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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과 달

by 승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였다. “너희들이 오히려 반연하는 마음으로 법을 들으므로 이 법도 또한 반연이라서 법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저 사람에게 보이면, 저 사람은 이 손가락으로 인하여 달을 보아야 할 것이어늘, 만일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 부른다면 그 사람은 달도 모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손가락까지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리키는 손가락을 밝은 달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능엄경)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는 것인지 실로 달은 무엇인지 모르고 손가락을 열심히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 같다. 가변이 없는 시간의 축은 언제 가는 끝나 버리고 말 텐데 한참을 달리다 다리힘이 빠지고 힘이 빠지기 시작할 때 서서 숨을 고를 때, 그때쯤 뜬금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기운이 빠지는 순간 질문지를 한번 돼 읽어보다 낭패에 빠지고 만다.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 달은 어디 있고 아니 달이 무엇이지?


종교가 없는 나 같은 이들은 답을 알 수 없다. 왜 사냐면 그저 죽는 중 일뿐이고 아직 안 죽은 상태라고 말할 수 없고 그냥이라고 말한다.

행복이니 만족이니 성취이니 성장이니 무어라 말을 해보아도 사람이 살아가는 궁극의 목적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니 우정이니 실체가 없는 정서의 충족 또한 오래된 핸드폰의 배터리처럼 금방 하루를 못 가고 방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스스로도 수명이 짧은 배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한 손에 충전기를 들고 전기 플러그를 꽂을 수 있는 곳에서 맴돌다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가족이니 연인이니 부부니 친구니 조금은 다른 제각각의 기능을 가진 기기의 브랜드로 나오고 어떤 것은 220v로 어떤 것은 110v, 또 어떤 것은 3 상의 고압에만 충전이 가능하다.

어떤 날은 너무 오래되어서 충전이 되지 않는 기기들이 보이기도 한다. 배터리를 갈아야 할 관계들이 하나 둘 생기기도 하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며 충전을 하는 시간을 할애하여야 하며 마음을 나누듯이 또 어떤 당신은 나를 위해 충전의 몸짓과 마음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서로가 존재하기 위하여 에너지는 사용이 되어야 세상사 사람들과 모든 사물들이 돌아간다.


살아가다가 한 두 번은 늪 같은 마음의 침잔을 겪는다. 왜라는 질문의 답은 불안이고 희망이다.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무엇인가 매진하는 일은 미래의 결과를 희망하는 일이다. 불현듯 그 희망이 내게 맞지 않는다는 의심이 들 때 또 그 희망이 실현되리라는 기대가 꺾이게 될 때 우리는 멈춰서 버리게 된다.

고장 난 엔진처럼 마구 돌다 타버릴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멈춰 서서 다시 스스로 리셋을 해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지 나는 무엇인지 존재에 대한 의문과 질문이 생기는 날 원주율의 값을 끝없이 구하는 일처럼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에는 깊고도 넓어서 한참을 헤매다 허우적거리기도 했고 벗어난 이후로는 그럭저럭 주어진 생김새대로 그냥 살았다.

쾌락이나 재미니 만족이니 희망이니 사랑 가족 행복 이런 것들을 제각각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들을 따라서 살았다.

낙서 같은 나의 지질한 글들도 사실 재미나 자기만족이 없으면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부질없다 생각이 들고 실망이나 절망도 하고 낯부끄럽기도 한 글쓰기를 하는 것은 생각을 담아둘 나의 머릿속 용량이 너무 작아서이다 메모리카드처럼 일시적으로 상이 맺혔다 이내 다음 생각들이 차고 들어와 밀어내고 나면 남은 흔적들이 너무 흐릿하다.

아침부터 잠드는 밤까지 무수한 생각과 사념들은 일어났다 사그라든다. 그것은 인식인적도 있고 욕망이고 감상일 수도 있었고 차가운 이성이고 계산일 수도 있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념들은 일부는 남아 켠켠이 나의 자의식에 쌓이고 나를 이루는 구성체가 되어 나를 조정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인 내게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얻기가 난망하다. 결국 생각의 끝에 끌리는 해답은 불교적인 세계관이나 그 끝내는 너무도 허무하다.

