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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채 Feb 27. 2017

히말라야 등정기

케이채의 포토 산문집 #3

네팔에 가기로 했을 때 저는 알았습니다. 히말라야로 향해야 할 것임을. 네팔까지 갔는데 히말라야를 등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가 될 테니까요. 비록 비루한 체력으로 인해 그 결정을 후회할 제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지만 저는 사진가니까요. 사진을 찍기 위해선 갈 수밖에 없겠다,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 첫 히말라야 등정의 시작이었습니다.



말이 히말라야지 네팔에는 많은 산이 있고 많은 트레킹 코스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에버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이 있었고, 그다음으로 유명한 곳은 안나푸르나 트렉킹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간 곳은 괜히 가기 싫어지는 청개구리적인 여행 습성은 이때도 여지없이 발휘되어, 저는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적은 곳으로 가기로 했으니. 그곳이 바로 랑탕이었습니다. 랑탕 산 트렉킹은 코스에 따라 1주일에서 10일 이상까지 다양한 루트로 등반할 수 있지만, 저는 2주여에 걸쳐 등반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들과 같은 시작점이 아닌 그 지역의 전통 부족인 타망(Tamang)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가틀랑(Gatlang)에서 등반을 시작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랑탕 등반보다 가틀랑을 방문하는 게 더 설레었다면 이런 제 마음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사실 저는 자연의 냄새보다 삶의 냄새를 조금 더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현지에서 가이드를 구 할 때는 늘 그 지역 사람을 고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지역경제 활성화랄까요, 같은 돈을 쓰더라도 이왕이면 그 지역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두르가(Durga)는 타망 마을 출신으로 랑탕 쪽 트렉킹을 전문으로 하는 가이드였습니다.  그와 함께 작은 버스를 타고 대여섯 시간을 달렸습니다. 더 이상 차가 가지 않는 곳에 도달해 두 발로 열심히 걷어간 끝에 드디어 타망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마을은 여전히 그들의 전통을 따라 나무로 만들어진 집들이 가득하고, 그로 인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는 곳입니다. 주변 다른 마을들은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집을 짓지 않기에 지금은 더욱 특별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행운이었습니다. 마침 마을에서는 결혼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저의 가이드인 두르가의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결혼식 풍경을 담으러 이른 아침 서둘러 마을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외지인이라곤 오직 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시선을 꽤나 받았지만 그런 시선이 익숙한 저에게는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광장 한구석에 신랑 신부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쌀이라던지 각자의 선물을 가져와 주었습니다. 우리식으로 치면 축의금인 셈입니다. 마을 주민들을 위해 거대한 밥솥에 밥을 하고 모두들 나눠 먹습니다. 그 풍경이 정겨워 한참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순간에 자리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하고 기뻐했습니다. 랑탕 산에 오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얼굴을 붉히고 있던 건 신부가 아니라 저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혼식을 보고 나서는 마을 곳곳을 돌며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고 아침이 찾아왔고, 드디어 랑탕 산을 향해 트레킹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두르가는 결혼식 등의 일로 저와 함께 갈 수가 없다며, 저와 동행할 또 다른 셰르파(Serpa)를 소개해주었습니다. 크리쉬(Krsh)라는 이름의 그는 저보다 많이 어렸고, 무엇보다 저보다도 체격이 훨씬 작았습니다. 저 또한 체격이 큰 편이 아닌데 그보다도 왜소한 모습의 그를 보고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 큰 배낭을 그에게 맡겨야 했는데 그걸 잘 메고 갈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저는 이미 10킬로가 넘는 카메라 가방을 들고 있었기에, 또 다른 배낭까지 가지고 등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사실 맨몸으로 가도 저질 체력인 저에겐 힘들게 뻔했으니까요. 하지만 카메라 가방만은 제 몸에 늘 붙어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침낭과 각종 생필품이 들어간 배낭도 두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조금 믿음직스럽지 않은 크리쉬에게 저의 배낭을 맡기고, 우리 둘은 그렇게 엉거주춤 먼 길을 나섰습니다.



