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끄치고 나서도 한동안 하늘에 구름들이 떠돌고 있다.
장마라기 보다는 이제는 국지성으로 내리는 호우들이 내리고 얼마 안되는 거리라도 지역마다 날씨가 판이하게 달라졌다.
마른장마가 무섭다는 말은 경험상으로 항상 그랬다. 지리한 장마가 없이 지나는 6월 7월을 보내면 늦은 가을장마가 왔었다.
서울에서도 두번의 수해를 겪었고 트라우마로 남아 한강변을 차로 다닐때마다 한강다리위로 바짝 올라온 강물을 볼때마다 무서운 상상을 하곤 한다.
강변북로의 갓길에는 홍수경보가 올라오면 보트니 조립식컨테이너 건물들을 끌어 올려 놓아 길이 막히기도 한다. 강변북로를 지나다 보면서 저 한강물이 도로를 넘치면 어디까지 올라올가 상상을 하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곤 했다.
배수펌프장이 생기고 나서는 강물이 넘치거나 역류를 하지 않았지만 일부지역들은 강하고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수해가 나곤한다.
강남도로가 침수되거나 크고작은 지하도들이 침수가 되는 것을 보면서 대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많이 짓고 사람들이 모여살아서 홍수방지 공사가 가능하기나 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기후이상에 대해 말하여왔던 것들이 이제는 실감을 하게 된다. 더 이상 한반도는 온대지역도 아니고 아열대기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제주도에 바나나가 난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한것이 한참 전인데 이제는 하우스지만 서울에서 바나나를 재배한다는 뉴스를 보고 이제는 더 이상기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구나 실감이 되었다.
사계절이 변하고 바뀌는 것이 이상하지 않듯 기후라는 것은 조금씩 천천히 변하고 바뀌어 가고 있다.
어린 시절에 열대지방 걸쳐있는 사람들은 왜 이리 수해가 많이나고 정비를 못하나 한심하게 보았지만 실제로 사람이 자연을 극복하는 일은 아직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뉴스 속에 나온 충청지방과 남쪽지방들의 수해를 보니 지난 기억들이 상기되었다.
지방의 농촌에는 더이상 젊은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 인구는 점점 고령화되고 기본 인프라도 토목이나 도로나 새롭게 돈을 들이는 일도 재정에 벅찬 일이 되어버렸다.
임시 피난처로 옮겨간 이들의 얼굴은 모두 노인들만 보인다. 비가 그치고 나면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집으로 논으로 밭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그 많은 정비와 청소를 누가 거들고 언제 끝나나 보는 내내 갑갑하고 안타가워 보였다.
서울이나 큰 도시의 수해는 침수가 대부분인지라 실상 흙더미라던지 토사가 내려오거나 쓰레기가 많이 쌓이지는 않겠지만 지방에는 작은 하천들이 넘치고 휩쓸고 내려가고 나니 인력이 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들 뿐이다.
불이 난 후에는 다 타고 나서 재가 되어버리면 차라리 미련이라도 없지만 수해를 맞으면 어디로 떠내려 갔나 행방을 찾게되고 남아서 젖어버린 것들을 어떻게든 되살려볼까 빨고 말리고 건져보려는 생각에 마음이 아득해진다. 실상 별로 건질 것이 없고 버려야 할 것들이지만 내가 가진 것들의 전부는 집안에 남아있는 젖어버린 잔해들이 전부였기에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84년에는 서울에서 큰 홍수가 났었다.
그 시점이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그 시절을 기점으로 유년의 기억들이 모두 사라졌다 홍수에 유년이 떠내려가고 청소년이 되었다.
신촌로타리 밑에 까지 물이 올라오고 한강변의 동네들은 모두 물에 잠겼다. 다 고만 고만하던 단층과 이층집들이 대부분이어서 집들은 거의 지붕까지 잠겼다.
국민학교의 교실에 임시 대피소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피난살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을 했다. 다행히 우리집은 근처 친척집으로 갈 수 있어 하룻밤만 있었지만 그 피난살이에 기억은 생생히 남아있다.
집이 잠겼어도 생소한 장소에 떠밀려 온 아이들은 캠핑이라도 온 듯 들떠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 재밌어 하기도 했다. 일부는 수영이 자신있다고 동네에 한번 내려가보자고 하기도 하고 담장만 잘 붙들고 가면 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부모들은 황망하고 죽상을 하고 울음을 짓는데 아이들은 홍수라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가정의 경제가 얼마나 힘들어지고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일이 자신에게 어떻게 되리라는 생각이 없었다.
