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법궁 창덕궁과 후원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를 보다

by 김기만

조선의 법궁인 창덕궁은 많은 사람이 보러 간다. 창덕궁에는 후원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비원이라고 한다. 이것도 일제의 잔재라고 한다. 일명 궁원이라고도 한다. 공식적으로 창덕궁 후원이다. 임금이 머리를 식히는 곳이다.
창덕궁에 가기 위하여는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 임금이 머문 궁을 법궁이라 한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궁을 이궁이라 한다. 한양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모두 5곳이다. 경복궁은 태조가 건축하였고 이궁으로 창덕궁을 태종이 건축하였다. 창경궁은 임금이 머문 궁전이 아니고 대왕대비 등이 머물던 곳이며 동궐이라고 하였다.( ‘법궁-이궁 양궐 체제’의 변천, 출처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경복궁은 법궁으로서 역할에 충실하였으나 조선의 임금은 피의 역사를 싫어하였고 자기가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이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창덕궁은 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경복궁에서 피를 보았고 임진왜란 때 모든 궁궐이 불타고 재건한 첫 번째 궁궐이 창덕궁이며 이궁으로서 경운궁이 지어졌다. 후에 경운궁은 경희궁이 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은 외국공관이 밀집하였던 덕수궁에서 집무를 보았지만 법궁은 창덕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은 많은 부분이 헐리었고 학교가 들어서 서울고등학교가 여기에 있었다. 창경궁은 동식물원이 들어서는 피해를 보았고 경복궁은 많은 부분을 총독부 청사에 빼앗겼다. 그래도 많은 부분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거쳐하여서 유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돈화문으로 들어온 후 인정전을 거쳐 후원으로 가기 위하여 금천교를 지나야 한다. 금천교는 돌다리인 관계로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가장 오래된 궁궐 다리라고 한다. 이 금천교는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임금의 즉위식 등이 개최된 인정전이다. 한복 입은 사람들은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여 외국인들이 한국문화를 체험하기 위하여 한복을 입고 입장을 한다. 입장료는 3000천 원인데 대여료는 5000천 원이지만 대여를 받고 입장을 한다. 국가는 무료입장으로 손해이지만 주변 상가는 호황이다. 공유경제를 통하여 경제적으로 이득이다. 이러함에 따라 관광지는 호황이 되는 것이다.


인정전 앞에 선다. 옛날에 정 1품에서 정 9품까지 줄을 서는 정표가 있다. 요즈음의 공무원도 1급에서 9급까지 있다. 하지만 그 단계는 같지 않다. 왕과 왕비, 세자 다음 단계가 정 1품이 시작되는 만큼 다를 수밖에 없다. 영의정도 정 1품이다. 왕의 후궁들도 정 1품인 빈으로부터 시작되니 왕의 후궁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요즈음 1급은 조선시대 당상관에 해당하는 정 3품과 비견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조선왕실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이 모습은 1907년 모습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창덕궁 인정전은 덕수궁 중화전과 같이 조선의 정전이자 대한제국의 정전이었다고 한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나서, 1907년 순종이 대한제국 황제에 취임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인정전 내부를 서양식으로 꾸미기 시작했고 전등과 유리창 등이 그 흔적들이라고 한다. 바닥도 마룻바닥이다.

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일월오봉도가 있다. 예전에 그 의미를 알았는데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그림에 나타나는 해와 달은 음양(陰陽)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는 오행(五行)을 상징하며 하늘과 땅, 물이 다 나타나니 그것은 곧 우주를 의미하며, 우주의 생성과 변화, 운행의 체계인 음양오행을 대변하는 상징물들을 주관하는 이 그림의 주인공인 국왕은 곧 우주의 주재자 아니면 우주의 주재자를 대신하는 존재와 같은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4첩, 8첩, 혹은 좁은 한 폭 짜리 협폭(挾幅), 또는 삽병(揷屛) 형식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여러 가지 의궤(儀軌) 기록에 의하면, 이 병풍은 ‘오봉산병(五峰山屛)’, 또는 제일 많은 경우 단순히 ‘오봉병(五峯屛)’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 문헌기록의 명칭을 따라 오봉병(五峯屛)이라고 불러야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후원은 일본의 정원의 인공적인 것을 거부하고 자연 상태에서 필요에 의하여 건물이 건축되어 있고 활용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임진왜란 시절 소실되었고 광해군 시절 창덕궁이 건축된 만킁 그 이후의 양식을 볼 수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후원이라고 하여 정원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할 소지가 너무 크다. 후원 구역에 우리에게 익숙한 규장각도 있고 춘향전에 나온 이몽룡이 과거시험을 치른 춘장대가 있으니 그렇다고 보면 될 것이다. 임금이 은밀하게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공간이면서 휴식을 취하였던 공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후원은 사전예약이 필수라 예약을 하고 해설사를 따라가면서 관내를 관람을 한다. 창덕궁 낙선재 바로 옆에서 후원은 시작된다.


