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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싱클레어들

헤르만 헤세, 데미안

by 승환

어린 시절에 제법 독서를 많이 했었다. 비록 청소년용 문고판이라던지 세계문학전집류 등이 많았지만 고전이라던지 유명한 소설들은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무작정 머리에 들어오는지 어떤 감동이 있는지를 떠나 주워 읽었다.

한창 헤르만 헤세가 인기가 있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수레바퀴 밑에서, 싯달타 그리고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의 책을 보고 꽤나 진지하게 감명을 받았던 기억만 있었고 그리고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다. 이제 오십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 기형도문학관 주체의 북톡톡이라는 독서프로그램을 참여하다 보니 다시 데미안 책을 집어 들었다.

내용이나 줄거리를 알고 있는 소설은 재미가 반감되어 읽는 맛이 떨어지지만 새로 개정판이 나온 최근의 번역서는 예전보다 문체라던지 어색함이 없이 술술 잘 읽힌다.


유년의 시작부터 싱클레어가 가지는 동심을 들여다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가정이라는 곳의 안온함과 행복감을 아이는 언제 가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 돈을 뺏는 그로모어에게 끌려다니는 싱클레어의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70년대에 너나없이 못 사는 시절 동네 골목마다 있던 불량배 형들의 모습 실상 그들은 나와 얼마 나이차이가 나지 않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돈을 뺏고 물건을 뺏기는 일이 일상다반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안온하지만 무료한 집안에서부터 대문 밖의 또래들이 있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했다. 세상의 이치라던지 밝음과 어둠이 극명하던 후미진 골목골목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부모들 선생들은 불량한 아이들은 선도나 보살핌보다는 기피하고 멀리해야 하는 악으로 규정하고 선량한 아이들에게 항상 주의를 주었다. 그 많았던 불량배와 거친 아이들은 지금 다 어디 있을까 나름 커서 어른이 되었고 일부는 나락으로 떨어져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주변의 이웃이 되었다. 21세기의 지금은 절대적인 악인과 선인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선과 악 그것을 담아내는 인간은 무엇인지 기준은 무엇인지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있다. 악은 세련되게 포장이 되고 교묘해졌고 선은 도를 넘은 오지랖과 무능으로 뜻이 전도된다. 경도된 사회분위기와 획일화된 교육 나는 없고 우리라는 미명아래 계획되고 재단된 구성원을 만드는 학교라는 공장. 다시금 읽어보니 비슷하게 백 년 전의 독일이나 우리는 비슷하게 닮아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예전 어린 시절의 데미안은 개인의 인식에 대한 사유와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각성의 상징이 너무 강렬해서 아브라삭스로 대변되는 조로아스터교나 불교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을 일으키곤 했다.

한참이 지나 데미안이 쓰인 배경에 대한 것들을 알고 난 후에는 단순 개인적인 성장과 성찰을 이야기한 책이 아니란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헤르만 헤세가 가명의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데미안』이 쓰인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1917~1919)였다. 유럽 전역은 전쟁 패배, 물가 폭등, 극심한 실업, 전통 가치의 붕괴를 동시에 겪고 있었다. 독일은 패전국으로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이며 사회 전반에 불안과 분노, 허무가 팽배했다. 이 공허와 불안을 발판으로 이후 나치즘·파시즘이 성장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낡은 제도와 도덕, 종교가 주지 못하는 새로운 의미를 찾았고, 세상을 보는 눈과 귀가 열리고 깨어나라는 메시지를 건네 것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발전하는 유럽의 열강들은 기존의 종교적 굴레와 관습으로 유지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지만 부를 이루고 경제가 발전하는 것은 균등하게 인류전체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진 않았다. 소비와 생산의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고 그것들은 식민지화된 제삼국가들이었고 서민들이었다. 경제적인 불평등은 늘 전쟁과 갈등을 일으키고 필연적으로 반격을 받게 된다.

그 후로 유렵을 위시한 세계에서는 경제대공황과 2차 대전을 맞이하고 만다.

