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멧돼지를 보았다
때는 바야흐로 2주 가량 전의 일이다.
요즘 등산모임에도 가입했고, 등산에 맛들려서 모임 형들과 함께 이곳저곳 산에 가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가 모임에서 야간등산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나는 그날 약속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다음 날 저녁에 북한산 낮은 봉우리 쪽이라도 초행길이지만 가보고자 발걸음을 향했다.
북한산 구기터널 등산로 입구에서 7시 20분쯤에 시작해서 향로봉 오거리 방향 쪽으로 가고 있었다. 원래 북한산에 어르신들 밤낮으로 다니시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여기 코스에는 사람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절에 있는 개들이 내 발걸음을 듣고 짖을 뿐이었다.
네이버지도를 보면서 등산하고... 길을 헤매다가 높이 200m쯤 도달했을 때 풀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났다. 길이 좁아지고 더 어두워지길레 무서웠지만 그런갑다 하고 더 들어가려는 찰나..
멀리서 풀 소리가 났다. 뭐지 모르겠다 싶다가 더 앞으로 걷가다, 갑자기 2m 앞 근방에서 다마스만한 형체의 동물이 점프하며 지나갔다. 다마스는 내 발걸음이 탐탁지 않다는 듯이 '쿠르릉' 소리를 냈고, 일반 사람들/강아지들이 이목구비를 통해 소리를 내는 것과 다르게 다마스가 낸 쿠르릉 소리는 온몸을 울리며 내는 소리 같았다. 다마스 뒤로는 아동용 미니자전거 같은 형체의 (아마도 새끼) 동물이 3마리가 뒤따라 지나갔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머리 뒤에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지난 29년 간의 삶, 불교를 공부했던 기억,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것, 등등 생각나다가 나무를 발견하였다. 다마스와 미니자전거들은 직진만 할 것 같아서 여기서 360도 회전하며 강강술래 하면 승산이 있어보였다.
다행히 다마스와 미니자전거는 내 앞에서 나의 발걸음에 짜증내며 그냥 지나간 거였다. 나는 바로 하산했다. 산도 너무 어둑어둑해졌다. 바로 북한산 자주 가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멧돼지 봤냐 나 봤다 이게 뭔일이냐 대화를 나누었다.
하산 후, 도시 문명을 마주했는데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지금 생과 사를 넘나들었구나... 내가 지금 멧돼지를 봤었고 진짜 죽을 뻔 했을 수도 있겠구나... 와 도시가 왜이리 아름답지... 집 와서 씻고 누웠는데 이런 일상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거구나... 멧돼지는 나에게 많은것을 가르쳐주었다.
# 로또를 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산책을 할 때 종종 걷던 길에서 갑자기 복권집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종종 걷던 길인데 거기에 복권판매점이 있는 줄 1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강원도에서 아빠와 등산했을 때, 돼지를 본 기억이 있었다. 우연히 강원도 산골 속 절을 지나갔고 돼지를 보았고, 절 관계자 분들이 돼지 볼 일 별로 없는데 복권사라며 덕담을 해주신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아빠와 같이 복권판매점에서 로또를 샀는데, 당시 5만원짜리에 당첨되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멧돼지를 본 것도 그렇고 갑자기 복권판매점이 보이는 것도 그렇고... 이것도 결국 신의 계시이며 부르심이며 로또 사라는 계시인가 싶었다.
그리고 바로 로또를 구매했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 오후 8시 30분, 나는 5천원짜리에 당첨되었다.
# 북한산 등산
그리고 오늘 새벽에 북한산을 다녀왔다. 등산모임에서 북한산에 가기로 했었는데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나혼자 새벽에 다녀오기로 말해놓은 상태였다. 이때는 멧돼지 봤던 코스가 아니지만 멧돼지를 봤었다면 갔을 수 있는 코스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초행길이었다.
오늘 나는 등산길이 워낙 험해서 3번 정도 진짜 죽을 뻔 했다. 90도 경사인 암벽 수준의 등산길도 있었다. 괜히 어르신들이 1명도 없는 게 아니었다. 진짜 위험해서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멧돼지에게 고마웠다. 내가 그날 하산을 안하고 등산을 했으면, 오밤중에 진짜 죽을 뻔 했을 수도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날이 밝아서 위험해도 갈 수 있었지만, 그때는 진짜 큰일날 뻔 했을 수 있었다. 119를 불러야 했을 수도 있었다.
멧돼지에게 고마웠다.
진짜 인생이란 하루도 앞을 알 수 없는 것이며 다양한 경험으로 인생이 풍부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