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잘 정리된 밭에서 배추의 새싹을 보았다. 주인의 사랑과 정성을 오롯이 받은 흔적이 보였다. 흙은 부드럽고 고랑은 선이 분명하다. 밭둑에는 아직도 피고 있는 호박꽃이 꿀벌을 부르면서 활짝 피어 있다. 고른 흙으로만 덮여 있던 밭이었는데 며칠사이에 예쁜 싹이 돋아나 있었다. 물을 주는 주인에게 물으니 배추의 싹이라고 했다. 그 새싹은 배추가 되어 김장 김치가 되거나 혹은 겉절이가 될것이다. 운명이 정해진 배추의 마음은 알 길이 없으나 이렇듯 미래가 분명히 있는 삶은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인생은 앞날이 불안정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이 될수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래도 그냥 묵묵히 노력하다 보면 어느날 무엇인가 되어 있는걸 알게 될때가 있다. 나이가 50을 앞둔 어느날 빈집 증후군을 떨쳐 버리려고 무작정 들어간 식품공장 생산직. 어느덧 십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나를 건재하게 지키려는 마음에서였고, 자라는 아이들과 동등하게 당당해 지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직장 생활이었다. 하여간 어떤 연유인지 신입 6개월 만에 발탁이 되어 관리자 훈련을 받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나를 발탁 했던 과장님은 생산공장 경력이 30년이 넘으신 분이었는데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왜 그런 모험을 하셨을까 싶다. 명예로운 정년 퇴직을 앞두신 분이 사람을 발탁하는데 섣불리 결정을 하기 쉽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나는 그 분의 결정에 누가 되지 않으려 노력 했다. 보이지 않는 질시와 거친 시선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 이었다.
어쨌건 나는 그때 미쳤다. 미쳤다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 때 쯤의 내 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회사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을 해도 재밌었다. 잠만 자고 나오는 생활이 반복 되어도 재고 조사에 완벽하고 싶었고,생산의 전 과정에 익숙하고 싶었다. 실수를 하는 날에는 실수를 번복하지 않으려고 내 나름의 작업계획과 작업 시뮬레이션을 계속 상상 했다. 직장은 조직이었고 조직과 함께 돌아가야 했었는데 나는 나 한테 집중해 있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여 시시콜콜 확인과 점검을 했다. 나 자신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했고, 더불어 다른 사람의 실수 에도 관대 하질 못했다. 캐물었고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다그쳤다. 그러면서 더욱 완벽한 나를 만들고자 나 자신을 닥달 했다.결코 좋은 상사가 되지 못할 길이었다.
그러면서 나이를 먹어가게 되었다. 내일 모레면 내 나이 예순. 나는 일에 미쳐 있던 그때를 돌아보면서 지금은 웃음이 난다. 그리고 주변을 보는 내 눈은 너그러워 졌다. 적응을 못하는 초년생들도 한없이 어여뻐 보여서 하나씩 하나씩 일의 재미를 알려주려고 한다.결코 두렵지 않은 직장이라는 마음을 갖게 하고 싶어서다. 일에 열정을 보이는 젊은 친구를 보면 어떻게든 그들의 고운 흙이 되어 주고 싶어 진다. 뿌리를 잘 내리도록 거친 돌맹이는 잘 분해하는 해결방법을 만들어 주려고 한다. 맹목적으로 그들의 앞날을 위해서 땅을 일궈 주고 싶어진다. 십년전의 나 였다면 지금의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것 같다. 자신의 앞길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걱정하고 길을 만들어 줄것인가?
나도 누군가의 좋은 멘토가 되어주고 싶고 누군가의 출발점에 힘을 싫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공자는 60세는 '이순(耳順)'이라고 했다.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변의 어떤 상황에 상관없이 좋은 생각으로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지는 것이다. 요즘 들어 십년전 그때 과장님의 마음을 이해 할수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생산직 직장 이라는 곳이 이름없이 굴러가는 톱니 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또 분명한 이름을 가진 정확한 톱니 바퀴 여야만 한다. 정해진 이름을 가진 자리에 분명하게 있을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놈의 생산직은 내가 아니어도 분명히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미래를 가진 사람들이 일을 하는 곳이다. 잘 자라서 배추김치가 되든 겉절이가 되든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로 인해 행복해질 가족이 있고 나로 인해 행복해질 자신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켜야 하는 행복이 잘 자라는 배추의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