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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Aug 05. 2021

나도 자전거를 열심히 배웠다.

자전거 여행을 읽다가 갑자기 쓰게된 글.


출근을 하면서 건물 뒤쪽에 팽개쳐진 내 자전거를 본다. 벌서 2년 가까이 자전거는 낡은 우비에 덮인 채로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오고 자전거 도로가 없다 보니 자전거는 제 몫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핸들도 선명한 붉은색이었고 거기에 은빛 휘황한 바퀴를 자랑하고 있었다. 노지에 방치해 뒀더니 지금은 거저 줘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게 생겼다.

   

나는 은근히 자전거에 대한 애정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그때 처음 자전거를 배웠다. 자전거 뒤에 막걸리 한통을 실을 수 있는 짐 자전거였다. 무겁기도 해서 열두 살 아이가 끌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자전거를 두고 나가기를 기다렸다. 아버지 몰래 자전거를 배워 볼 심산이었다. 자전거가 눈에 띄기만 하면  올라타는 기술이 없으니 마루에 자전거를 기대 놓았다.  페달에 겨우 발을 올리고 페달을 굴려 보면서 자전거에 몸을 실어 보내는 연습을 반복했다. 일단 자전거가 반듯하게 서주지를 않았다. 페달을 굴리면 한 바퀴 구르는가 싶다가 넘어졌다. 페달을 굴리는 쪽으로 넘어져서 다리에는 상처가 가시지를 않았다. 복숭아뼈가 있는 곳은 상처 위에 상처가 가중되어 점점 더 덧나고 있었다. 복숭아뼈를 꽁꽁 싸매고 한 달 이상 연습을 하던 중 드디어 자전거가 내 몸을 싣고 반듯하게 서줬다. 잘 닿지도 않는 페달에 겨우겨우 궁둥이를 들고 내리고 하면서 굴리다 보니 자전거가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가 보리가 한참 여물 때였다. 들에는 모를 심으려고 논마다 물이 가득 차 있었고 추수를 앞둔 보리 배미는 누런 황금 들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나와 처음으로 마을 안길을 달렸다. 초여름 바람이 그렇게 달고 시원한 줄 그때 알았다. 단발머리는 목 언저리에 팔랑팔랑 나부끼고 스무 살 고모가 입던 블라우스를 훔쳐 입은 겨드랑이 밑으로 바람이 스쳐갔다. 구불구불 마을 안 길을 돌면서 점점 신이 났다. 혼자 배운 자전거 실력에 스스로 감동하고 있었다. 마을을 돌아 들녘으로 나가는 길은 내리막이었다. 두렵지 않았다. 내리막인데 페달에 힘을 가했다. 자전거에 속도가 붙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그 내리막 끝에서 커브를 돌아야 했다. 불행히도 나는 브레이크를 잡을 줄 몰랐다. 평지에서 페달을 굴리지 않으면 멈추는 자전거만 알았던 것이다. 자전거와 나는 내리막 끝에 있는 잘 익은 보리 배미로 곤두박질을 쳤다. 저만큼 나가떨어진 자전거 바퀴는 헛돌면서 잘 익은 보리들을 마구 밀쳐버리고 있었다.    

 

아픈 것은 안중에 없었다. 그 보리 배미는 동네에서 제일 무서운 훈장 할아버지네 논이었다. 다행히 어른들은 모두 먼 들에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죽기 살기로 보리논에서 자전거를 끄집어냈다. 길옆의 보리 배미 한 고랑이 엉망이 되었다. 일단 자전거를 집에 가져다 놓아야 했다. 멋 내느라 훔쳐 입은 고모의 블라우스가 찢어진 줄도 몰랐다. 겨우겨우 사태 수습을 하고 그날은 아픈척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열두 살 소녀는 진짜로 아팠다. 온몸에 열은 나는데 추워서 덜덜 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제 그 짐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읍내 보건소로 가고 있었다. 하필 전날 내가 뭉개버린 보리 배미를 지나는데 훈장 할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는

“아니 소들을 잘 묶어 둬야지. 이게 뭐여. 뉘 집 소가 다 익은 농사를 이렇게 망쳐 버렸다니께.”

