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를 발간하는 이유는 돌아보고 이를 반성하거나 잘된 점을 찾는 것에 있다. 조선은 임란이 끝나고 이를 반성하여 수습하여 효과적으로 나라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여 병자, 정묘호란을 겪었던 것이다.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방과 내치를 동시에 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발발 시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으며 선조가 의주까지 가는 몽진 길에 호종을 하는 중 영의정이 되었다가 평양에서 파직을 당하였고 의주에서 평안도 도제찰사가 되었다가 한양 수복 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고 한다. 임금 선조는 전쟁 중에 신하를 교체하면서 난국 타개를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의주로 몽진을 갔고 호종한 신하가 제한적이라 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성룡의 잘잘못을 떠나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하지 못한 정부는 이동을 하기에 급급하면서 민심 수습을 위하여 신하를 파직하였다가 복직시켰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징비록은 기본적으로 1586년 일본 사신이 온 것에서 시작한다. 일본의 사정을 얼마나 몰랐는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임금이라고 칭하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知彼知己면 百戰百承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황윤길, 김성길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갔다 온 얘기로 풀어간다. 여기에서 황윤길은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김성일은 유성룡이 만나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윤길의 말이 너무도 강경해 잘못하면 나라 안 인심이 동요될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은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다 온 이후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하여 삼도 방어를 위하여 새로운 인물을 임명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안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징비록을 보면 준비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완벽하지 못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징비록에 보면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했던 까닭에 노력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전적적 이로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경상도와 전라도 쌓은 성들 또한 바른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쓸데없이 규모 만 클 뿐이었다. 특히, 진주성은 본래 험한 산을 이용해 쌓았기 때문에 방어의 요새로서 충분했다. 그런데 성이 너무 작다고 해 동쪽의 평지로 옮겨 크게 지었다. 결국 적의 침입을 받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인물 중에 이순신도 포함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불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한다. 그리고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경상감사, 전라감사, 충청감사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임진년에 신립과 이일을 변방을 순찰하여 방어태세를 확인하도록 하였지만, 일본의 침략에 완벽히 대응할 수 있는지 여부는 제대로 점검이 되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비슷하다. 무슨 대책을 수립한다고 하면 이것저것 붙여서 크게 만들다. 실효성 있게 만들어야 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평시에 안주하여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결과는 7년 동안 고생한 것이다. 지금도 역사를 보고 준비할 것은 준비하여야 한다고 본다.
1592년 일본은 침입하였으며 부산, 동래 등이 함락되었는데 전쟁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적이 오면 겁을 먹었고 도망을 갔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수시로 훈련을 하지만 실전을 경험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몽진 길을 호송하면서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도 전쟁 중에는 고단한 것이다. 호종하는 신하들은 군주국가에서 군주가 곧 국가인 상황에서 군주를 보호하면서 임금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를 피난지인 부산이 호황을 누린 것처럼 임금이 이동을 한 곳은 호황을 누렸을 것이다.
이순신의 해군의 승전보를 그대로 기록하였으며, 명군의 포악함도 기록되어 있다. 명군의 포악함이 얼마나 심했으며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며, 찰방 이상규의 목을 새끼줄을 매어 끌고 다니며 피투성이로 만드는 모습을 본 나는 통역관에게 그를 풀어 주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외세의 침략에 따라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외세를 빌렸는데 그 외세에 국민들은 고생을 한 것이다. 여기에 이순신이 효율적으로 대처한 것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재미있다. 진린과 이순신이 합세할 즈음에 징비록은 유성룡이 예측하기를 "안타깝게도 이순신이 패랄 것 같소이다. 진린의 장수의 권한도 인정지 않을 것이고 군사들 또한 제 마음대로 다룰 것이니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소?" 하였는데. 이순신은 병사들을 동원해 사냥을 한 다음 사슴 등을 잡아 큰 잔치를 준비해 두었다가 진린의 배가 바다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군사를 배치한 후 멀리까지 나가 그를 맞이했고 성대하게 맞아들이니 아주 흡족해하며 "이순신은 참으로 뛰어 난 장수요"했다고 한다. 또한, 전쟁의 공을 조선시대에는 적의 수급으로 하였는데 대부분을 진린에게 보내어 그의 공으로 돌려 무슨 일이든지 이순신과 협의해 처리했다고 한다. 아울러,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를 구별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면 잘잘못을 처리하여 섬안의 질서가 유지되고 백성들 또한 걱정 없이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요즈음에 보았을 때 군사를 동원한 것은 문제가 있었지만 아군의 협조를 이끌기 위한 이순의 노력에 감탄한다. 전쟁 중에 아군의 분란은 적의 공격의 시발점이 될 수 있고 아군의 방어태세 확립과 일사불란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성룡이 후대를 위하여 작성한 징비록이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에서도 읽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그것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