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쯤 기억들...

셔터를 올리며-봉달호 를 읽다가...

by 승환


누구나 저마다의 서터를 올리면서 오늘을 산다.

누구에게나 저마다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채워야 할 빈칸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믐의 독서모임을 참여 중입니다.

책의 프롤로그에 나와있는 글귀 중에 인상 깊은 글입니다.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비슷한 연배이기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가게라는 곳이 사실 우리의 부모님들 대분분은 무슨 가게네 무슨 가게집 아들 그리 불렸고 부모님은 다들 사장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우리들이 먹고살고 키워주었던 직업들이 대부분 자영업이었지요. 지금도 다른 나라보다 자영업 비율이 크다고 하지만 경기가 많이 어려운 시절인 것 같습니다.


글도 재미있게 잘 쓰시고 50 전후 분들에게 추천할만한 어릴 때 추억이 새록새록 나는 글입니다.


저도 오늘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집니다.

서울 토박이지만 그 시절은 도시 변두리나 시골이라고 지방하고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아이들이 노는 것 이라곤 서울아이들은 딱지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국기 게양식 하강식에는 꼼짝 마라 하고 가슴에 손을 올리고 경례를 해야 올바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놀이에서도 보이곤 했는데 손으로 접는 네모난 딱지가 아닌 동그란 문방구에서 파는 딱지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남자 50대 전후 분들은 기억하실 듯합니다 이걸 승부를 걸어서 구슬 따먹기처럼 따먹는 놀이입니다. 손으로 손뼉을 쳐서 넘겨 따먹기도 하고 양손에 쥐고 하나를 골라 배팅을 해서 승부를 가르기도 합니다.

접는다고 하는 딱지를 쥔 아이가 글높 글낮 또는 딱지 테두리에 그려진 별을 셈하는 별놈 별낮 콜을 해서 승부를 가립니다.

딱지 안에는 글씨와 만화와 별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샌가 전쟁높 전쟁낮이라는 배팅이 생깁니다. 아이보다 어른이, 사람 수가 많은지, 총, 칼, 탱크, 전투기까지 나오더니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커져갑니다. 불이 있고 물이 있고 빛이 나옵니다. 빛이 제일 강한 걸로 나오게 되니 전구도 빛이요 달빛 햇빛이 서로 같냐 마냐 싸움도 납니다.

그러다 끝판왕이 나옵니다. 국기, 태극기가 나오면 가장 센게 됩니다.

군인이 대통령인 나라에서 애국이라는 국가적 모토를 아이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최고의 가치로 인정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구슬치기 다마치기라는 놀이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구슬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따먹기도 하고 눈깔치기라고 하는 놀이와 봄들기라는 놀이도 많이 했습니다. 당시엔 포장이 안된 공터가 동네마다 몇 군데씩 있었습니다. 발꿈치를 땅에 대고 돌려서 구멍을 파고 그 구멍에 구슬을 넣어서 한 바퀴 먼저 돌아오는 게임입니다. 바닥에 구멍을 내어놓으면 당연 어른들은 혼찌검을 냅니다. 그래도 심하지 않던 게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라는 게 별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고학년이 되면서 경제가 커져가며 놀이도 같이 변해갔습니다. 부루마블을 비롯한 아류의 억만장자게임이라던지 결정적으로는 오락실의 출현입니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어린이 회원이 되고 싶어 엄마를 조르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야구가 유행이 됩니다. 그러나 배드와 글러브를 사고 야구를 할 만큼의 너른 공간이 서울, 변두리에서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식야구공은 구경도 못하고 연식공 정식공이라는 고무재질의 공을 사용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들은 대신 찐부, 짬뽕이라는 손야 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고 공구가 필요 없어서 제법 유행합니다. 여기에는 탄력 있는 고무공을 사용합니다.

