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노고산에서 시작하다.

by 김기만


새해가 되면 모두가 뜨는 해를 보기 위하여 동해 쪽으로 가고 높은 산으로 간다.

정부에서는 뜨는 해를 보기 위하여 모이는 사람들에 의하여 코로나 19가 전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월 1일 대부분의 명소를 통제하였다.


나도 1월 1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네에서 뜨는 해를 보았다.

하지만, 아쉽기도 하고 친구가 금년에 3년을 해외에 파견을 나가게 되어 금년에 뜨는 해를 같이 보기로 하였다. 뜨는 해를 많이 보는 장소를 될 수 있는 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장소를 찾았다. 그곳이 노고산이다. 노고산은 북한산 서쪽에 있는 산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북한산을 가지 노고산은 가지 않는다.


노고산은 본래 할미봉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시기 미상) 한자로 노고산(老姑山)이라 표기했다 하며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교현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에 걸쳐있는 495.7m 산이다. 옛날 이곳에서 '노고 할머니'에게 치성을 드린 산이라 해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동국 여도 (1801-1822)에서 이산 이름이 확인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삼하리 쪽에는 치성을 드리는 제단이 있다. 삼하리에서 노고산을 올라가는 삼하리 뒤쪽 등산로에 가면 있다. 친구가 이야기 하기를 마을에서 산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1861)에서는 할미고자 노고산(老姑山) 산이 아닌 옛 고자 노고산 (老姑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대개 그런데 '노고산이나 할미봉' 이름이 붙은 산은 형태가 대개 둥그스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공통점이다. 이런 모양의 산을 (老姑)란 이름을 붙이고 '신령스런 내용의 할머니 신'과 관련지어 묘사한 다양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국의 산하 참고>


북한산을 전체 조망할 수 있는 산이 노고산이라는 사실을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사람들이 한 번씩 찾는다고 한다. 노고산 등산로는 북한산 입구에 오기 전 흥국사라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길을 건너서 흥국사로 길을 잡아 오다가 능선으로 들어서는 이정표를 따라 능선으로 들어서는 길과 솔고개에서 올라오는 길 그리고 금당 저수지 인근, 삼하리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삼화리에서 올라가다 보면 추사 선생 유적이 있다.

친구들이 금바위 저수지에서 출발하여 노고산을 갔다가 삼하리로 하산하기로 계획을 수립하고 금바위 저수지 입구에 도착하니 이곳이 전원일기를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 새벽에 도착하여 금바위 저수지 근처에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노고산으로 오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단지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별들도 보인다. 서울에서 보이지 않던 별도 보인다. 친구가 야! 여기는 별도 보인다고 한다.

산을 오르면서 고양시 방향의 야경을 담아 본다. 달이 빚을 내고 있다. 능선에 도착하여 은평구의 야경을 또 담는다. 고양의 야경은 숲이 가려져 있기도 은평구에 비하여 야경이 화려하지 않다.


아무것도 보이지 겨울의 아침 이제 시작하는 새해에는 코로나도 종식되고 친구도 해외에서 근무를 잘하기를 바랄 뿐이다. 어려울 때 해외로 나가는 친구가 잘 견디기를 바랄 뿐이다.

노고산 능선에서 맞은편 북한산을 조망해본다. 역시 노고산은 북한산을 조망할 수 있는 산이다. 백운대, 인수봉, 숨은벽이 보이고 노적봉, 원효봉이 가까이에서 보인다. 친구들이랑 봉우리 이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본다. 백운대 옆의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능선을 만경대라고 하니 염초봉이라고 한다. 서로서로 주장을 하다가 산을 내려와서 밥을 사기로 한다. 인수봉이 보인다 안 보인다. 영봉이 보인다. 안 보인다. 하다가 이제 랜턴이 필요 없는 시점에 다다르니 노고산 정상이다.

노고산 정상 헬기장에 비박을 하는 산객들이 있다. 몇몇은 일출을 보기 위하여 비박을 하였을 것 같기도 하고 몇몇은 비박이 좋아서 이 추운 산 정상에 비박을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고산 정상에서 멀리 북한산을 조망하면서 사진에 담으니 이제는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명확해진다. 친구들 간의 논쟁의 결론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있었다. 이제는 보이므로 그 논쟁을 사라지고 이제는 일출을 기다린다.

일출이란 것이 무엇인가? 태양이 뜬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천동설이 여기에 있다. 지동설을 접목시키면 지구는 하루에 360도를 돈다. 그러면 우리가 서있는 위치는 1분에 어느 정도 태양에 가까이 가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1시간에 15°씩 회전한다고 한다. 간절곶에서 일출을 본 후 서울에서 보기까지 약 20분이 소요된다. 그리고 북한산 넘는 일출을 보기 위하여는 서울보다 5분 이상 늦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붉은 기운이 북한산 산 위에 퍼지고 있다. 일월에는 영봉과 인수봉 사이 하룻재 근처로 태양이 뜬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 태양은 우이령 근처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혹! 노고산에서 일출을 볼 때에는 참고하여야 한다.

