리 동료들에게도 행복을 주는 계약서를 쓰게 하고 싶습니다. 아이구, 이눔의 힘 없는 반장 자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