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학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동안 나는 주변 친구들과 언어소통이 정말 힘들었다. 나는 서유럽, 중부유럽, 북유럽 등 유럽에서 온 친구들의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럽 친구들은 영국 억양으로 영어를 배웠고, 자기 나라 알파벳 억양과 섞인 발음을 했다. 한반도에서 일평생 미국 영어만 공부한 나는.. 정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동시에 같은 학교로 파견 온 한국인 친구는 없었다. 중국인 친구들과 미국인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놀았다. 나는 깍두기가 되었다.
하지만 인연이 닿아 한 중국인 친구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중국인 친구는 신기하게도 미국 억양과 영국 억양을 섞은 영어를 하고 있었다. 홍콩의 영향인가 생각들었다. 아무튼 중국인 친구와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곳곳을 돌아다녔다. 중국인 친구와 함께 중국 식당도 가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내 중국인 네트워크에 놀러가보기도 했다. 같이 부엌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도 했다. 중국인 친구와 이야기나누며 되게 느끼는 점들이 많았다. 같이 이야기나누며 느낀 점들, 경험한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중국인 네트워크가 정말 잘 되어있었다.
중국인 친구와 같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자주 산책하곤 했다. 친구는 '이쪽으로 와봐'라며 중국인이 운영하시는 식료품점을 소개해주었다. 되게 신기했다. 사장님께서는 영어도, 러시아어도 하지 못하셨고, 중국어만 하셨다. 자주 지나가는 길 바로 옆에 중국인들만 사고 파는 식료품점이 있다니 신기했다. 그리고 그 식료품점에 농심 신라면과 불닭볶음면이 있어서 그 또한 너무 신기했다. 친구 말로는, 중국인들도 신라면과 불닭볶음면 등 한국 음식들을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당시는 2020년 1학기였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마스크 대란이 벌어지던 시점이었다. 러시아 사람들과 유럽 친구들은 마스크를 구하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중국인 친구들은 다들 마스크를 갖고 있었다. 중국인 친구에게 궁금해서 물어보니, 이렇게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에 모두 마스크를 판다고 말해주었다. 한국인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한국 총영사관에서 직접 마스크를 공동구매하여 한국 학생들 및 교민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중국 정부 및 중국인 네트워크는 한발 앞서나갔던 것으로 보였다. 유럽 친구들은 하나같이 마스크를 구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는데, 이 마스크 양극화가 상당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당시 러시아는 코로나가 심각하지 않았다.)
2. 중국인은 정말 어느 곳에나 많았다. (1)
중국인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중국 정부는 귀국 비행기들을 보내는 지 궁금했다. 당시 이탈리아 코로나 상황이 너무 심각해져서 한국 정부에서는 교민들을 위해 귀국 항공편들을 보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영어로 검색해보니 중국 정부는 귀국 비행기들을 보내지 않는 것 같았다. 궁금해서 중국인 친구에 물어보니, "그냥 다들 알아서 하지 않을까?"라고 말해주었다. 나로서는 이 반응이 되게 의아했다. '보통 정부가 구하러 오지 않나?'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물어보았다. "왜? 중국 사람들도 중국으로 돌아가는게 낫지 않아?"라며 재차 물어보았다. 중국 친구는 나의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해하며, "이탈리아에 중국인 100만명은 살껄? 귀국 비행기 그 인구를 다 어떻게 태워..."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충격받았다. 아 중국인이 어디나 많지.. 생각했다. 궁금해서 구글에 영어로 이탈리아 거주 중국인 인구를 검색해보았다. 공식 통계는 모르겠으나, 비공식적으로 대략 20만 명의 중국인이 이탈리아에 거주한다고 써있었다. 소름돋았다. 400명 정원 비행기가 500대 필요했다.
중국인 친구의 말을 들으니, 무언가 한국인 한 명 한 명이 갑자기 모두 소중하게 느껴졌다. 뉴스 속에 나오는 연예인들, 욕먹는 정치인들, 심지어 일탈 청소년들까지 모두 갑자기 소중하게 느껴졌다. 20만 명이면 우리나라 도시 하나인데, 그 규모의 중국인 인구가 어느 나라의 교민으로 살고 있다니... 정말 새로웠다.
3. 중국인은 정말 어느 곳에나 많았다. (2)
중국인 친구와 같이 '러시아 외교정책(Russian Foreign Policy)' 수업을 들을 때였다. 당시 주제는 '러시아와 중국 외교 관계(Russia-China Relationship)'이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쪽 영토와 중국과의 접경지대 이야기가 나왔다. 교수님께서 웃으면서 설명하시길, "2005년 러시아 라디오에서 외교관 드미트리(Dmitry Rogozin)는 중국인들이 "5백만명씩 작은 규모로" 접경지대를 건너오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나와 중국인 친구는 같이 웃었다. 중국인 친구에게 진짜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중국 전체적으로 볼 때 5백만명이 그렇게 큰 규모도 아니라서 5백만명씩 건너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정말 인구의 힘을 느꼈다.
지금보니 교수님 수업자료 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영어로 적혀있었다 : As Dmitry Rogozin, then Russia's ambassador to NATO, quipped on Russian radio in 2005, the Chinese are crossing the border "in small groups of five million."
4. 중국인 친구들은 자존감이 되게 높아보였다.
