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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Feb 19. 2022

"주다(give)"는 강력한 권력 용어였다

  최근 들어서 "주다"라는 언어가 굉장히 강력한 권력의 언어임을 깨달았다. 깨닫게 된 계기는 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보고나서였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중략)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만이 뭔가를 주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위 구절을 읽고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주다"는 굉장히 강력한 언어였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 단체들에 '기부'하는 행동이나 어려운 친구에게 돈을 '주는 행위' 모두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상대방보다 권력이 더 많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또한 아무리 부자여도 기부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권력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었다. 즉, 권력이 사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있어보이는 것이었을 뿐이다.


  정서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용서하다(forgive)"라는 동사는 대인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범죄를 저질렀든, 욕을 했든 무엇이든 인지상정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용서해주다"라는 동사를 실천하는 경우, 이는 상대방보다 더 마음이 넓고,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으며, 올곧게 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행위였다.


  "봐주다"라는 동사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실수해서 그냥 봐주는 경우 또한, 더 여유로운 사람이 실천하는 하나의 권력행위였다.


  "사랑을 주다" 또한 상당히 강력한 권력행위였다. 부모님-자녀 관계이든, 연인 관계이든, 서로 혹은 일방향으로 '사랑을 주는' 행위는 권력행위였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며, 정서적으로 채우는 것은 정서적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정서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전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경우,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이 상대방보다 낮을 수 있다.


  "주다"라는 단어를 고찰하면 할수록 상당히 신기했다. 사실 대체로 사회구성원들은 다들 '주는 행위'보다는 '받는 행위'를 원해한다고 생각한다. 선물이든 월급이든 사랑이든 내가 주는 것보다는 받는 행위를 원해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권력은 정반대였다. 주는 자만이 권력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주지 않는 자는 권력이 없는 것이고 받는 사람은 상대방보다 권력이 적은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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