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글씨가 필요한 업무
나는 글씨를 좋아합니다. 글씨 하나하나가 마음의 모양 같기도 하고, 사람의 표정 같기도 하니까요.
반듯하게 정자로 써 내려간 글씨는 읽는 사람도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듭니다. 숨도 조심스레 쉬어야 할 것 같고, 실수 없이 읽어내야 할 것 같은 긴장감도 주죠. 반면, 귀여운 만화 같은 글씨는 보는 순간 미소를 짓게 하고, 그 사람의 따뜻한 마음까지 느껴지는 듯합니다. 물론, 마음대로 휘갈겨 쓴 글씨는 여러 번을 읽어도 도무지 해독이 안 되어 점점 짜증이 올라오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난해한 글씨를 기어코 읽어냈을 때의 쾌감은 또 남다릅니다. 작은 승리를 얻은 느낌이랄까요? 시원하게 곧게 뻗은 획은 마치 금방이라도 친구가 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곡선이 많은 글씨는
‘등 기대고 편하게 읽어도 돼요’라고 말해주는 듯한 여유를 줍니다. 그래서인지,
"글씨체로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정작 내 글씨는 변화무쌍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휘뚜루마뚜루 쓴 날도 많고, 마음을 다잡고 예쁘게 써보자고 필사를 시작하면 첫 장은 그럴싸하게 써 내려가지만 장을 넘기기 무섭게 흐트러지기 시작하죠. 반듯하게 쓰려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빨리빨리 달려가고 있는 거죠. 반듯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쓰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결국, 글씨도 마음 따라 흔들리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꾸준히 반듯한 글씨를 유지하는 사람을 보면 존경심이 듭니다.
예전에, 한 노신사의 대학노트를 본 적이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명료하고 단정한 글씨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공책의 글씨,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이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끝까지 반듯하게 나의 노트를 채워보고 싶습니다. 아직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요. 공책을 한 권 가득 반듯하게 채우려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내 성격부터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조 공장도 점점 디지털화되어 갑니다. 이젠 한 번만 클릭하면 과거 자료들이 주르륵, 눈앞에 펼쳐지죠. 그것도 아주 정확하고 자세한 데이터까지 만들어서요. 하지만 아직도 손글씨 일지는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점검을 하고 기록 관리가 필요한 공정은 수기일지를 필요로 하거든요. 실시간 모니터링 자료나 주기적 공정 점검기록. 식품회사라서 가장 중요한 현장과 각실의 온도기록(물론 자동 기록 장치도 있지만 ), 위생 점검 관리 기록들을 수기로 하고 있어요.
왜일까요? 문제가 생겼을때 추적이 쉬워요.
전산 기록은 ‘수정’이 쉽지만, 수기 기록은 고치려면 반드시 그 ‘사유’를 옆에 적어야 합니다. 두줄만 긋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 ‘사유들’을 읽어보는 재미가 꽤 쏠쏠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죠.
“시간을 잘못 기록해서”
“제품 이름을 헷갈려서…”
“순간 정신이 잠깐 나갔다가 돌아와서…”(사실 이런 변명은 안되는데 사실인걸요 )
이렇게 한 줄씩 남겨진 솔직한 변명(?)들이 작은 웃음을 주곤 합니다.
기록은 곧 사람의 흔적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죠.
우리 팀의 일지를 보면 정말 다채롭습니다. 글씨체부터 그렇죠. 일지 담당을 새로 맡기면 하나같이 손사래부터 칩니다.
일단 동료들이 나이가 많아요. 거의 오십 대 후반이거든요. 가족만 챙기느라 열심히 살아온 오십 대 주부들이 글씨를 쓸 일이 뭐 그리 많았겠어요. 그리고 제조회사에 들어오면서 일지를 쓰는 담당을 할 거라고 생각이나 해 봤겠어요? 글씨를 놓은 지 오래라서 내놓고 쓰기가 부끄러운 게지요. 백번 이해합니다. 그런데도
"저… 글씨 못 써서요…"
"글씨가 너무 부끄러워요…"
결국은 제출할 서류들을 손으로 슬쩍 가린 채 조심조심 써 내려갑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그런데 말이죠,
막상 그들이 써 내려간 일지를 보면 또박또박, 정성스레 꾹꾹 눌러쓴 글씨가 참 사랑스럽습니다.
정갈하진 않아도 성실함이 느껴지고, 예쁘진 않아도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잘 읽히면 그만’인 서류에, 이렇게나 애를 썼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입니다.
일지 점검할 때면,
"어우 이건 좀 귀엽네?"싶게 꼼꼼한 획이 느껴지는 글씨가 있고
"이건 또 왜 이렇게 기특해?"라는 생각이 들게 칸을 넘지 않으려고 애를 쓴 글씨의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서 저장을 하고 싶어지기도 해요. 마음이 느껴져서일까요? 예술작품이 아니어도 마음이 보이는 글씨는 저장하고 싶어 지거든요.
라인 속도보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하루를 고스란히 담으려 애를 쓴 글씨들.
그 정성과 마음이 보여서 동료들이 정말 장하게 느껴집니다.
글씨는 마음의 그림 같아요.
그리고 오늘도 내 마음은… 약간 삐뚤고, 고약하다가 약간 귀엽고, 아주 인간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