영봉과 인수봉 사이에 뜨는 일출이 동그랗게 올라오니 주변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새해의 소망을 기원하기보다는 장관을 담기에 바쁘다. 어느 누구는 새해의 소망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소망보다는 장관을 보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새벽의 공기가 차다.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진 기온에 대비하기 위하여 옷을 두툼하게 입어서 추운 줄은 모르 겠는데 사진을 찍기 위하여 맨손을 내놓고 찍고 있으니 손이 언다. 한 명은 스틸, 한 명은 동영상을 담는다. 서로 공유하기로 하였다. 삼각대를 가지고 온 어는 산객이 자연스럽게 찍고 있다. 다음부터는 삼각대를 가지고 와서 세워놓고 블루투스를 이용하여 사진을 찍어야겠다. 동영상도 찍고 자유자재다.

추사필적 암각문이 있는 곳으로 하산하기로 하였다. 삼하리로 내려가는 삼거리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니 아직 이곳은 백운대에 가려져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도 일출을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나무들이 시야를 가린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삼하리 입구에 세워놓은 차를 이용하여 저수지 인근에 세워놓은 차량을 회수하기로 한 만큼 가파르게 내려가는 등산로를 내려간다.


이곳에서 추사필적 암각문을 보기로 하였다. 친구가 이곳에서 암각문을 많이 확인하였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곳에서 우리 보고 보물 찾기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예전에는 이곳을 지날 때 이곳이 추사필적 암각문이라고 하였는데 계곡의 바위에 있는 것을 몰랐다. 다만, 안내표지가 있는 근처의 바위에 암각화만 보고 지난 기억이 있다.

이제 노고산 독재동 추사필적 암각문에 도착하였다.


친구가 찾아보라고 한다. 우리는 계곡에 있는 돌에서 암각문을 찾는다. 한 개 한 개 찾을 때마다 사진을 찍으면서 보물 찾기를 한다. 계곡의 흐르는 물이 있는 바위에 암각문이 있다. 이것을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옮겨서 보관하여야 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이곳에 그대로 있다면 여름의 홍수기에 물에 돌 들이 굴러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경기도 문화재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를 비롯한 문사(文士)들의 글씨가 새겨진 암각문으로 노고산 중턱 곡릉천 계곡의 자연 암반 9곳에 새겨져 있고 그중 ‘미수선생장리지소(眉壽先生杖履之所)’는 허목(許穆 : 1595~1682)이 효종(孝宗) 9년(1658) 이곳을 다녀가면서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독재동(篤才洞)’ 등의 각 자는 허목의 후배 이시선(李時善 : 1625~1715)의 필적으로 전한다고 한다. ‘몽재(夢齋)’는 김정희의 필적으로 세로 45cm를 넘는데 추사체(秋史體)의 웅건한 특징이 잘 나타나며, 몽재가 누구의 호인지는 알 수 없고. ‘몽재(夢齋)’ 아래에 ‘갑자(甲子)’ · ‘경오(庚午)’ · ‘무술(戊戌)’ · ‘갑인(甲寅)’이라 새긴 간지(干支)도 무슨 의미인지 미상(未詳)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이 곳에 추사의 필적이 남겨진 연유를 알 수 없지만, 그가 순조(純祖) 16년(1816)과 순조 17년(1817) 신라 진흥왕비를 고증하려고 북한산에 두 차례 갔을 때 홀 이곳에 들르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갑자기 마을 입구에 세워둔 차를 이동시켜 달라는 전화가 온다. 우리들의 마음이 바쁘다. 주차장이 아닌 곳에 주차해 둔 우리가 편하자고 한 주차가 남에게 피해를 준 모양이다. 미안할 뿐이다. 새벽 일찍 산으로 올랐고 9시쯤 내려왔는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른 아침부터 그곳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빈 공간이지만 그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만큼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이동시킨다. 추후에는 반드시 주차장에 세워야겠다.


금바위 저수지 인근에 조성되어 있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돌아가셔 선영에 묘소를 조성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이장을 하고 묘소를 조성하도록 하여 이곳에 묘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관리되어 위치도 좋은 곳에 조성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1927년 2월에는 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지만 3월 29일 숨을 거뒀다. 4월 7일 그를 추모하는 장례가 처음으로 사회장이라는 이름 하에 경성(서울)에서 치러졌으며 당시 경성 인구는 30만 명 정도로 추산됐는데, 그의 사회장에 운집한 추모객은 10만 명을 헤아렸다고 전해진다고 그의 묘 앞에 기록되어 있다.


이웃한 복성군 묘역이 있다. 전주이씨 복성군파를 형성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묘역에 있는 문인석들의 콧날은 사라지고 없다. 이것은 남존여비 사상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중 문인석이 통상적인 것과 다르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 왕실의 묘역이다. 복성군은 태종의 빈인 효빈김씨가 낳은 경녕군의 7번째 아들로 태종의 손자이다. 어떻게 보면 서손임에도 왕손이기에 이를 모두 극복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중종 때 복성군이 있었으며 그 복성군은 작서의 난에 휘말려 죽었다.


이 마을 우리가 어릴 적 많이 보았고 1990년대 까지 이어졌던 전원일기를 촬영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세트장은 코로나 19로 굳게 닫혀있다. 그래서 세트장 입구에 있는 사진을 몇 장 담아 보았다.

새해에는 코로나가 종식되어 마음놓고 등산도 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