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추억하다. 1

카지노를 보다가

by 승환

카지노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다

1편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보다가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말년에 치매증상이 있으셔서 마음고생이 많았다

먼저 결혼한 동생의 제수에게 김치를 친정 캐나다로 빼돌렸다던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정리한 그릇이나 세간살이가 없어졌다고 우기기도 하시고 동생내외가 사업이 망한 걸 마약을 해서 돈을 탕진했다고 한다던지 이런 식이다

집착증과 피해망상이 평상시 멀쩡하다 부분적으로 억지를 피우셔서 힘들었다

동생네는 안심시키기 위해 마약검사까지 받았지만 그조차 믿질 않으셨다

내게는 노름을 한다고 하시는 게 고역이었다

친구 중에 G를 보면 노름을 하는 친구, 하우스를 하는 놈이라고 만나지 말라고 화를 내셨다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어도 그 친구가 하우스를 하는 곳에 있다가 늦게 왔다고 역정을 내신다던지 노름에 집착을 보이셨다.

이는 아마도 당신이 노름도 많이 하고 패가망신한 이들도 옆에서 지켜본 게 많았던 것이라 나온 이야 가다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는 동네 노름방을 열심히 다니셨다

동네 약국이 하우스가 되기도 하고 밤새워 있다 들어 오심 끝나고 술을 드시고 오던지 맨 정신 일경우라도 박카스를 얼마나 드셨든지 오줌발이 다음날도 샛노랬다. 하우스의 비용이 아마 박카스 인 듯했다

당연히 부모님들은 트러블이 많았다

서로 악다구니를 쓰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차란 것치곤 큰 사고 없이 어른이 되었지만 조금 어렸던 동생은 막내라 그런지 한창때 방황도 많이 했다

한 없이 커 보이고 강했던 아버지가 중년에 스스로 조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게는 반항보다는 애잔함과 서글픔에 동화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가스라이팅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을 자식이 중재하기도 무언가 내 능력 밖의 벅찬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 편에 서서 보았던 것 같다.

기존에 배워온 대로 여필종사하는 여성, 현모양처 이런 것들을 배웠고 읽었고 그렇게 알 수밖에 없었다 거디가가 나 자신이 남자라는 것에 우월의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술을 드시고 난 후 옛날 무용담을 늘쌍 자식들에게 하시곤 하였는데 어린 시절에 모두 신기하고 아버지가 주인공인 아버지세대의 무용담이 내겐 전부 진리였고 멋있게만 보였다.

머리가 커지고 아버지의 매번 반복되는 무용담은 고문과 같았다.

어머니의 실수로 인한 경제적 손실도 있었고 싸울 때마다 그때의 일들과 어머니의 비난을 듣는 것도 싫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환갑을 채 못 채우시고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더 술에 의존하시게 되었다.

젊어서 돈이 있을 때는 밖으로 술친구들과 어울리시고 술을 드시고 집에 오셨지만 말년즘엔 집에서 혼자 드시는 경우도 많았다.

학교를 다니고 한참을 공부해도 모자를 시간을 밤을 새워 아버지의 술주정 같은 옛날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날이 새기도 다반사였다.

반항보다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애잖아 했다.

그것이 가스라이팅인지 아니면 혈육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는지 아버지를 혼자 두지 못하고 밤마다 이야기를 들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를 듣듯이 어린 시절부터 주로 젊은 시절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아마도 그 시절이 아버지에겐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무던한 성격이나 인내심으로 보이는 지금의 성격은 아마도 버티면 해가 뜬다는 건성건성 시간 보내어 버티면 갈등을 이겨내고 지나간다는 경험으로 생겼을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문열의 변경에 나오는 깡철이 같은 주인공으로 또는 비운에 빠지는 중년의 남자로 소설이든 자서전 같은 책으로 남겨둘 생각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고 난 기억이 점점 가물가물해져 간다.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하기는 힘든 남자였지만 어떻게 보면 당신 하고픈 대로 다 하시고 말년의 고생쯤이야 감수하셔야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아버지의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은 특히나 거칠고 무정부 같은 사회상을 헤쳐오면서 아마도 6.25 전쟁 중의 학생시절의 운동과 탈선, 그리고 군대에서의 경험들이 그렇게 흘러가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1950년대의 유년, 학창 시절은 해외뉴스란에 나오는 내전을 겪은 나라들과 다르지 않았다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나라가 없어지고 전쟁을 지나쳐오면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거칠고 사납게 스스로 무장을 해온 시기이다.

사람의 주검을 너무도 많이 보아야 했고 정치라는 것도 법이라는 것도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기에 폭력에 무감각해진 시대이기에 학생들도 당연히 동물들같이 치고받고 싸우고 뺏고 서열을 가리며 강한 것에 동경을 하고 커 왔다 한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옛이야기이지만 긴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시간을 아버지와 보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나이가 1940년생이니 전쟁이 끝난 후 중고교 시절은 가장 혼란한 시대였다


독재가 시작되고 정치깡패들이 득세하던 시기이고 학생들도 그런 분위기에 많이 휘둘릴 수밖에 없었지만 부끄러운 역사다

이정재 유지광 등이 나오는 무풍지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당시 유지광은 화랑동지회라는 사조직 비슷한 것을 만들고 세를 키우고 있었는데 한성이나 주변 고등학교 학생들도 많이 스카우트를 하고 학교 일진 건달들의 영역을 인정해 주면서 관리를 했다.