예언이 될지 악담일지 모르지만 자꾸 기시감이 든다 역사책에서 배운 그 시절의 혼란과 환란이 다시 오는 것은 아닐까. 실체가 없는 재화들에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며 서로 경쟁하듯 쌓아 올린 탑들이 이제는 흔들거린다. 더 이상 높이 쌓을 수도 무너트릴 수 없는 세상의 부라는 것에 몰려가고 있다.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뺏아와야 하는 돈이라는 것의 속성에 사람들은 지금 절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단순히 먹고살고 생활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제 만족하지 않는다.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잔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일신론적인 기독교가 성행하는 한국이지만 우리는 불교나 동양적인 범심론 무신론 다양한 신앙과 사장이 뒤섞여있다. 대부분의 사립학교는 기독교재단이던 중 고등학교에서부터 무던히도 크리천을 배출하려 노력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다. 경쟁과 투쟁 적자생존이란 개념으로 무장되어 학습받고 영향받으며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나를 찾아가는 일은 출가를 하든 세상과 떨어져 나온 일부 종교인들의 이야기처럼 잊히고 선과 악, 시비라는 잣대를 대며 끊임없이 반목하고 증오하고 있다.

진정한 자유나 영혼과 정신의 이상향을 이루어내는 일이 지금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채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우리는 탐닉을 끝없이 하지만 죽음에 이르러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가치든 이념이든 사상이든 사람에게 남겨지고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구나 우리나라에서 경제발전 이후에 사람들이 인문학에 열광하는 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와 벽을 느끼게 되어서일 것이다.

혼돈과 혼조 속의 세상에서 무엇을 자신만의 것을 지키고 또 강요하고 겁박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 그것을 선이라 또 악이라 불리는 것은 편협할 판단이고 우주가 그러하듯 인과론적이고 우연적인 찰나의 현상으로 인식을 하여야 한다.

세상은 점점 양단간의 결정을 강요한다. 어정쩡한 위치는 회색론자의 굴레를 써야 하며 의보다는 이익 나는 일들과 판단이 선이 된다. 누구에게나 모두 통용되는 이념과 사상을 강요한다.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라면 합리적이거나 옳은 일이어도 옹니를 부리고 만다.

우익화 된 사람들 종교에 세뇌되어 편협해지고 극단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그중 특히 젊은이들도 적지 않아서 우리나라에서는 공론화되고 한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우리뿐 아니라 전 지구적이고 보편적인 일이 되고 있다.


지금 현실을 보면 백여 년 전 데미안이 나왔을 때의 그 시기가 오버랩이 된다.

서로서로가 반대편에 서서 비난하고 정의를 따로 외치고 있다.

각각이 꾸는 꿈을 꾸고 이루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알의 껍질로 여기고 깨어내고 부쉬고 나가려 한다.

실상 깨어내고 나간 새로운 세상으로 나와 하늘로 비상하는 꿈을 꾸지만 세상에는 선도 악도 없는 미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데미안은 바로 이 지점 혼돈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태어나는 길을 이야기한다. 싱클레어라는 가상의 인물은 젊은 시절 헤르만헤세였고 젊은이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늦깎이로 점점 어른이 늦어버리는 요즘의 청춘들의 갈등과 방황에 빛을 밝히는 글들이다. 부단히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실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까지 확장하지는 못했다. 소설하나로 종교적이고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이야길 한 것으로 충분하지만 세상의 혼란을 개개인 하나가 전인격체로 수양하고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요원하고 힘든 일이다.

그 다른 해법을 꿈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집단 최면이든 어리석은 광기일지 모르지만 공동체 사회와 사람들이 서로 나아지려는 열망과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라면 수긍이 된다.


"그렇죠 누구나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죠 그러면 길이 쉬워져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자속 되는 꿈은 없어요. 지난 꿈을 밀어내고 새로운 꿈이 나타나죠. 그 어떤 꿈도 꼭 붙잡으려 해서는 안되요."


불온하고 이단적인 금기의 인물 데미안을 꿈꾸는 수많은 싱클레어들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데미안들이 스스로를 구원하여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는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새로운 꿈들이 계속 이어지고 끝이 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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