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던 분께서 물었다. “죄송한데 뭐 하는 분이세요?” 부엌을 정리할 때는 조리 작업 도구가 많아서 요리를 하시분 인가했다 한다. 그리고는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선생님인가? 또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거실 장을 정리하다 보니 서예도구가 많아서 서예를 하는가 생각도 해 봤다고 한다. 그런데 옷장을 보니 온통 운동복이라서 도대체 감이 안 잡혀서 묻는다고 했다. 나는 씩 웃으면서 “아무것도 안 해요. 저희 집에 이것저것들이 많기는 하지요.”
내가 세상을 일관성 없이 살기는 했다. 한 가지를 꾸준히 해야 뭐라도 성공을 했을 텐데 나에게는 그런 꾸준함이 없었다. 어느 정도 하고 나면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만족감에 빠져서 손을 놓아 버린다. 어느 순간 배울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 순간 배우기를 멈춰버린다.
그런 내가 그래도 서예는 조금 오래 했다 .내가 서예를 시작한 건 실로 우연이었다. 아이 셋을 학교에 보내 놓고 녹색 어머니 당번 아니고는 학교를 방문해 본 적도 없는 나였다.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눈꼽세수를 하고 교문을 지키는데 교감 선생님께서 어머니 서예부를 모집하는데 지원자가 없다는 얘기를 하셨다. 충동적으로 신청서를 내고 말았다. 서예수업이 시작되었다. 뜻밖에 붓 끝에 정신을 모으고 집중하는 게 재밌었다. 학교의 어머니 서예반이 없어졌어도 근처 동사무소 문화 센타로 옮겨가며 서예 공부를 계속했다.
좋아하던 서예도 일을 시작하고 보니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 당시 새로운 직장에서 나의 일은 컴퓨터 사용 능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다짜고짜 컴퓨터를 배우러 여성 복지회관의 엑셀 반에 등록했다. 그런데 엑셀 반을 몇 개월 다니는 동안에 나는 심하게 괴로워했다. 워낙 흥미가 없던 컴퓨터 공부 이기도 했다. 현실에 시급한 엑셀 수업에 집중해야 했건만 수업 내내 옆 교실의 제빵 학원에 후각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화면 앞으로 빵 냄새가 스윽 지나가면서 매시간 나를 유혹했다. 엑셀 능력이 숙달되지 않아서 선생님은 다음 과정도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 간곡하게물었지만 나는 곧장 제빵 과정에 등록했다.
신이 났다. 반죽을 하고 빵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먹이는 게 재밌었다. 무엇을 만들든 간에 아이들에게 먹일 생각을 하면 행복했다. 예쁜 병아리 모양의 브리오슈를 만들어 집에 가져오면 쭈그리 암탉 모양으로 변해 있어도 신이 났다. 제빵 과정 동안에 우리 집 전기요금은 폭탄을 맞았다. 반죽기와 자동으로 식빵을 굽는 기계는 전기를 마셔버렸다. 새로운 주방 도구들에 눈이 돌아 이것저것 사들였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니 빵을 구울 일이 없어졌다. 어른이 되더니 아이들 식성이 변했다. 심심해하던 나는 이번에는 책에 빠졌다. 단편소설을 줄줄이 사 모으다가 시집을 사 모았다. 자기 계발 서적에 빠졌다가 주식 책에 빠졌다. 각종 영어 공부 책과 씨름하다가 결국은 글쓰기 책에 몰두했다. 퇴근길에 단골 서점의 계단 옆 의자는 내 독점이었다. 직장에서 잠시도 읽을 시간이 없다. 그런데도 책이 없으면 허전해서 가방 안에 책을 넣고 다녔다. 덕분에 항상 가방은 무거웠다. 요즘 애들이 말하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아닌데 책의 내용들과 관심이 세월 따라 변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았을까?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할 때가 있다. 길을 가다 힘들어하는 어르신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내달음 쳐도 몸은 선 듯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다.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그 자리에서는 시원하게 댓 거리를 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분노하는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이해득실 따지지 않고 모두 해결해 주려고도 한다. 쓸데없는 오지랖만 넓어서 마음 상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풀어 주려고 노력도 한다.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다. 한마디로 실속은 없는 사람이다.
한 가지를 배워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것을 사용해야 계획된 투자라고 본다. 무엇을 배우든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이득 있는 일을 했다고 한다. 어떤 상황이 생기면 두려움을 모르고 끼어들어 난관을 만드는 어리섞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 맘은 녹슬지 않는 기찻길 같다. 배우는 게 재밌으면 밤이고 낮이고 신나게 다닌다. 자격증반을 목전에 두고 다른 것에 끌리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간다. 이러니 친구들에게서 재미는 많고 실속은 없다 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냥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거 많은 사람인가 보다. 흔들흔들 섞여가며 소확행도 쉽게 정하는 재미난 사람인것같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왔어도 나에 대한 불만이 별로 없다. 이렇게 살아왔어도 내가 특별히 나빠 보이지 않는다. 간혹 주위에서 그런 걸 뭐 하러 배우냐고 묻기도 한다. 실속 없이 뭐 하러 돈들이고 시간들이면서 고생을 하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퇴근 후에 뭐 배울 게 없을까 고민을 안고 있다. 누가 뭐라 한들 어떠랴 내가 배우는 게 재밌다는데~
특별히 잘하지는 않아도 배움을 즐거워하는 나에게 "우리 엄마 무엇을 하던간에 자존감이 '갑' 이예요."아이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