아버지도  망가져버린 보리 배미를  훑어보시더니

“예. 속 상하시겄어요. 소 단속을 잘해야겠구먼요.” 하시며 인사를 건넸다. 짐 자전거에 앉은 나는 더더욱 다 죽어가는 소리를 했다. `끙끙`    


자전거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라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만큼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자전거 사랑이 남다른 내게 김훈 님의 자전거 여행은 제목부터가 호감이 갔다. 호기롭게 책을 펴던 마음과는 달리 읽다 보니 치밀한 문장력에 점점 주눅이 들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그냥 넘기기 어려워 책을 읽는 속도가 나질 않았다. 내버려 둬야 더욱 울창하게 자생한다는 숲의 이야기.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라는 문장을 보면서 더욱 머릿속이 옥 죄이는 느낌을 받았다. 오르막을 오를 때 페달을 밟는 힘의 분배와 내리막에서의 자연을 감상하는 호젓한 기분을 책에서 다시금 정확하게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 문장 한 줄을 읽고 나면 그 문장을 풀이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싶고, 문장에 대한 풀이를 듣고 싶기도 했다. 책 읽는 방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동화책을 먼저 읽고 아이들에게 책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눈빛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다가 결국 아이들이 책으로 읽어 보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보니 책을 읽고 서로 권하기도 한다. `이러이러한 내용이 좋다.` 혹은 `어떤 장면의 설명이 진지하다.` `거기에 설명된 작가의 생각이 나와는 좀 다르다.` 고 하면서 식구들은 책을 권해 온다.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는 가족들에게 아무 얘기도 하질 못했다. 엄마가 책을 계속 가지고 다니니 아이들이 “엄마 그 책 핸드폰이세요?” 묻는다. 핸드폰처럼 계속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자존감이 점점 낮아진다. 읽어내기도 힘이 드는데 이런 글을 쓸 수는 없겠다고 체념을 하게 됐다. 하지만 생각은 많아졌다. 작가라면 이렇게 깊이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학교 3 학년 때 전국이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산길을 깎아 신작로를 만들었고 읍내로 학교를 다니던 남학생은 90%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아직은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가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도 학교까지는 한 시간을 넘어 걸어야 했다. 동네 남학생들은 따르릉 자전거 벨을 울리며 지나가고 여학생들은 죽어라 걸어서 읍내에 있는 학교엘 다녔다.  키가 별로 크지 않았던 나는  책가방이 땅에 닿을 듯한 모양새로 학교를 향해 총총걸음을 하기가 다반사였다. 키 큰 친구들이 성큼성큼 걸어가면 무거운 책가방을 낑낑거리면서 뒤지지 않으려고 항상 이마에는 땀범벅이 되어 있곤 했다.      

우리 집에서 20분쯤 걸어가면 아랫동네와 만나지는 길이 나온다. 우리 동네 몇몇 친구와 선배들이 떼를 지어서 걸어가다 보면 위아래 동네 남학생들도 슬금슬금 자전거로 우리들을 약 올리며 달아나곤 했다. 그런데 그중에 웃긴 놈 하나가 항상 내 기분을 망쳤다. 등교 길의 책가방을 홱 뺏어 가는 것이다. 일단 그 한테 가방을 뺏긴 게 화가 나고 같이 가던 선배랑 친구들한테 누구는 누구를 좋아한대요, 놀림받는 게 싫었다. 씩씩 거리면서 학교에 도착해 보면 책가방은 언제나 학교 교문 선도부 옆에 놓여 있었다. 근처 학교에 다니는 오빠들이 여동생 책가방을 실어다 주는 때라 교문 옆에 가방을 놓고 가는 게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건 아침마다 가방을 뺏길까 봐 이를 앙 다물고 출발을 해야 했다.  

    

그 해 여름 우리 집에 상을 당했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등교해서 학교에 상중이라고 말씀드리고 바로 조퇴를 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산언덕을 헉헉 거리고 올라섰다.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끌고 한 사람도 헉헉 거리고 올라오고 있었다. 정상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이런, 책가방 도둑 까까머리 중학생이다. 이미 인근에 우리 집이 상을 당 한건 모두 아는 처지라서 그 친구는 내가 조퇴한 이유를 단박에 알아챘다. “태워다 줄까?” 물었다. “학교도 늦었구먼. 뭘 나를 태워다 주냐?”나는 댓 거리 하고 싶지 않아서 내리막길을 냅다 달음질쳤다. 자전거는 금세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러지 말고 얼른 타라.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 여기는” 그러고 보니 산언덕 길은 그때는 위험한 길이었다. 여자 혼자 가면 귀신도 모르게 사라지는 길이라는 괴 소문이 나던 길이었다. 갑자기 무서움이 몰아쳤다. “그럼 저기 큰길까지만 태워다 주라.”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에 남학생 뒤에 자전거를 타고 앉은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부끄러움이 극에 달했다. 어떻게든 옷깃도 스치지 않으려고 자전거 뒷좌석의 받침대를 으스러지게 잡고 있었다. 도로공사를 하던 중이라서 깔려있는 자갈돌들이 퉁탕거리며 궁둥이를 아프게 했지만 진땀을 삐질 삐질 흘리면서 참고 있었다. 그 친구의 등에서도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얀 여름 교복이 젖은 속옷에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 뭐하고 학교를 이제 가냐?”민망하던 차에 한마디 물으니 “들에 농약 하고 오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환갑 넘으신 어르신의 늦둥이 막내아들이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한다는 것도 이미 인근에서는 다 아는 일이었다. “그래도 학교를 늦으면 되냐?” 내 말에 “ 아버지 혼자 하시기 에는 일이 너무 많아서~” 하고 말끝을 흐린다. 나는 더더욱 할 말을 잃었다. 잠깐이면 나올 줄 알았던 큰길이 나오지 않아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었다. 

    

자전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때 그 오묘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부끄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왠지 듬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 봤자 열여섯 살 아이들의 생각이다. 김훈 작가님이 이 책을 쓰시기 전에 나를 한번 만나셨으면 만경강 이야기 속에 내 이야기가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싶다. 그랬으면 자전거 여행 속에 나오는 마암 분교의 인수나 귀봉이처럼 이름 석 자 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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