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의 삶이란?
남편은 캠핑을 좋아합니다. 온갖 캠핑 장비에 눈독을 들이지요. 그리고 세팅된 장비의 순서와 사용 규칙을 준수합니다. 준비한 모든 장비를 사용해야 하고 반드시 의자와 테이블을 세팅해서 커피를 마셔야 합니다. 저는 좀 남편과는 달라요. 대충 파입니다. 에어매트 하나만 깔고 잠을 자도 되고 아무 곳이나 앉아서 키피 한잔 하면 됩니다. 잠이 주는 개운함이나 커피의 낭만이 잘 차렸다고 달라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잠시 외출을 해도 돌아올 때마다 티격태격 싸우는 주된 내용은 항상 이런 문제입니다. '대충 편하면 되지 뭘 그리 챙겨서 해야 하느냐?'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맞다는 남편의 생각이 항상 분쟁을 만듭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끼니라고 남편은 제대로 된 밥상을 찾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제대로 갖추어진 밥상을 차려 주라고 하지요. 저는 또 어차피 매번 돌아오는 한 끼를 무엇으로 먹은들 어떠랴? 좋아하는 것으로 먹으면 되는 것이지.라는 생각에 라면도 먹이고, 배달음식도 신나게 먹입니다. 그때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만은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 밥상을 직접 차리지요. 반드시 따뜻한 밥에 맛있는 찌개와 볶음 요리를 기본 메뉴로 플레이팅에도 신경을 씁니다. 바쁘고 피곤해 죽겠는데 대충 먹고살면 안 되겠냐고 화를 내는 나에게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자기가 챙기고 싶은 대로 밥상을 챙겨 냅니다.
60이 넘어서도 주말마다 다투는 우리 부부를 보던 막내가 저를 부릅니다.
"엄마. 엄마는 우리를 위해서 배우가 되어주면 안 되겠어? 우리를 사랑한다면서요? 엄마가 아빠랑 투닥거리면 우리 맘이 너무 불편해. 안 좋아도 좋은 척, 기쁘지 않아도 아빠 있을 때는 기쁜 척해서 아빠를 행복하게 해 주면 안 되겠어? 엄마가 좋아하면 아빠는 뭐든지 좋다고 하시잖아요. 어때? 엄마는 우리 집을 위한 주연배우가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엄마!!" 막내는 차근차근 엄마를 세뇌시킵니다.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갑자기 여배우의 삶이 어디 쉽나요? 며칠 전에는 몸이 안 좋아서 병원약을 먹는데 약이 너무 씁니다. 덕분에 밥 맛을 잃었어요. 밥숟갈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나를 안 스러 하던 남편이 나가서 원기회복이라도 하고 오자고 조릅니다. 나는 또 귀찮아서 짜증을 내려고 했지요. 옆에 있던 막내가 한마디 합니다.
"엄망,엄망~~ 여배우의 삶은 쉽지 않아요."
따지고 보면 여배우의 삶이 어디 집에서 뿐이겠습니까? 직장에서 여기저기에서 불만이라고 투덜거리고, 힘들다고 투덜거리면,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 비위를 다 맞추고 살아야 하나 싶습니다. 그래도 직장을 사랑하고 동료들을 좋아하니까 상냥한 포커페이스를 하고 달래야 합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내용을 납득할 때까지 설득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흥분하면 안 됩니다. 음성은 절대 '미'보다 올라가면 안 됩니다. 조직이 조직의 힘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그 속에는 사람의 마음이 수도 없이 오락가락 얽혀 있거든요. 간과 쓸개를 살짝 꺼내놓고 회의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입에 재갈을 물고 말을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거칠 것 없이 직설적인 성격이라 나는 곧바로 지적을 할 것이고, 맞는 말을 예쁘게 돌려서 하지 못하고 가슴에 팍팍 꽂히게 말을 던질 게 뻔하거든요. 모두를 기쁘게 하는 여배우,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주연배우의 삶이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투닥거리는 제조현장은 초등학교 교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즘 일이 바빠 출근인원이 많다 보니 라인에 서서 일하다가 개인 간의 작업영역을 침범하는 일도 많아요. 그러면 '아, 어쩌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는 것을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해서 여기까지 밀려오냐"라고 짜증을 냅니다. 웅성거려서 쫓아가보면 라인 따라 떠밀려 내려와서 옆구리를 찔렀대요. 찔렀다는 사람에게 왜 그랬냐 물으면 당사자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 모두를 즐겁게 만들고 분위기를 풀어주려면 여배우의 표정과 액션이 필요합니다.
"자기!!! 이 친구 좋아하는구나? 말로 하지 왜 옆구리를 찔렀어?" 어이없는 내 말투와 표정에 일순 굳었던 주변이 환하게 무너집니다.
"에이~~ 좋아한다고 하지 그랬어."
"그러게, 말로 하지 그랬어." 옆사람들도 한 마디씩 거듭니다. 화를 낸 사람도 멋쩍은 표정이 됩니다.
"알았으니 자자 한 발짝씩만 옆으로 조금만 더 가서 옆자리 침범하기 없기"
한 곳을 해결하고 돌아서면 다른 라인에서 목소리가 커집니다.
"이게 정량인데 어떻게 썼길래 벌써 없다고 하냐고요? 이거 작업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반제품을 만드는 조장님의 큰소리가 현장을 쩌렁하게 만들지요. 아~~ 또 여배우의 연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따~ 조장님 그거 내 배가 고프니까 중량을 과하게 넣어 부렀네. 미안해, 언능 다시 해줘유 잉!! 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갑시다 !." 그리고 작업 중인 라인을 또 달래야 합니다.
"조장님이 더우니까 힘들어서 성질머리를 부린거여. 그런데 중량은 지키라고 했잖여. 이번에는 잘 지켜야 되는겨. 알았쥬?"
"저희도 잘하려고 하는데 부족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 동료들이 억울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샐러드에 들어가는 음식들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으니 정확하게 중량을 맞추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야채 한잎도 7g~10g 일 때가 많아 표시중량을 넘길때가 많습니다. 야채를 조금 찢어 넣어서 중량을 맞추는 야박한 행동은 인정상 할 수가 없잖아요. 그냥 몇그램을 더 얹어 주고 말지요(앗. 이건 회사엔 비밀~~). 더구나 열처리를 거치는 반제품들은 지시된 수량만큼 예를 들면 딱 2천 개 만큼 준비를 하면 조립 과정 중에 부족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고기 한쪽도 15g을 넘기는데 10g이 정량이라고 찢어 넣을 수는 없잖아요. 조금씩 더 들어가기도 하면서 사라지는 중량을 수율로 조정했지만 그래도 ' 준비를 덜해서 부족하네. 포장 과정 중에 더 썼네.' 하는 이런 다툼은 매일 있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아휴.
하지만 오늘도 나는 여배우로 살아갑니다. 남편의 맘에 안 드는 행동에도 지금은 거의 화를 내지 않습니다. 집안의 평화를 엄마의 연기로 지킬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오케이 접수 하렵니다. 현장의 불화를 반장의 연기로 화해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역시 오케이 접수하렵니다. 혹시 압니까? 가정에 행복이 넘치고 현장에 평화가 넘쳐서 저에게 여우주연상을 준다고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