이곳은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고종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등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창덕궁 경내이지만 일반 사대부 집과 동일하였다.

창덕궁 안내서에 보면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 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고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며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고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으로서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정조의 손자인 헌종이 할아버지인 정조를 닮기 위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 우리도 정조가 좋은 임금이란 것을 알게 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누구를 닮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유명하거나 악당이라고 보아야 하며 악당은 악당은 악당이 닮을 뿐이며 흠모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후원을 시작하는 곳에서 해설가를 기다리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유사하다. 우리도 동참을 한 것이다.

첫 번째 만난 연못이다. 부용지다. 해설가님의 입담을 들으면서 이곳저곳을 휴대폰에 담는다. 부용은 연꽃을 뜻하며 연꽃이 있을 때는 연못을 보면 되지만 없을 때는 부용정을 보면 된다. 연꽃 모양의 정자다. 부용정 앞의 부용지는 네모난 모양이고 연못의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부용정과 영화당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정조 때 만든 규장각도 있다.

해설가 선생님의 입담이 대단하다. 숙종 때 이곳을 만들었으며 당시에 희빈 장 씨와 이곳을 거닐었을 것이라고 한다.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서열 출신을 등용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양반관료들이 이들을 핍박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왕궁 후원에 건물을 지어서 그들을 이곳에 근무하게 하여 보호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부용지 안에 있는 조그마한 섬은 용도가 있었다고 한다. 임금이 신하들과 시문을 짓다가 그들이 시문에서 응답하지 못할 경우 귀양 가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시문 행사가 끝나면 방면되어서 연회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부용지 바로 옆이 영화당이다. 이곳 바로 앞이 춘장대이다.

임금 앞에서 과거를 치르는 장소였던 것이다. 지금은 많은 나무들이 광장을 메우고 있지만 넓은 뜰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광해군 때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18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제 이동을 한다.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곳에 궁의 후원에 사대부의 집이 있다. 연경당이다. 문화재청에서 설명한 자료와 해설가 선생님이 이야기하기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순조를 위하여 건축한 것이며 양반집은 99칸이지만 120칸으로 지었다고 한다. 순조는 몸이 안 좋아 이 연경당에 거쳐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2년 만에 세상을 하직하면서 조선의 국운도 다되었다고 해설가는 이야기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장성한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아픈 순조가 다시 일을 하였고 헌종도 나이 7세에 등극을 하면서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연경당은 2012년 보물제 177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특징을 설명을 들으면서 내외담과 안마당의 용도를 알게 되었다. 내외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유교사회에서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이 높은 이유는 말을 타고 다녀야 하는 남성과 가마를 타고 다녀야 하는 여성에 맞게 대문이 되어 있었다. 안마당은 집안의 다양한 행사를 위하여 나무를 심지 않았으며 또한, 괜히 네무 난 모양에 점이 들어가면 흉할 흉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반가는 밖에서 보면 내외가 구분이 되지만 모든 방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순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후원에 사가를 지어서 이렇게 쉼을 택했을 까 생각한다. 후에 고종이 이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사대부가를 민속촌에 가서 보았고 하회마을에 가서 보았지만 그것은 그것이었다. 문화해설가가 필요한 것이다. 양반가를 들어가면서 효명세자가 공부하였던 곳도 보여준다.

효명세자는 한 칸짜리 방에서 공부를 하였고 언덕 너머의 규장각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제는 존덕정이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양식이 아니다. 중국에서 본모습과 동일하다. 조선 중기에 대표적으로 치세를 하지 못 한 임금으로 선조와 인조를 이야기한다. 선조는 방계혈족이라는 트라우마가 본인을 망쳤다고 보면 되지만, 광해군의 치세에 자기들이 살기 위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킨 인조는 그것이 자기를 망친 것이다. 친명 정책에 배청 정책을 추진하다가 망한 것이다. 임금이 그렇게 망하고 정신을 못 차려서 문제를 지속 유발하였다. 소현세자가 무엇인가 하려고 하였는데 그것도 못하게 했으니 말이다. 임금이 청나라에 망하기 6개월 전에 만들었다는 옥류천은 지금은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묘호란을 겪은 임금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옥류천을 만들 당시에는 계곡에 물이 많았을 것이다. 현대에는 성균관대가 옆에 있고 개발되어 물이 거의 없다.
후원을 나오면서 오늘이 대박이라고 한 해설가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한다. 한낮의 뜨거움이 없이 적절한 구름이 우리에게 관람의 즐거움을 더하였고 이번 주까지 옥류천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漪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출구 쪽으로 나오다 모든 사람들이 나무줄기의 아름다운 문양에 집중을 한다. 고목에 아름다운 문양이다.

후원의 마지막이 돈화문이다. 돈화문을 벗어나면 다시 안국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