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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쓸 생각은 왜 안 하는 걸까?(반장 일지 15)

불만 많으면 사표를 써야지.

by 파인트리


매일 퇴근 시간이 오락가락하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니 퇴근 후의 삶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답답하지요. 갑자기 작업지시가 증량이 되거나 수량이 줄어드는 건 기본이고 출근하면 작업 지시서가 틀어져 있는 것도 늘 불만입니다.

"이걸 대체 왜 바로잡지 못하는 거야!" 매일같이 투덜거리지만, 결국 받아들입니다. 즉석식품이라는 특성상 미리 준비할 수 없는 게 현실이고, 싱싱함이 생명인 샐러드 회사에서 야채를 쌓아둘 수도 없거든요. 매일매일 산지 직송이라 납기시간을 놓칠세라 목을 빼고 야채 입고를 기다려야 합니다.

즉석식품은 주문수량을 일찌감치 받아 놓을 수 없다는 최악의 생산 시스템이 있어요. 그래서 이 내용을 또 이해하고 조율하면서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우리는 싱싱함이 생명인 샐러드 회사가 아닌가요.


그런데 문득 든 생각.

이 정도 불만이면 나는 당장 사표를 내던져야 정상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출근하고, 여전히 조율하고,

여전히 투덜거리면서도 역설적이게 일을 할 때는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게 직장인의 숙명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적응해 버린 걸까?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건 또 뭔 일일까요? 아침만 되면 행여 늦을세라 회사로 달려갈 생각만 합니다. 얼굴에 화장품이라도 곱게 펴 발라서 분칠 할 생각보다는 어서 출근해서 점검하고 조율해야 할 것 들만 생각해요. 출근길에도 작업지시서를 보면서 깔끔하게 열려주지 않는 와이파이를 탓하며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항상 출근 랭킹 1위 아니면 2위 입니다. 회사 문을 닫고 퇴근을 하고 문을 열고 출근을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예요.


회사에 도착하면 다짜고짜 위생복으로 갈아입어요. 작업 현장이 10도로 서늘하니 내복 위에 티셔츠를 단단히 껴입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장으로 갑니다. 원더우먼 부츠라고 생각하고 작업용 장화를 갈아 신어요. 크린테이프로 온몸의 먼지를 걷어내고 40초씩 흐르는 물에 손을 깨끗이 닦지요. 에어 샤워를 통과하여 드디어 작업 현장에 들어가면 살짝 소독 냄새 베인 현장의 깔끔하고 서늘한 공기가 내 몸 안의 폐를 정화시키는 듯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내가 아주 사랑하는 곳이예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나의 일터 이지요.


나의 일정은 분 단위로 있습니다.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과 점검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요. 하나같이 생산에서 놓치면 안되는 것들이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 관리입니다. 컨베이어 벨트 위의 제품들을 매의 눈으로 스캔을 해 봅니다. 중량 오차도 보이고 오토핑도 눈에 금방 들어와요. 실수하는 동료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지요. 동료가 자신의 실수를 먼저 알아 채고 배시시 웃으며 바로 수정합니다. 나도 눈웃음을 날려서 격려를 해 주지요. 바로 이어서 하나하나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합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보이면 작업용 장갑을 얼른 끼고 옆자리에 비집고 같이 서서 도와 주게 됩니다. 저절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작업에 빠져서 내달리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벨트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지요.


정신 차리고 보면 퇴근시간입니다. 묘하게 뿌듯해요. 하루를 잘 살았다고 안도하게 됩니다. 납기를 잘 맞췄고, 계획대로 일들도 잘 진행 되었거든요. 하루 종일 뛰어다녔는데도, 지치지 않아요. 이게 생산의 힘일까요? 책임감의 힘일까요? 만보기에는 매일 만보 달성을 축하 드립니다 메시지가 와 있습니다.

작업복을 벗고 나면 그때부터 온 몸이 천근만근인데, 이상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고 뿌듯해요.

오늘 내가 만든 샐러드들이 어딘가로 실려 나가고, 누군가의 식탁 위에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면 막 설레기 까지 합니다.

(물론, 우리도 모르는 실수를 해서 고객님의 클레임이 들어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


그리고 퇴근할 땐 생각을 합니다.

"그래, 오늘도 잘 돌았다."

잘 돌았다니 이게 뭔 말인가요?.

이제 보니 내가 컨베이어 벨트랑 같은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 건가 봅니다.

속도감 있게 돌아가는 벨트의 속도가 사실 이젠 익숙합니다. 모든 일이 벨트 속도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답답해 할 때도 있어요. 지난 겨울 시골에 김장을 하러 갔어요. 친정은 매년 300 포기가 넘는 김장을 해요. 나도 모르게 식구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작업지시를 하고 있더라고요. 칼 질도 세분화해서 분업 작업을 시키면서 김치 담그기를 회사의 작업 장 스타일로 꾸려 가고 있었어요.

"이렇게 해야 빨라요~"내 말에 식구들은 "이게 뭐야?" 하면서도 재밌어했지요.


일이 재밌으니 사표 쓸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조율하는 투덜거림도 즐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직장이라는 물이 흘러 내 몸의 신체 물레방아를 계속 돌게하고 있나 봐요. 그런데 정말 사표를 써야 할 때가 오면 나는 멈출 수 있을까요? 정년이 다가오니 요즘은 그게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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