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게으름이 또 도졌는지 운동은 물론이고 건강유지를 해오던 노력도 슬금슬금 내려놓기 시작했다.
어려서 큰 수술을 한 이후로 자잘한 병치레가 많았다.
감기나 피부에 난 알 수 없는 사마귀 같은 당장 죽을 거 같은 병이 아니었으니 큰 불편을 못 느꼈다가 30을 넘어가면서 한번 크게 망가졌다.
10대 20대에는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했으니 공하나 들고 여기저기 남에 운동장을 찾아 친구들과 뛰어놀기 바빴다.
덕분에 공부가 좀 쳐져도 체력은 좋아지고 어찌 보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에 아이들은 축구를 한참 하다가 사람이 많이 필요 없는 농구가 유행하자 농구로 마음이 쏠려 농구를 하러 다녔다.
어디서 배운 것도 없이 친구들끼리 놀다 보면 형들이나 선배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배우기도 하고 어려서 골대가 있는 운동장을 사용하기에 어리고 힘이 부쳐 이 리치이고 저리 치이고 해도 자리만 나길 기다리며 이곳저곳을 옮겨 갔던 기억이 있다.
내가 다니던 중 고등학교는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도 100미터가 나오지 않는 작은 학교였다.
100m 달리기를 하려면 운동장 3/4 바퀴를 돌고 도느라 가속도가 줄었으니 1초를 빼줬다.
그 좁은 운동장에 고등학교 중학교 야간 고등학교까지 같이 나누어 쓰다 보니 운동장을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부족한 운동장을 체육관을 지어서 보충을 하였다.
마루가 깔린 체육관을 개방하여 주면 좋으련만 그 당시 학교는 그런 호의를 베풀던 시절과는 멀었다.
동네에서 가까운 운동장이라 할 만한 곳은 지금은 이랜드 리테일 본사 자리였다가 청년임대주택이 되어버린 자리가 원래는 홍익공전이 있었던 자리이다.
홍익공전은 홍대로 합병이 되어버려서 이랜드가 들어올 때 가장 아쉬웠던 것은 널널한 운동장이 이랜드 재고품 행사장으로 바뀌어 천막이 쳐진 모습이었다.
이곳에 운동장이 종종 비워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홍대 정문 앞쪽에 운동장에 설치된 농구대나 홍익여고 자리의 운동장 어쩔 때는 서강대나 연대에도 몰래 들어가 놀았던 것 같다.
누가 정해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룰이 있어서 어린 학생들이 들어와 있어도 곧잘 자리를 내어 주거나 사람이 없으면 같이 편을 나누어 뛰게끔 해주었다.
군대도 알보병으로 박격포를 매고 양구와 강원도를 누비며 행군을 하고 나온 턱에 전역 후에도 그럭저럭 운동을 안 하였어도 기본 체력은 자신이 있었다.
멋지다 할 정도로 잘 빠진 몸매는 아니었어도 그럭저럭 평균치의 몸으로 한참 지내다 30이 넘어가면서부터 자꾸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놈의 술이 문제고 안주가 문제고 운동은 전혀 안 하는 생활패턴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그리고 몇 년을 계속 진행하다 보니 몸무게가 세 자릿수를 향해 가고 있었다.
100을 넘어서 한참을 더 가고 있어도 나는 각성을 하지 못했다.
그냥저냥 사는데 별 불편함이 없었고 술 마시고 사람들 만나서 어울리는 그 자리를 너무 좋아했다.
어려운 일들이 나 스트레스를 받아도 술이요
세상의 모든 욕망이 식욕과 음주로 보상되어서 점점 더 빠져들었다.
주변에서 괜찮냐고 이야기해도 건성건성 귀찮아하고 짜증을 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이들인데 참 서운하게 했구나 후회도 된다.
그러더니 한창 좋은 남자나이에 결국 몸이 사달이 났다.
당뇨가 생긴 것이었다.
당뇨가 생기면 일단 소변을 자주 봐야 되고 심해지면 몸무게도 훅 빠지게 된다.
그래도 초기까지 그러려니 별 생각이 없었다.
빠지면 자동 다이어트가 되네 하고 아무 걱정도 없이 살다가 점점 힘이 없어진다.
어디 가서 힘이나 근력은 자신 있었는데 근육이 빠지게 되고 체력이 급속히 떨어지게 되었다.
친구들과 북한산 등반을 가다 중도에 포기해야 했고 연애 때 옆지기 친한 언니 커플과 하남의 검단산을 등반하다 죽을 둥 말 둥 개망신을 당하고...
