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퇴근을 하는 저녁이면 나는 오자마자 분주하게 주방으로 향한다.
스텐냄비에 물을 끓이고 계란을 삶는다 전기쿡탑에 9단을 맞춘다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면 온도를 낮추고 다시 8분을 더 끓인다.
아내의 요청사항이다 딱 먹기 좋은 반숙이 익는 시간이다. 이 비법을 전수받기 전까지 삶은 계란의 반숙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설익거나 너무 퍽퍽하지도 않은 아내와 나 사이에 둘이서 같이 살아가야 하는 최적의 온도였다.
저녁식사의 시작은 보통 집에 도착하기 전에 카톡이나 전화를 아내에게 한다. 특별한 저녁을 할 것인지 어떤 메뉴를 준비할지를 상의한다.
체중관리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아내는 위가 좋은 편이 아니기에 조금만 기름진 음식을 저녁으로 먹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
오늘 같이 삶은 달걀을 준비하거나 샐러드, 고구마를 어떤 때에는 버섯과 두부를 부친다.
구워 놓은 빵을 냉동실에서 꺼내거나 만들어 놓은 요거트를 먹거기도 한다. 가끔씩 어쩌다 한 번은 배달음식을 먹기도 하고, 외식을 하기도 한다.
나는 밥을 정찬으로 차려먹거나 육류를 즐겨했고 술을 곁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 이제는 가볍게 먹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나이를 먹으니 식욕은 수그러들었고 양껏 먹는 일이 몸에 버거워지기도 했다.
뭐든 먹고 보면 못 먹을 건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매 끼니의 차림과 설거지들 그 번잡함도 부담스러워졌다.
아내와의 식사는 그 짧고 어설픈 요리를 위한 시간들, 그리고 치우고 정리하는 과정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제는 힘겹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고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행복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내와 나는 신혼 초에 저녁밥을 차리는 것으로 싸움이 잦았다.
퇴근하고 잠시 딴짓을 하거나 쉬고 있다 보면 저녁준비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못했었다.
어차피 아내가 미리 주말에 만들어 놓은 밑반찬과 음식을 데우는 일이라 오면 같이 하던지 뭐 늦어봐야 몇십 분인데 그런 생각...
늦게 들어온 아내는 집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많이 화를 내곤 했다.
너무 늦은 저녁을 먹기는 부담스러워 일찍 조금 준비해 주면 안 되냐는 불만이었다.
주방에서의 일이나 살림의 주 업무가 내일이라는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았다.
득실이나 형평성을 따르는 일이 유치한 것이지만 내 나름에는 같이 벌어도 내가 생활비를 다 대는데 내가 좀 손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야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모임을 나가고 그렇게 남자들은 자기 할 일 볼일을 다 해도 받아주는 부인들을 보고 알아왔기에 '남자가 좀 그래도 어때?' 그게 평균적인 삶이라 생각이 들었다.
티브이에 나왔던 어느 병원장의 집안에서는 의사 남편은 군림했고 아내를 시종처럼 부려도 아내는 다 맞춰주었다. 아내와 싸울 때면 그런 집안도 있는데 내가 그리 못하는 거냐 비교를 했다.
치사스럽게도 "내가 의사나 전문직만큼 월몇천씩 벌어오지 못해서 몸으로 때우라는 거냐"는 비난도 했다.
그러면 화가 난 아내는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라고 나를 설득하거나 화를 풀어주기보다는 같이 맞받아치기 일쑤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돈을 좀 벌어오던지 나도 집에서 편하게 있게"
돌고 도는 이야기의 결론은 없었고 원점으로 돌아오고 나면 서로에 대한 원망이나 앙금만이 쌓여갔다.
한 번은 크게 싸우고 별거를 해보기도 했고 나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혼자서도 밥과 술도 잘 배불리 먹었지만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우여곡절의 다툼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시기를 지나고 나서 지금은 익숙해져 가는 일상에 감사함도 느낀다.
사실 별다른 극적인 어떤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서로의 보이지 않던 속마음이 보이기 시작해서이다.
그 속마음 속에서는 나의 모습도 보였고 아내는 나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하나는 서로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대인관계가 많이 줄어들었다.
밖으로 돌던 마음이 다시 집으로 향했고 서로가 아니면 말할 상대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에 줄 곧 서로를 바라보는 날들이 늘어갔다.
관계라는 것에 한하여 보자면 동료라던지 친구들이 예전처럼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먹고사는 일에 치이다 보면 그만큼의 열정이 남아나질 않는다. 각자의 사정상 사는 곳은 멀어지고 서울에서 서울 끝으로 경기도 어디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잠깐의 만남을 위해 왕복 두세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치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내가 없었으면 어쩌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보내는 날도 있었을 것 같다.
결혼 전에는 혼자 살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 적이 많았다
지병으로 혼자 집을 지키시면 누군가 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 말 한마디 못하고 있으셨다.
저녁이면 오늘은 한마디도 못했다는 말에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티브이를 보고 전화도 있는데 심심하신가 보다 생각만 했지 이해하거나 위로해 드리지 못했다.
내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노여워하시는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세상에 혼자남아 있는 외로움이란 것이 어떤 것 일지도 상상이 된다.
고요하고 평화로움은 외로움과 고독의 뒷면이었을 것이다.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불편함이 없다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 왜 스스로 버티고 혼자라도 굳건히 자신을 관조하는 삶을 못 찾는다고, 그것을 비난하거나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되는지
혼자서도 요즘은 잘만 먹는 밥이지만 누군가와 밥을 먹는 일은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마음이 허기져서이다.
나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맛을 음미하는 것보다 더 강한 쾌감과 안도감은 누군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유튜브의 먹방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런 것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창가에 얼굴을 내밀고 거리를 보는 고양이들과 멍멍이들 영화를 보는일 책을 읽는 일 불멍과 물멍 무엇을 목적 없이 바라보는 일은 외로움을 스스로 견디는 일이다.
나를 끄집어내어 비추는 스크린을 펼치는 일이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자유이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 충분히 행복을 찾기도 하고 위로가 되는 삶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 속에서 가족과 친구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바라보는 일은 좀 더 쉽고 편안한 지름길일 것이다.
농부는 자기 논에 물들어 가는 것과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일이 제일 기쁘다고 한다.
어미가 되어 자식의 먹는 모습을 보는일, 키우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먹이는 일, 연인끼리 형제, 친구끼리 나누어 먹는 일, 이런 일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먹는 일은 살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일이고 큰 욕망이다.
나 아닌 누군가의 그 욕망을 지켜보는 일, 내 입 보다 마주 앉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욕망들을 미소 지으며 볼 수 있는 일이 사랑인 것 같다.
먹는 일, 생명체로써 가지는 태생부터 받은 본능을 스스로 거스르는 일의 미스터리를 생각한다.
왜 사람은 이리도 복잡한지 모를 일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부족하고 미완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혼자가 아닌 관계 속애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부조리하다고만 생각한 인생과 존재의 의심을 거두는 일을 타인에게서 얻는다.
식탁 앞에서 마주 보는 매일매일의 한 끼 식사를 통해 나를 찾는 일을 내게서가 아닌 타인에게서 찾아야 할 일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