비가 그치고 나면서 해가 떠있는데 누런 흙탕물이 동네에 가득 차있는 모습은 너무도 생경하고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서서히 물이 빠지고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세간살이와 짐들을 챙기고 청소를 하러 내려왔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쓸수 없는 것들은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대충이라도 닦아서 다시 사용하려 며칠이고 밤낮으로 씻고 말리고 또 씻고 말리기를 반복했다.
책이니 앨범이니 교과서니 말려도 소용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옷가지들도 조금이라도 물에 닿았던 것들은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여를 사람들은 고생을 하였다.
무심한 계절은 철이 되면 가고 또 와서 가을이 되었고 다시 일상으로 없으면 없는대로 또 살아내기 위하여 사람들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세금을 감면해주고 학비를 면제해주기도 했다. 구호품으로 유명브랜드 의류들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나는 리바이스 티셔츠를 받은 것을 꽤 오래 잘 입고 다녔다.
북한에서도 남한에 구호품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쌀을 보내주었지만 당시의 민심은 북한에서 도움을 받는다는것에 사람들이 자존심을 상해했다. 조금만 먹고 살만하면 정부미도 후진 쌀이라고 일반미를 먹었던 당시의 인심에 북한쌀은 수재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쓸데없는 자존심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쌀이 맛이 없어서 밥을 못 짓겠다고 떡을 뽑아서 나눠 먹는 집도 있었다.
90년에 또 한번의 홍수가 난 이후로는 배수펌프장을 서둘러 여러곳에 설치를 하고 서울에서는 한강 본류가 넘치는 일은 더이상 없게 되었지만 그 대신 작은 하천이나 지류들은 넘치기 시작했다.
4대강이니 뭐니 해서 사람들이 갑론을박이 많지만 시비를 떠나 종합적으로 치수관계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예방하는 일을 정부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매해 반복되는 수해 속에서도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정작 비가 그친 뒤 남는 건 물이 아니라, 복구를 둘러싼 갈등과 혼란, 그리고 정치의 무력함이다.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이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인간과 제도의 문제다. 위기는 갑자기 닥치지만, 그 피해의 크기는 평소 얼마나 준비하고 있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홍수는 단지 물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균열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정작 비가 그치고 난 뒤의 문제는 물이 아니라, 그것을 수습하는 인간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재난은 예측할 수 없지만, 정치의 무능과 무관심은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두렵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위기를 막을 수는 없어도, 그 피해를 줄이는 일은 결국 제도의 몫이다.
한강벨트에 비싼 아파트들이 줄지어있는데 혹시나 멀지 않은 미래에 해수면이 오르거나 국지성 호루가 떄마다 쏟아 붇는다면 서울이라고 다 멀쩡하지는 않을텐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풍수에서 물길은 돈으로 보기도 하는데 물이 너무 많이 흐르면 홍수가 난다.
돈이라는 유동성도 우리 그릇에 다 담기지 못할 만큼 늘어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이리저리 꾸어온 남의 돈이라면 어찌 화가 되지 않을까싶다
부동산이든 코인이든 주식이든 너무 몰려가고 과잉되는 것을 조금 걱정이된다 새로운 정부가 어찌되었든 무언가 시도를 하는데 주변에서는 토달고 비꼬는이들이 많다.
말들도 홍수가 넘치기 직전인 것 같다. 정치의 무관심이 더 큰 문제이긴 하지만 진언은 없고 가언들과 속임수의 말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장관들 임명에도 말이 많다 개개인의 실체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건전한 비판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들도 보인다. 옆에서 신이난 언론들이나 정치인들은 분란이 재밌기만 한거 같지만 지금 그리 좋은 시절이 아니지 않은가 싶은데말이다
강물이 맑아지려 바뀌는 일은 강물을 다 들어내서 깨긋한 물을 전부 갈아내는 일이 아니다 그런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망상이다. 계속 새롭게 맑은 물을 흘려보내서 희석시키는 일 밖에 답이 없다.
티끌 한점 없는 사람을 찾다가는 시간이 너무 없다. 온갖 사회단체들은 작년 재작년에는 어디 미국이라도 갔다오느라 없던것인지 입꾹하다가 지금 튀어나와서 한마디씩 한다. 세상에 자기 입맛에 맞는 인사를 하라는 것은 무슨 근거인가 진보든 보수든 치우치는 것을 주의해야할 일이다.
중용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공평하다는 것은 그냥 가운데 아무대나 서라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대원칙을 지켜내는 일이다.
기후 위기는 이미 일상이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비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구조를 두려워해야 한다.
물이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은, 망가진 마을과 젖은 세간살이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사회의 허술한 기초일지도 모른다.
과한 것들은 비도 말도 돈도 모두 넘치는 것이 모자란 것보다 좋지 않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