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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Dec 25. 2021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사람'

1.

  과거 글에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나는 초등학생-중학생 때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학교에서 역사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할머니가 겪어온 역사에 좀 많이 놀랐다. 10대 때 한국전쟁을 겪은 삶, 20대 때 이승만 정부를 겪은 삶, 30대 때 박정희 정부를 겪은 삶, 50대 때 전두환 정부를 겪고, 이후 IMF를 겪고... 무언가 할머니를 비롯한 어르신들이 현대사의 산 증인처럼 보였다. 주민등록 기준 32년에 태어나신 할머니에게 95년에 태어난 나는 애송이처럼 보일 것 같았다. 95년에 태어난 내가 2058년에 태어난 손주(?)를 본다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너무 머나먼 이야기 같다.


  아무것도 모르던 10대 시절, 나는 무언가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가 이룩한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사람, 한국 발전에 이바지 하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다. 또한 고등학생 때 사회탐구 과목들 중에서도 정치, 법, 사회문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정치외교학을 전공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수시 정시 모두 정치외교학을 지원했다. 그렇게 현재 국제관계학(국제정치) 전공하고, 경제학을 복수전공 하게 되었다.



2.

  전공 공부를 하면서, 문득 내가 '한국 발전에 이바지한다'라는 생각이 상당히 경제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한국이 고발전국인데 여기서 내가 어떻게 더 발전시키겠다는지 살짝 의아하게 다가왔다. 또한 굳이 경제가 아니더라도 인권운동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을 증진시켜나가는 것도 그렇고, 봉사활동 및 복지활동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 속 이웃들을 위해 일하는 것 모두 '한국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어렸을 때 나도 모르게 가지게 되었던 좁았던 시각을 전공공부 및 대외활동들을 통해 천천히 넓혀나가게 되었다.



3.

  2015년에 입학한 뒤 그동안 행복하게 다녔던 학교를 이제 마무리하게 되었다. 매학기마다 전공공부를 하며 모르는 것을 알아가고, 뇌 속에 새로운 지평선이 열리는 과정들이 너무 신기하고 즐거웠다. 대외활동들을 하며 내가 모르던 집단의 사람들과 함께 활동해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하며 내가 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항상 깨닫곤 했다.


  이런 과정을 겪고 대학생활을 마무리하고 곧 졸업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한국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사람'이 다름 아니라 '우리 모두'임을 깨달았다.


  거창해보이는 재벌 경영인, 대통령, 국회의원들, 그리고 그들 옆에서 일하는 임원들, 참모들, 비서들, 보좌진들만이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 내는 노동운동가,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 내는 인권운동가,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 내는 인권운동가 등 사회운동가들만이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난 대기업에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들, 공기업-공무원에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들,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등 전문직으로서 일하는 사람들 등 전문노동가들만이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쾌적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하는 청소노동자 분들, 음식점과 소비자를 이으며 누군가의 끼니를 책임지고 있는 배달노동자 분들, 누군가가 미래에 살 집을 짓는 건설노동자 분들, 누군가의 영양분 섭취를 책임지고 있는 농부 분들 등 그들은 부정할지 몰라도, 힘든 직종에서 일하시는 분들 또한 모두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이 과정 속 초국가적 활동들도 목도할 수 있다. 한국에서 내국인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궂은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또한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국내의 생산된 재화 및 서비스가 해외에서도 소비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모두는 '세계에 기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한국 발전'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걸 졸업할 쯤이 되어야 깨닫게 되었다. 늦게라도 깨닫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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