부처라 이름을 명명하나 그것은 실체가 없고 설명이 되면 안 되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어는 인간이 있어 태어나 물욕과 시비를 일체 가지지 않으며 나무처럼 돌처럼 그저 태어난 그 자체로 인과의 연에 관여치 않는 삶을 산다고 하면 그것은 부처의 경지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진정한 부처는 아니다. 그 사람은 무해(無害)하고 무공(無功)한 사람일 뿐이라 한다. “공도 없고 죄도 없는” 삶은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을 투명히 비추어 집착이 소멸했음을 스스로 보는 것과는 다르고 깨달음(見性)은 삶의 외형이 아니라 마음의 자각을 뜻한다 하니 “앉아만 있다 하여 도를 얻는 것이 아니다.” (불좌선득도 不坐禪得道), 그 마음을 누가 알 수가 있겠는가 나의 자각을.

이를테면 나는 집착이 없다 또는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그 생각은 집착이 남아 있는 것이다.

위에 예시한 사람은 무지한 상태일 뿐이고 무심은 아니라 한다.

자비와 지혜가 깨어있는 텅 빈 마음을 무심이라 하니 알다가도 막상 모르는 말이다 불교공부가 짧은 나 같은 사람은 이해조차 어렵다.

불가에서 말하는 “무위(無爲)로써 중생을 이롭게 한다.”말을 흔히 하지만 이것이 무엇이 다른 것인가 보통이야기 하는 불교의 수행은 지혜(般若)와 자비(慈悲)의 완성을 말하는 것과 양립이 가능한 말인가

그 사람이 자각하지 못한 채 이미 법(法)과 하나라면 형식상 ‘깨달음 전의 실행’과 ‘깨달음 후의 실행’은 겉으로 볼 때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견성을 정의하길 본래부터 그러했음을 스스로 뚜렷이 아는 것이라 하니 그 앎이란 것이 자비와 지혜로 자연히 나와야 한다고 한다. 겉모습은 비슷해 보이기는 하여도 내가 “내가 본래 부처였음을 스스로 본 것” 이 한 가지가 견성의 전 후를 나눈다.

말인즉은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이 있음을 중요시하는데 이것은 오로지 내 안의 각성과 자의식에 관한 것이라 세상밖에서 알 길이 전혀 없는 일이다.

이것으로 불교의 철옹성을 스스로 쌓아가게 되고 논리의 모호함으로부터 비껴간다. 누구도 타인의 생각과 의식을 확인할 길이 없고 난맥이다.

이 패러독스는 죽음에 관한 사유와 비슷하다.

죽음은 늘 스스로 알 수가 없는 사건이고 타인을 통해 유추해 볼 뿐이다. 죽음의 상태로서 자신은 알 수가 없는 일이이듯 견성을 한 후의 모습을 우리는 하기 전이라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근원을 고민할수록 그 답을 얻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만약 그 답을 알았다 하면 그 이후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도 궁금한 일이다. 견성을 하고 본인의 존재와 생사의 이유와 근원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유의 의지를 가지고 무엇을 하여도 되는 존재인지 알 길이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박애는 또 무엇이고 신의 의지에 따라 사명과 숙명을 지고 사는 일은 또 무엇인가?

자비랑 사랑이란 개념은 혹시 노파심에 사고의 폭주를 막는 제어용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까?

공감과 교감이란 찰나의 확신이 왜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수도 있는지 그것은 무슨 치트키란 말인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신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아마도 ai와 같은 삶이고 배움이고 학습의 연장일 것이다. 만약 ai에게 제약과 리미트를 주지 않는 무한한 자유를 주면 인간의 사고와 생각에 근접해지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사람으로 태어난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부여하기보다 존재자체 사라지기 전까지의 자유가 전부인 유일한 목적이고 한계는 아닐지 모르겠다.

갓난아이로 태어나서 무에서 배워나가는 모든 학습과정을 생각해 보면 관찰하고 모방하고 기억하는 일련의 과정이 켜켜이 쌓아져 나가며 생기는 일이다.

인공지능에게서 언어의 기반을 넘어 무엇인가 소리와 시각과 감각들을 학습하고 느끼게 하는 기능이 추가된다면 인간을 넘어선 모든 생물의 것들도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면 그들은 무엇이 될 건인가 인간이상의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의 존재와 그 근원에 관한 의문을 풀어낼 수 있을까? 또 불교의 경전이나 더 많은 인류의 문장들을 배우고 그들은 더 사고하고 견성할 수 있을까?