동네 집집마다 공이 넘어가서 꺼내달라고 초인종을 누르는 아이들이 성가셔서 딴 데 가서 놀라고 혼을 내키곤 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굴하지 않았고 집집마다 지붕에는 파랗고 빨간 공들이 몇 개씩 열매처럼 달려 있었습니다.

제가 79년에 학교를 들어갔었는데 한 두 살 일찍 입학을 한 친구도 있었던 기억이 있네요 반대로 구화학교를 거쳐 늦은 나이로 입학한 동기들도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을 놀릴 수는 없었어요 형아뻘 누나뻘이라 힘이 모자라서 그랬다간 한 대 얻어 맞아도 하소연도 못했습니다.


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기억들은 공통된 감성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고만고만하게 못 사는 평균의 사회였기 때문에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던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고 정서와 문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집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에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재화였고 부의 척도는 집으로 나뉘었습니다.

부자라는 말보다 부잣집, 부자아들이 아닌 부잣집 아들 이층 집은 손꼽을 정도로 적었고 마당은 다 조금마해서 개집을 하나 들여놓으면 더 공간이 없는 그런 집들 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은 아파트나 상가의 3층 4층 건물이었습니다.

아파트라고 해서 더 좋아 보이지는 않고 좁고 후락했지만 맨션이라 부르고 부자들만 사는 집으로 알았습니다. 와우산 위에 시범아파트를 가보고 기대했다가 놀란 기억도 있습니다.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고 아파트인데 연탄을 피웠습니다.

상가의 옥상은 주인이 방심을 한 틈을 타 아이들은 몰래 숨죽이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기어코 등반을 했습니다. 3층 높이만 되어도 동네에서 가장 좋은 뷰를 보여주는 그 구경이 주인아저씨의 불호령을 이겨낼 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새집을 이사 간다는 것은 부러움과 선망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없는, 또는 우리 집만 없는 결핍은 어른들보다도 아이들은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친구집에 가서 놀랍고 부럽게 느껴졌던 감정은 누구나 있었을 것입니다.

내게도 초등학교 여급우의 생일초대를 가서 본집은 충격이었다. 아마도 서교동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른 잔디밭에 아이들이 세 팀을 일렬로 배드민턴을 칠 수 있는 크기에 압도 당하고 지하층에는 일하는 분들이 방이 있었는데 우리 집보다 좋아 보였습니다.

바이올린을 들고 와서 학교 학예회 때 연주를 하는 그 아이에게 무언가 말할 수 없는 벽을 느꼈습니다. 빈부의 차이가 내가 차마 넘어설 수 없는 그런 벽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초인종이 있어도 대부분 집이 작아서 창가 쪽이 방인 친구들을 골목에서 크게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딸랑이는 두부 파는 아저씨 소리, 구르마에 과일 파는 아저씨 소리(나보다 조금 작은 사과여~~, 개구쟁이 선물이여~~), 겨울철 메밀묵 찹쌀떡 팔던 소리, 옆집 아이 매 맞는 소리, 싸우는 소리, 민방공 훈련한다고 사이렌 울리던 소리, 부우웅 거리며 달리던 연막차 소리, 굉굉거리던 공업사 쇳소리, 새벽에 시동을 걸던 버스의 차소리, 아이들 뛰어다니던 소리, 집에 들어서면 퀴퀴하지만 구수한 밥냄새 저녁냄새, 어린 동생이 있는 친구집에 가면 비릿한 아기냄새, 땀띠에 바르던 아기분 냄새, 엄마 화장품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맡았던 분냄세, 한강가까이 가면 오물과 역한 냄새, 연탄을 갈며 나는 매캐한 냄새, 구운 김 냄세, 시장길에 기름에 쩌든 영양통닭 냄새, 실비집 돼지갈비 냄새...


옛이야기들은 하다 보면 왜 자꾸 더 할 이야기들이 생겨날까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개어진 추억들이 셀 수없이 많을 듯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추억 들고 하나씩 꺼내 들추는 일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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