그중 아버지는 배재중고를 다녔기에 아현 굴레방다리 서대문 밖 쪽의 학생건달들과 어울렸고 학생시절 탈선의 시기도 있으셨던 것 같았다

술을 드시고 18살에 아현염리동교서교서강등 지를 다 통합했다고 하신 말씀들이 무슨 말인가 이해를 한 것은 한참 후에나 가능했다 고등학교 학생이 건달두목을 해서 가능한 일인지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술 드신 과장이 심해지시는 건가 했다.

당신은 공부도 잘했다고 하는데 그럼 경기를 들어가셨어야 하지 않냐 하면 당시에 전쟁 끝나고 건물이 멀쩡한 데는 배재 밖에 없어서 갔다고 하셨는데 경기중고 갈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어린 그 나 이즘 당수도에 빠지셔서 운동한다고 공부할 마음도 없으션던것 같다

그 탈선의 끝은 아마도 무리 중에 누가 살인으로 실형을 받고 얼마 안 가 5.16으로 깡패들이 전부 소탕이 되어서 끝나게 된다

그 이후 대학을 들어가서 평범하게 사신 듯 하지만 훗 날도 그렇지만 운동했고 가다 노릇 건달했던 이력은 이리저리 사고칠일이 많았을법했다.

전쟁 중에 만학도들도 많았고 주먹이 세면 나이도 소용없이 형님대접을 받고 본인 맘대로 할 거 다 하고 그러다 보니 거만해지고 독선적이다 보니 안 봐도 불안 불안하셨을 거 같다 그런 연유인지

할머니가 성화하셔 못 이기고 군대를 가셨다고 한다

보통 군대를 가면 정신 차리고 철들어 온다고 하지만 예전 군대라는 것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쉽게 값어치 없이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억지로 버티고 살아남아야 했던 시절이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겪은 군생활은 후에 안 좋은 쪽으로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아버지는 60년대 초 군생활 중 차출되어 전라도 화순에서 군생활을 했다.

아마도 전쟁 후 사회는 어지러웠고 5.16을 군대에서 맞이하고 일반인들이나 군대나 기본적인 체계가 잡히기도 전의 군생활이었던 그 시절이다.

공수부대로 차출을 간 곳에서의 훈련과 교육들 OAC교육을 하는 조교로 있으면서 일반적인 군생활과는 먼 군대였다고 한다.

장교를 대상으로 유격조교로 일하지만 평시에는 HID나 그 이상의 생존과 살상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HID가 소모품으로 일반인을 차출해서 만든 시대적 비극이지만 아버지가 계신 곳은 무술유단자들을 차출해서 유격등 여러 훈련들의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 중이었고 보급이나 대우는 일반 장교보다 좋았다고 한다.

과장이 좀 심해서 유격훈련이나 장교들 받는 OAC 교육 틀을 만들고 나왔다고 하는데 조금 의심이 가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군번이 없는 그냥 올 빵빵 군번이고 부대밖에서든 안이든 실탄을 지급받아 들고 다녔기에 거치는 것 없이 망나니로 있어도 터치할 사람도 없었고 위에서는 다 커버를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군생활을 했을 시 전두환과 장세동이 직속상관이었다고 한다. 훗날 광주의거 때 민간인을 공격한 공수부대도 그 부대의 후신이었다.

63년 제대를 앞두고 전역을 시켜주지 않아서 총을 쏘고 난리를 피워서 간신하 제대를 하셨다고 한다. 베트남전 전쟁에 참가하기 직전 미국의 요청으로 테스트 겸 선발로 공수부대로 참여를 시키려다 무산되었기에 전역이 늦어졌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시진 않았지만 기존 육군에서 보급계로 편히 계셨는데 아마도 사고를 치고 차출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버지는 경희대에 태권도부 출신이셨고 13살부터 당수를 수련한 경우라 키나 덩치를 떠나 주먹 쓰는 일에 사고가 많이 있었을법했다.

당시 대학은 몇몇 대학을 빼곤 이제 학교로 자리를 잡아가는 처치라 학문적이나 학생들의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었고 학교대항의 운동대회에 태권도부는 선수들 보호목적 및 학생들끼리 빈번한 패싸움에 지지 않으려 쫓아다니는 게 주로 하는 일이었다고 하니 공부보다는 싸움질이 일과였던 시절이라고 한다.

당시는 태권도라 하지 않았고 당수도 태수도라 불렀는데 공수도 가라데의 변형이라고 태권도는 원래 전통으로 내려온 게 아니라 하셨다. 그 당시의 도장은 무덕관 송무관 한국체육관 등이 가장 많이 알려졌고 가라데와 많이 흡사해서 일격필살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기치로 정권단련과 발차기를 수련하는 방식이었기에 40대까지도 아버지의 손등은 남보다 두 배나 두껍게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

이런 부류의 젊은이들만 모으고 뽑아서 부대를 만들고 살인교육과 훈련을 키웠으니 군 생활에서 받은 정신적이 대미지도 적지 않았을 듯하다.

그 영향은 평상시 잘 안 보이다 술을 드시면 자주 나오게 되는 듯했다 전역 후 한참 동안은 아는 술집에서 젓가락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비싼 나무젓가락을 구해서 대신 주었다고 하는데 아버지 말로는 젓가락 한 짝만 있으면 던져서 이마에 바로 구멍을 내버렸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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