늦게 병원을 다니고 주사까지 맞아야 했다.
이런저런 검사를 하니 다행히 다른 합병증은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래도 약을 먹고 식단을 조절하고 술을 끊었다.
저혈당이 오는 기분을 느끼며 당황했고 그제야 마음이 급해졌다.
그때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근육이 다 빠진 호빵이 되어서 다시 힘이 붙기까지는 시간이 참 지난했다.
걷기를 하였고 노르딕스틱을 사서 걷는 모임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체육센터에 가서 다이어트 성인반을 다니고 요가를 하고 필라테스를 하고...
운동도 운동이지만 결혼을 하면서 식이요법을 하여 식단조절을 하는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까지 누가 챙겨주지도 않았을 테고 천성이 게으른 나는 대충 시늉만 하다 지레 포기했을지도 모을 일이다.
정말 다행히도 젊은 나이에 생긴 병이라 약을 끊었고 어느 정도 정상치에 접근하게 되었지만 역시나 사람 제 버릇 못 버린다고 술을 조금씩 먹었다.
10년 전 아찔했던 순간을 망각하는 게 참 어리석은 짐승이 나란 인간이다.
몇 년 전에는 무릎이 너무 아프고 통증이 심해 온갖 검사를 하고 난리를 부렸는데 회사 근처 조그만 내과에서 원인을 찾았다
통풍이었다.
원체가 둔한 인간인지라 통풍의 고통을 참으며 운전을 하고 다녔다.
운전대에 앉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이를 악물고 고통을 이겨낸다고 소리쳐 쌍욕을 해가며 쌩 난리를 쳤었는데 통풍이라니...
통풍이 왜 발이 아니고 무릎인지...
아 당뇨 말고 통풍도 조심해야 하는 인생이 되었다.
그러고는 한 동안 괜찮았는데 작년에는 어깨가 올라가지 않았다.
잠을 못 자는 통증과 생활의 불편함은 이루 말하지 못할 만큼 힘들었다.
오십이 넘었으니 오십견이 왔구나
어깨 아프다는 놈들은 웬 그리 꾀병이 심한가 골프 치고 놀러 다니다 그렇지 속으로 혀를 차며 조소했는데 이게 정말 사람 잡는 고통이었다
이 고통도 참다 참다 병원을 몇 곳을 헤매고 알아낸 사실은 목디스크였다.
내가 얼굴이 커서 목이 불안 불안했는데 살 빠지고 목근육이 없어진 건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자다가 이리된 건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일 년을 도수치료와 운동으로 돌아왔다.
결국 남들이 조심하라는 성인병이란 성인병은 다 거치고 이 자리에까지 와서 멋쩍게 글을 끄적거리고 있다.
우리 옆지기님이 나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다.
당신은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먹어봐야 하는 사람인데 찍어 먹고도 갸우뚱하고 의심이 많아 한 번 더 찍어 먹는 인간이라고...
맞다 남에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잘 안 믿는다.
공감능력이 버튼을 켜야 발동되는 후진 기계 같은 사람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런 면에서 참으로 불효자이다.
다행히 이런 모습을 보시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죄송하다.
신언서판을 번듯하게 키워 세상에 나가야 하는데 말은 막말을 하고, 글은 개발새발 하고, 하는 말은 농지거리가 입에 배었고, 씻는 것도 귀찮아하고 의복은 아무거가 편하게 걸쳐 입고 다니니 지금 요 모양 이 꼴일지도 모르겠다.
내 몸을 몸이라고 몸종 부리듯 막 굴렸으니 몸이 종이라도 어찌 내 마음을 받들까 싶다.
사람이 음식이라면 마음은 그 내용물이고 몸은 그릇이 될 것이다.
산해진미라도 군대서 먹던 밥비닐에 담아내어 놓으면 위생은 둘째치고 보기 좋지도 않고 맛도 떨어질 것이다.
나는 이왕이면 호텔 레스토랑에 나오는 비싼 정찬으로 그릇도 번듯한 사람이 되고 싶다.
병이 들어 건강을 생각하는 미련한 사람이 몸빵으로 다 겪고 부딪혀가며 살아온 날을 여다 글을 남겨 여죄가 있나 없나 찾아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몸을 아끼지 않고 스스로 자만한 탓이니 자수를 하고 고해를 한다.
그래도 아직 몸뚱이가 쓸만하니 남아 살아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