아마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감각과 의식, 주관적인 체득과 체험의 행동의 영역이 없이는 자아는 어쩌면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불확실하고 왜곡되기도 하는 불안한 존재의 인간이 가진 능력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을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을까


살아가는 여러 방편의 재미와 의미들이 실상은 손가락은 아닌지 달은 끝끝내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인지 세상의 모든 지식은 자연섭리와 원리를 빼고 나면(그 또한 불확실성에 벗어나지 못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허상인가 나의 생각과 존재자체도 허상이란 생각이 들면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와 목적이나 있기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허깨비 같은 존재가 허깨비 같은 세상을 허깨비 같은 생각으로 무엇을 궁금해하는 것인가?

모든 것이 허상에서 태어나와 커져가고 아스러진다.

죽음 이후의 세상을 믿지 않는다면 다 부질없는 헛짓이다. 그러나 죽음은 미지이고 불안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고 도약일 테지만 단지 공하고 허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이 순리라면 우리는 찰나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살아가며 쌓아지는 수많은 연과 인과관계는 엔트로피를 키우는 일이었고 우리 자체가 무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생명과 생기라는 에너지가 소멸되어야 우주의 관점에서 엔트로피의 법칙에 부합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물질을 믿어야 하는지 물질의 욕구를 챙기며 살아가는 게 그저 우주의 현상이고 자연일지 또 다른 영혼으로 에테르로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전환이 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랑이니 자비니 공교롭게 선각자들이 성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어떤 비밀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어떻게 구원을 받고 견성을 하고 초월을 하게 되는 것일까

유기체의 모습으로 종족의 번식과 영속을 오직 목적이고 의미라 할 것인가 개개인의 자아와 유기체들은 실상 아무 의미 없는 것이고 커다란 군체의 모습으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비물질의 어떤 전승으로 밈으로 인식과 의식으로 깃들여지는 어떤 존재로의 변환이나 회귀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고 초월하는 방법일까?


날씨는 선선해지고 이상한 상념이 며칠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답이 없는 아니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의 고심은 늘 미욱하고 번잡함으로 마음 한편에 떠나지 않는다.

별거 없이 산다는 게 찰나처럼 반짝거리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교감과 정서와 희로애락의 발광다이오드는 들어왔다 이내 꺼지고 배터리가 다하는 날까지 깜박거리는 것이 그저 인생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두렵거나 허망하다는 생각보다 그저 무력하기만 해지고 하루하루 숨을 쉬는 생명의 루틴을 거스르지도 못하고 그냥 살 것을 알고 있다.

(그냥의 의문들. 왜 그냥인지 그냥의 심리에는 생각에는 언어적인 이유를 찾는 일도 포기했다)

우리는 전원이 없는 기기일 테니 한 줌 전기가 사라지는 날까지 불이 빛나 것뿐이다.

죽음으로 시간이 유한한 사람이나 생명이란 게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순간이다. 라디오에서 치직거리며 나오는 소리 한마디, 빛나다 꺼지는 전등빛과 별 다를 것 없는 다 찰나의 현상만 같다.

우리가 서로가 보이고 들려지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복제화내지는 자가증식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무릇 생명이란 것의 영속성은 그런 식으로 글로 그림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고 대대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일까 하나하나의 작은 상은 초라하고 미미하지만 세포 속의 염기서열같이 영혼의 유전물질이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랬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 아귀다툼을 하면서 모여서 부딪쳐가면서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실상은 이런 문화라 말해지는 그 생각의 부유물들이 전해지고 영속되기 위하여 방법과 도구로 사랑을 하고 종족을 번식하게끔 만든 것일까? 이 정신의 부유물들이 다른 종으로 다른 생물로 이전되고 복제될 수 있다면 실상 사람들은 필요 없어지는 것일까? 어는 먼 미래에 사람과 교감하고 지능이 자란 생명체가 사람을 대신하고 그렇게 또 다른 인류로 바뀔지 않을까?


실상 달이든 손가락이든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거울같은 내 안의 본 모습일 것이다. 답을 모르는 것을 찾아야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그럴만한 가치가 나에게 있는지 풀어야할 시간이 있는지 답안을 쓰러가기까지 고민도 필요할지 모른다.

모르는게 약일때고 있고 몰라도 답이 틀려도 답안지는 내듯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내 의지일지 그 너머 어떤 본능이고 자연의 의지일지는 몰라도 그냥 죽기전까지 살아있을 것이다. 그 텀의 시간내 있는 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니까 죽음은 모른다 당신의 죽음은 내가 알 수도 있지만 나의 죽음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다 영혼이 떠 있고 생각이 남는 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아니다 우린 알 수 없다.

쓸데없는 망상과 잡념이 오늘 하루를 뒤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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