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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일지의 쓸모 (반장일지 20)

두 종류의 일지를 씁니다.

by 파인트리


매일 현장 일지를 씁니다. 작업 중 설비에 문제가 있던 것도 쓰고요. 전달하고 공유해야 하는 내용도 씁니다. 누군가는 일을 하다가 옆사람과 투닥거리고 삐져서 집으로 가버린 내용도 쓰고, 소통을 하다가 속에서 열불이 날뻔한 내용도 씁니다. 한마디로 현장에서 일어나는 진짜 일들과 말하지 못한 일을 기록하는 것이지요. 물론 공식적으로는 업무 체크 리스트가 있습니다. 그 리스트에 맞게 점검하고 체크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요. 하지만 일지에 그날의 내 감성을 기록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반장은 두 개의 일지를 쓰고 있는 셈이지요. 이 반장일지는 반장의 감정 체크리스트라고 해두죠.


우리회사 생산에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공정과 완제품으로 조립하는 공정이 있습니다. 완제품을 만들기 위해 준비를 하는 여러 가지 공정 중에 열을 가해 삶거나 끓이고 굽기 공정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곳은 열처리반이라고 부르지요. 어제는 열처리반이 ‘면의 나라’가 됐습니다. 하루 종일 면만 삶았어요. 요즘 샐러드에 면이 들어간 제품이 유행이라는데, 우리 공장도 그 대세에 탑승했습니다. 면 삶기 담당은 말 그대로 면 마스터입니다. 그야말로 ‘면 삶기의 장인’이죠.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하루 종일 면 만 삶았어요. 메밀면, 쌀국수, 알리오올리오 파스타까지—맛있다 싶은 면은 전부 이 형님의 손에서 태어납니다. 물론 면 삶는 것도 정해진 공정이 있지만, 센스와 요리 감각이 없으면 쉽지 않아요. 작업해 놓은 것을 보면 작업자마다 그 ‘결’이 다릅니다. 형님은 그 결을 살려요. 면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느낌을 담아내지요. 보기만 해도 맛있게 생겼어요.


하지만 하루 종일 면을 삶다 보면 사람이 지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형님이 저를 붙잡고 하소연합니다.

“반장님… 면 삶다가 나 죽겄어… 다른 제품 좀 잘 나가게 해봐요오~~~”

제가 뭐라고 했게요?

“헤헤, 행님 죄송해유… 우리 행님 솜씨를 고객님들이 너무 잘 알아봐 주시는 거잖아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돌아서서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이러다 진짜로 행님 쓰러지면 어쩌지…’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인원 보충해 주고, 간식 챙겨드리고 , 휴식시간 늘려드리고.....

그 외엔 형님의 건강과 체력이 면발처럼 질기기를 기원하는 수밖에요.

'암튼 우리 행님, 파이팅입니다!!'


오늘은... 마음이 조금 헛헛합니다. 입사한 지 일주일 된 신입 직원 한 분이 퇴사를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분이요, 정말 오랜만에 반장 마음에 쏙 들었던 분입니다. 입사 첫날부터 뭔가 남달랐어요. 그 흔한 "열심히 하겠습니다!"의 다짐도 좋지만, 이분은 일머리! 그 타고난 감각이 있었어요. 서포터 업무를 맡겼는데, 일주일 만에 팀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반제품을 보충해 줄 때도, 아무렇게나 놓지 않았어요. 오른손잡이에겐 왼쪽에서, 왼손잡이에게는 오른쪽에서! 이게 말이 쉽지, 관찰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만큼 현장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할 일을 파악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심지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닙니다. 서포터는 매뉴얼도 없거든요. 작업이 잘 흐르도록 도와주는 자리라서 진짜 센스가 필요한데, 그걸 천연덕스럽게 해내시더라고요.


게다가 그분의 동선은 마치… 벚꽃잎을 흩날리며 길을 여는 봄바람 같았습니다.

거슬림 없이, 자연스럽게, 동선의 교통정리를 하면서도 친절하게.

“와… 이분은 진짜다!”

속으로 감동한 지 이틀 만에… 퇴사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런 반전 드라마.)

“무슨 일이세요? 가시면 안 돼요!”

간절한 제 말에, 그분은 조용히 속사정을 꺼내셨습니다.

“적응이 너무 힘들어요. 야간 근무만 10년 넘게 했거든요. 몸은 아직 야간 근무인 줄 알고 저녁에는 잠이 안오고 …아침이면 ~~흐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어요. 일하는 중에도 사실은 비몽사몽이에요 .공중을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예요…”


아, 그럴 수 있죠. 정말 이해됩니다. 세상에, 비몽사몽에도 일을 그렇게나 잘했단 말인 거잖아요. 그래도 혹시 몰라 붙잡아 봅니다.

“시간 조정도 가능하긴 한데… 조금 더 노력해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정~말 보내기 싫은데.”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더 놀랍습니다.

“그러면 형평성에 어긋나잖아요. 다들 힘든데요.”

이미 결심이 단단합니다. 그분 마음도, 퇴사 의사도, 이미 박스에 담아 포장 끝내서 출고를 시키셨더라고요.


아이고, 아쉬워라.

그래서 저는 또 반장일지에 아쉬움을 저장합니다. 이곳은 저만의 감정 창고입니다. 기쁨도, 억울함도, 서운함도 여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어제의 미안함도 진지함도, 오늘의 아쉬움도 차곡차곡 저장하고 있어요. 언젠가 지금을 회상하며 다시 돌아볼 날이 있을 겁니다. 이래서 반장일지는 꼭 써야 합니다. 지금의 눈물도 추억도, 면도, 다 저장되는 이곳.

오늘도 반장은, 두개의 일지를 씁니다.


개암사 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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