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좋은 사람이 되자
제목이 어렵네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말은 듣기엔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누구와의 약속이냐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친정아버지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버지는 남들에게는 진짜 호인이었습니다. 반면 마누라에게는… 음, 천하에 나쁜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의 한숨 소리를 자주 들으며 자랐어요. 이제 조금 아버지 흉을 볼까요?
아버지에게는 그 옛날 흔하지 않은 기술이 있었어요. 엄마 말에 의하면 '농사꾼이 농사를 잘 지어야지. 쓰잘데 없이 기계만 고치고 다닌다'라고 타박을 하셨던 게 항상 기억나요. 기술을 제대로 펼 칠 생각이면 전파상이라도 차려서 돈을 벌어와야지 쓸데없이 남들 좋은 일만 시키고 집안일은 내팽개쳤다는 게 어머니의 크나 큰 불만이었지요.
제가 봤을 때 아버지는 못 고치는 게 없었어요. 어느 집에 라디오가 고장 났다고 하면 엄마 몰래 슬쩍 "우리 집 마루에 갔다 두셔."하시고 금세 고쳐 주셨어요. 70년대 초 전기가 들어오던 우리 시골에는 전선 장비만 늘어놓고 공사가 지지부진했었는데 아버지는 기술자들을 따라다니며 자원봉사를 즐거이 자처하셨지요. 그 바람에 울 어머니는 혼자 땡볕에 논에 들어가서 거머리 떼어내며 피를 뽑아야 했고, 털 끝 사나운 보리를 베어야 했어요. 농사일을 혼자 하는 게 어디 쉬운 가요? 이만저만 맘고생, 몸고생을 하신 게 아니었던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우리 농사는 팽개치고 어느 집에는 전기를 고치러 가시고, 어느 집에는 경운기를 고치러 가시는 등, 공짜 출장이 아주 많으셨거든요. 출장일이 끝나면 품삯은 막걸리 한잔, 아버지는 술 한잔을 대접받으셔서 거나하게 기분이 좋으시고 어머니는 속이 문 드러 졌지요.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하나같이 '세상에 없는 좋은 양반, 고쳐달라고만 하면 뚝딱 약속도 잘 지키는 양반'이라고 칭찬을 하고 추켜 세우고 있으니 어머니의 속이 썩어도 어디다 함부로 아버지 험담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니까 맨날 방안에서만 어머니 혼자
"온 세상 사람들과 약속은 다 지켜도 우리 집 구들장 무너진 거는 모르는 양반"이라고 푸념을 하셨지요. 덕분에 우리 5남매는 한 가지는 확실히 배우고 자랐어요. '가족에게 좋은 사람이 되자!!"
그런데 요즘 우리 아이들이 저에게 가끔 투덜거려요.
"엄마. 우리랑 약속을 해 놓고 또 어기시는 거예요? "
"응. 우리는 다음에 시간 맞추면 되는데 이 사람들과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래."이렇게 변명을 하면 아이들은
"우리도 일부러 시간 내서 엄마랑 시간 보내려고 하는 건데 우리만 남겨두고 또 어디를 가시냐고요?"
"남들한테 잘하는 거 식구들에게도 좀 해봐요."
가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도 남들과의 약속을 더 중하게 여기는 터라 나는 집을 나서곤 하지요. 묘하게 아버지랑 닮은 꼴이 되어 있었어요.
새 해를 맞이하면서 아버지에게서 얻은 교훈이 생각났어요. "가족에게 좋은 사람이 되자" 그래서 아이들에게 물었지요.
"엄마가 이제 절대 약속 어기지 않고 잘할게. 엄마가 무엇을 해 줬으면 좋겠어?" 내 얘기를 듣던 아이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엄마랑 아빠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운동을 한다 한다 말만 하지 말고 그 약속 좀 지켜 줬으면 좋겠어."
"그래그래. 우리랑 약속 그런 거 조금 안 지켜도 봐 줄 테니까 운동은 빼먹지 말어."
사실 그건 좀 지키기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운동을 하지 못하게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날들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아이들은 모든 사정을 모두 무시하고 그냥 '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일주일에 3번만 할게." 어영부영 꾀를 부리는 나에게
" 안돼. 일주일에 4회 이상 만보라도 걸어요!!" 막내가 단호하게 결정을 내립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좋아. 엄마가 5km를 무조건 한다. 걷든지, 뛰든지. 일주일에 4일 이상 "
그리고 새 해 첫 주부터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한 달을 지켜낸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인증으로 아이들에게 열심히 안심을 주고 있어요. 엄마가 열심히 운동하고 건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는 기쁨인가 봅니다. 매일매일 식단을 짜주고 열심히 응원을 해 줍니다. 그런데 뜻밖의 난관을 만났어요. 가족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약속을 지키는 중인데, 난데없이 모르는 사람들도 인스타에서 응원을 하기 시작합니다. 큰일입니다. 적당히 하다가 여기저기 아프다고 발을 빼려고 했는데 타인이 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러면 달라지잖아요. 아버지의 피를 받은 나라서~! 끝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아버지 흉본 거 아녀유. 잘 배우게 해 주셨으니 감사해요. 어머니는? 음~~ 미안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