하루하루 우리는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카메라 가방의 무게를 후회하게 만드는 순간이 무척 자주 찾아와 주었습니다. 아직 온연한 봄이 아니라 눈이 남아있는 지역들을 오를 때 유난히 고생이 더 많았음은 물론입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며칠은 다른 등산객들은 전혀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가틀랑에서 랑탕으로 향하는 루트는 일반적이진 않았으니까요. 온연히 랑탕 트레킹 루트에 접어들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그나마도 일부였습니다. 3월 중순은 아직 그렇게 인기 있는 트레킹 시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독을 즐기는 저에게는 오히려 안성맞춤인 시즌이었습니다.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대자연 속을 우리 둘이서만 걸었습니다. 숙소에도 늘 우리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며칠의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제법 친해진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제 배낭을 멘 그의 모습은 휘청 휘청, 제법 불안해 보였지만 내색하진 않았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캉진 곰파(Kyangjin Gompa)에 닿았습니다. 해발 3870미터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랑탕 등반을 끝낼 수도 있고, 이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주변의 더 높은 산들을 오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발 7227미터의 랑탕 리룽(Langtang Lirung)까지 도전하기도 합니다만 저에겐 무리였습니다. 해발 4773미터에 불과(?)한 캉진 리(Kyanjin Ri)를 오르기로 하고 다음 날 아침 크리쉬와 함께 출발을 했습니다. 여전히 눈이 쌓여 트레킹 루트가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기어오르듯 그렇게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그냥 포기할까 하는 마음도 여러 번 가졌습니다. 이미 캉진 곰파까지 왔는데 굳이 이것까지 오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포기를 향해 달려가던 저의 약한 마음. 그 순간에 놀랍게도 크리쉬가 저를 끝까지 가게 했습니다. 다 죽어가는 저로부터 카메라 가방까지 빼앗아 들쳐메며 할 수 있다고, 한번 가보자고 제 용기를 붓돋았습니다. 작은 덩치에 어린 나이 때문에 영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마음을 추스른 저는 그의 리드를 따라 느릿느릿 한 걸음씩 정상을 향해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정상. 펄럭이는 노란색과 파란색 깃발들이 저를 축하해주었습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보였고, 이미 충분히 높다고 생각했던 캉진 곰파 마을이 조그맣게 들어왔습니다. 해발 4773미터. 아마 제가 사는 동안 이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또 모르죠. 등산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산을 오를 일이 자꾸만 생기고는 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힘들었던 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정상위에 올라서 행복했던 감정만 떠오릅니다. 저의 뇌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우는 것에 능숙하거든요. 덕분에 같은 실수를 자꾸 반복하기도 하지만 꽤나 기특한 녀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수 없다면 즐거운 기억을 간직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이것이 가틀랑 마을에서 랑탕까지 이어진 저의 히말라야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네팔에는 대지진이 찾아왔습니다. 거대한 지진으로 가틀랑 마을의 아름다운 집들이 무너져 내렸고, 캉진 곰파 마을 또한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에 닿았을 때 지진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두르가와 크리쉬와는 연락을 취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파괴된 그들의 보금자리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곤 있지만.. 어떤 건물들은, 또 어떤 장소들은, 다시는 예전의 그 모습이 될 수 없을 거라고 합니다. 의도치 않게 저의 사진은 지진 직전 그곳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소중해진 기억이자 또 사진입니다.



사진으로밖에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사진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조금 더 애틋해집니다. 사실 어떤 사진이던 나이를 먹어갈수록 거쳐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기도 합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이, 또 풍경들이 변해가고 사라져 가는 것은 시간이 흐름처럼 막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단지 네팔의 사진들에겐 그 흐름이 너무 급작스럽게 찾아온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럴 때면 저는 사진가로서의 책임감을 느낍니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빨리 담아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몸을 뒤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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