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모녀일기

엄마는 제목은 틀리고 감정은 맞추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식구들과 잡답

by 파인트리

한 해의 마지막 밤에는 치맥을 즐겨야죠.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시집간 큰 딸은 없고 신랑도 없고 둘째와 막내랑 반려견 상구랑 넷이었지요. 텔레비전에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이돌들이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어요. 같이 흥겨워 보려고 해도 전혀 감정 이입이 안되더라고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나도 젊어서였는지 딸들과 같이 아이돌에게 빠져서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놀기도 했었는데 문득 그 시절의 god, 샤이니가 그리워지네요. 그리고 혼자 중얼거립니다. '지금의 아이돌들은 나랑 몇 살 차이가 나는 거지?' 참나, 숫자를 세기도 어려워요.

"지금 활동하는 아이돌은 하나도 모르겠다."

슬쩍 푸념 섞인 내 말에 둘째랑 막내가 슬그머니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주네요.

" 엄마! 우리도 요즘 친구들은 잘 몰라요."


눈치 백 단인 막내는 엄마가 서글퍼 질까 봐 대화를 돌립니다.

"그래도 엄마 나는 25년도에 정말 이 책이다라고 생각하며 읽었던 책이 있어요." 둘째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들며 물었습니다.

"뭔데? 뭔데? "

"응, 문미순 작가님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이라는 책이야. 벼랑 끝에 내몰린 삶을 버텨가는 이야기인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감동을 시켜. 따뜻하면 안 되는 내용인데 따뜻해. 엄마랑 언니에게도 강추하는 책이야." 이야기를 듣던 내가

"막내가 감동하는 책이면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감정적 설득이 있는 따뜻한 책인가 보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째도 말합니다.

"나도 25년도에 정말 작가님을 귀하게 생각했던 책이 있어. 성해나 작가님이 쓰신 '혼모노'와 윤이형작가님의 '작은 마음 동호회'야" 우리 둘째는 책 읽기가 일상인 것처럼 책을 많이 봅니다. 가끔 내가 요즘 무슨 책을 봐야 하냐? 하고 물으면 거침없이 책을 추천해 주곤 하지요. 그런 둘째가 작가님을 귀하게 생각하면서 읽었던 책이라고 하니 더욱 호기심이 발동을 했습니다.

"두권 모두 단편 소설로 이뤄진 책인데 단편마다 힘이 있어서 몰입감 최고야. 평범한 현실이 절대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해. 엄마도 25년도에 책 많이 읽었잖아요? 특별히 기억나는 것 없어? " 둘째의 질문에

"글쎄~~ 또박 또박 작가방 선생님들이랑 읽기는 했는데 생각이 안 난다."

내 말에 우리 둘째는

"엄마는 열심히 글을 써서 더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어요. 읽기만 한 것은 읽은 채로 남아 있지만 읽은 내용을 용해해서 글로 써내면 읽은 글의 본연보다, 글로 써낸 자신의 생각이 더 많이 남아 있거든요. "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사랑스러운 둘째는 이런 감동을 주는 말로 엄마의 흐린 기억력을 칭찬해 줍니다.


엑셀 말고 수기로 기록한 몇년간의 일지들



정말 나는 25년에는 무엇을 하면서 지냈을까요? 직장 다니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말입니다, 특별히 기억에 뭔가가 없어요. 책꽂이를 쓰윽 훑어봅니다. 달과 6펜스 주인공이며 그림에 미친 스트릭랜드, 고흐의 영혼의 편지, 최인아대표의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무라카미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패트릭 브릴리의 '나는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H 마트에서 울다' 등등........ 또 직장 때문에 억지로 보게 된 스마트 팩토리, 린 제조. 도요타방식, 관리 감독자 교육용 안전보건교육이 보이네요. 눈앞에는 25년에 읽었던 책들이 가까이에 있고 지난 5년간 직장에 가지고 다녔던 메모 공책도 보이네요.



메모 공책 말인데요. 그래도 시간을 기록해 두기는 잘 한 일인 것 같아요. 현장일지를 써 둔 것들이 때때로 지난 시간을 증명해 주기도 하거든요.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동료들이 어쩌고저쩌고 따질 때, 누군가와의 대화 내용을 상기해서 면담을 해야 할 때 메모 공책을 들여다보면 답이 그 속에 있을 때가 많았어요. 읽다 보면 열심히 일하던 나의 시간들이 느껴져서 나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답니다. 현장일지, 조장일지, 계장일지, 반장일지, 팀장일지, 해마다 진급하면서 공책의 표지 제목이 바뀌기는 했어요. 그래도 메모장 내용을 읽다 보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때의 감정까지 살아나고 있으니 메모라도 이어가고 있는 습관이 다행이긴 하네요.



그런데 책을 읽을 때는 주인공들의 마음에 들어가서 같은 시선으로 재밌게 읽어도 시간이 지나면 깡그리 잊혀 버리는 것은 왜일까요? 나도 이런 책을 읽었다고 설명을 해 주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한 때는 필사를 하면서 기억해 보려고 한 적도 있지요. 그런데 그 기억도 잠깐 이었어요. 필사한 공책이 어디쯤 했더라 하면서 필사 한 것을 찾게 되는 게 대부분이었어요. 그래도 안 읽는 것보다는 읽는 삶이 나은 것은 맞겠지요. 새해에도 역시 열심히 읽어 보기는 하려고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주인공들을 모두 다 안고 갈 수는 없겠지만 제가 뭔가 건질 정신세계는 있으리라 믿어요. 암튼 올해도 책은 읽을 생각입니다. 어차피 잊을 거라면, 좋은 걸로 잊고 싶어서. 둘째의 말대로 내 감정으로 녹아들어 버리면 내 감정만 기억하게 되더라도 어쨌든 읽는 게 남는 거다라는 사실은 맞는 거겠지요? 26년 말일에도 우리 가족의 대화는

쌀 한 가마니 속의 쌀알처럼 무궁무진 해 질 예정이네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