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천근만근이다. 휴일이면 몸이 어떻게 알고 무거워진다. 몸은 내 머리를 지배하는 게 분명하다. 집안에서만 보낸다. 등은 소파에 붙이고 책을 보다가 강의를 듣다가 커피를 내리다가 그렇게 휴무의 하루가 짧다. 오늘은 몸을 일으켜야 했다. 보건증 재발급을 받아야 했다. 보건증의 유효기간은 1년이다. 식품업계에 근무하려면 1년에 한 번씩 재검사를 받아야 한다. 물론 감염병 예방을 위해서다. 나도 좋고 고객도 좋고 보건증 발급을 위한 검사야 말로 꼭 필요한 검사다. 보건증이 없으면 식품업계에서 일을 할 수 없다. 폐결핵 검사를 위한 X선 촬영을 하고 항문에 면봉을 꾹 넣어서 하는 장티푸스 검사를 한다.
대낮에 밖을 나서 보기는 오랜만이다. 매일 아침 6시 출근에 밤이 되어야 귀가를 하다 보니 3월의 대낮 풍경을 알지 못했다. 평소대로 두꺼운 패딩 코트에 모자와 마스크로 감싸고 길을 나섰다. 정류장까지 15분 정도 걸어가는데 등에서 땀이 슬슬 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목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이 시원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옷차림이 가볍다. 가벼운 코트 아니면 얇은 패딩이다. 핸드폰을 꺼내 오늘의 날씨를 검색했다. 영상 18도다. 뭐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고 있었구먼.
겨우겨우 보건소에 당도했다. 보건소 코앞에 정류장이 있는 줄 모르고 한정거장 전에 내려서 또 열심히 걸어왔다. 항상 아이들 아니면 남편이 데려다주던 길이라서 혼자서 버스 타고 오는 건 익숙하지가 않았다. 어쨌건 반가움에 보건소에 불쑥 들어섰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입구에서 막아선다. “ 보건증 하러 왔어요.” 당당하게 말했다. 안내하시던 분께서 종이를 한 장 내민다. “보건소에서 보건증을 당분간 발행하지 않아요. 여기 설명된 병원으로 가세요.” 말문이 막힌다. 코로나 때문에 인력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일찌감치 알아보고 나왔으면 헛걸음을 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핑 하니 집을 나온 게 잘못이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막무가내다. 가보고 아니면 말고 잘 되면 좋고. 이러니 맨날 실속 없다는 소릴 듣는다. 꼼꼼하게 알아보고 재어보고 비교 분석해보고 일을 실행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냥 해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냥 간다. 문득 5일장 구경을 가고 싶으면 그냥 아무 버스나 타고 휭 간다. 돌아오는 막차를 타고 오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장 구경 병은 없어졌다. 공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등록을 한다. 그리고는 시간이 없어서 못하게 되고 어려워서 못하게 되기도 한다. 나의 역량으로 할 수 있는 것인지 계산하지 않는다. `하다가 못하겠으면 그만 두지 뭐` 이렇게 쉽게 생각한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이런 나의 생각이 비밀이다. 행여 계획 없고 치밀하지 못한 엄마를 닮을까 봐 무엇을 시작할 땐 세 번을 생각하고 말해라. 그리고 시작하면 무조건 1년은 해봐라. 1년을 해보고 도저히 못하겠다면 그땐 포기해도 된다. 무엇을 실행하든 치밀하게 메모를 해라. 그래야 실수를 안 한다. 현재의 가치와 실행했을 때 미래의 가치를 한번 적어보고 실천하라고 조언을 하곤 했다.
요즘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내가 했던 잔소리를 고스란히 듣는다. “엄마 그걸 하실 거면 미리미리 알아보고 행동하셔야죠.” “엄마 고민은 좀 해 보셨어요” 쇼핑을 하려 해도 온갖 것을 검색해서 가성비 좋은 상품을 알려준다. 요즘 공부하고 싶은 게 생겼다고 말하면 시간이 되는지 엄마의 건강이 되는지 걱정을 한다. 일하고 공부하고 또 기분이 내키면 연예인이든 강사님이든 덕질하러 훌쩍 떠나는 이런 엄마 때문에 아이들이 바쁘다. 장을 봐다 놓고 살림하고 교대로 청소하고 반려견을 돌본다. 엄마가 엄마 인생을 살아가는데 집안일 때문에 불편하지 않게 도와준다.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삐질삐질 땀 흘리며 헛걸음을 하지 않게 폭풍 잔소리를 한다.
할 수 없이 퇴근길에 병원에서 보건증은 발급받아야겠다. 보건소에서 알려준 몇 개의 병원 중 가까운 곳을 검색해 두었다. 낮에 집을 비운 아이들에게는 휴일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엄마의 헛걸음이 괜히 아이들 마음을 안타깝게 할 것이 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