나와 친하게 지낸 중국인 친구 말고도 다른 중국인 친구들은 자존감이 정말 높아보였다. 자신의 외모, 키, 국적 등 다양한 서열적 지위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자만심이 있어보인다면 있어보였지, 열등감 같은 것은 별로 느껴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궁금해서 중문과 전공하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친구는 "걔네 중화사상 덕분에 그래"라고 말해주었다. 신기했다. 사람들은 중국인 분들께서 중화사상에 물들어 자문화 중심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존감 측면에서 보았을 때 중화사상은 개인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있었다. 물론 타인의 눈앞에서 자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중화사상이든 다른 관념/지위이든 부적절한 것이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 개인의 자존감 측면에서 본다면 상당히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솔직히, 나는 중국인 친구들의 그 자존감이 부러웠다. 나는 한국의 교육제도에 길러졌지만,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학생들에게 열등감만 주입하고, 자존감은 주입하지 않는 제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의 1등급, 그놈의 경쟁, 그놈의 SKY, 그놈의 수능, 그놈의 내신... 비록 이런 교육제도 덕분에 SKY캐슬이라는 좋은 드라마도 만들어졌겠지만, 서열적인 제도에서 나는 항상 열등감을 부여받았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도 대외활동 하다가 새롭게 SKY 학생들을 보면 종종 열등감을 느낀다. 비록 나는 오랫동안 함께 한 SKY 친구들이 몇 명 있고 이제 더 이상 그 친구들에게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SKY 사람들을 대외활동에서 만나게 되면, 내가 재수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지 못한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위압감을 느끼곤 한다. 내가 이런 열등감과 우월감 속에 있는 가운데, 중국인 친구들은 중화사상으로 무장하여 자존감이 높은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모습이 솔직히 좀 부러웠다.
5. 내 중국인 친구는 민주주의를 궁금해했다.
중국인들은 중국에서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외국 SNS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하더라도 VPN으로 돌려서 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 중국인 친구는 러시아에 와서 대만 영상들을 보며 신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도 상당히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중국인 친구가 한국 정치 관련해서 영상을 보았다고 말해주었다. 친구가 본 영상을 보니까 당시 2019년 나경원 원내대표가 선거법 개정안 등 몇몇 이슈로 인해 국회에서 엄청난 원외 투쟁을 하고 있는 내용에다가 몇몇 국회의원들을 의원실에 감금시킨 영상들이었다.
중국인 친구는 나에게 "원래 민주주의는 소란스러운거니?"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개빵터지며 솔직히 쪽팔렸다. 나경원 대표가 유난떤 것이긴 한데.. 나는 중국인 친구에게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해주었다. 싸우고, 토론하고,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해주었다. 중국인 친구는 신기한 듯 보였다.
중국인 친구는 민주주의가 정말 흥미로웠던지, 스스로 공부를 쭉 하고 나서 나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당시 미국 민주당 대표였던 낸시 펠로시(Nancy Pelosi)를 언급하며,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맞어? 기업들을 위한 국가 아니야? 민주주의 몇몇 부분들은 뭔가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해"라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개빵터졌다. 중국인 친구는 민주주의를 접하고 공부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주의의 부정적인 측면까지 벌써 학습한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선거제도, 정당제도, 시민사회운동 등을 이야기해주며 풀뿌리 민주주의, 시민들 즉 우리가 스스로 직접 바꾸어나갈 수 있는 정치환경 등을 설명해주며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아주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는 것 같다는 나의 견해를 전달해주었다. 중국인 친구는 신기해했다.
6. 중국인 친구와 나의 교차점
- 나는 중국인 친구와 영어로 대화하면서, 무언가 신기했다. 한국과 중국이 과거 수천년의 역사를 함께했으나, 현재 의사소통은 영어로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비록 한국과 중국이 수천년의 역사를 함께했지만, 앵글로 색슨 족의 언어로 소통하다니 흥미롭지 않니?(Although Korea and China were close relationship for a long history, we are communicating with Anglo-Saxon's language. Isn't it interesting?)"라고 말하자, 친구는 개빵터졌다.
- 중국인 친구들과 놀 때, 나의 성은 LEE(李)라고 말해주었다. 친구들은 놀라했다. 친구들은 해당 성은 중국인들도 많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한국인들도 해당 성이 많다고 말해주었다.
- 중국인 친구에게 배울 학, '學'을 써서 보여주었다. 친구는 좀 많이 놀라했다. 전통한자를 어떻게 아냐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도 다 배운다고 말해주었다. 동시에 '한자'가 'Chinese character'로 영어로 번역되는게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우리도 한자 많이 있는데 다 중국어 글자인 것은 아닌데...
갑작스럽게 터진 코로나로 인해 나는 중국인 친구와 같이 많이 놀러나가보지도 못했다. 단지 같이 맥주를 자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교 주변 산책만 자주 했다. 이 점이 다소 아쉬웠다.
한국에서는 중국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좋지 않다. 코로나도 그렇고, 싸드, 조선족 이슈, 미세먼지 등 외교적-문화적 갈등이 상당히 많다. 중국인들은 더럽다는 인식도 많다.
하지만 내가 만난 중국인 친구들은 한없이 좋은 친구들이었다. 시끄럽지도 않고, 남 배려 많이 해주는 친구들이었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항상 도와주던 친구들이었다. 나는 한국 떠나기 전에도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편이었는데, 러시아에서 이 경험을 겪고 나니 오히려 중국인 분들에게 더 개방적인 사람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혹여나 무례한 사람들을 많이 마주한다고 한들, 중국인 인구가 13억이니 민폐끼치는 사람들 수도 한국보다 26배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부를 보고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