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옛길을 설명하는 홈페이지 가면 영남길 3코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고구려에서 명명한 옛 용인의 중심 구성현은 삼국시대에 용인이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옛 용인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입니다. 현재는 기흥구에 편입되어 행정동으로 변화하였지만 영남길을 걷다 보면 아직도 옛 용인의 중심이었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탄천을 거쳐 구성역을 지나면 잘 보존된 마북동 석불입상과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며 자결한 민영환의 묘소를 마주칩니다. 조금 더 옛 용인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용인향교와 옛 구성의 영화를 보여주는 구성동 주민센터가 보입니다. 여기서 고즈넉한 법화산의 숲길을 지나면 용인의 새로운 신도시로 각광받는 동백지구의 호수공원으로 도착할 수 있습니다."
구미동을 나와서 공원이 너무 이쁘게 되어 있고 메콰세이어 잘 가꾸어져 있다.
탄천을 걷는다.
탄천 하면 예전에는 썩은 물이 생각난다. 누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석탄을 저기에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니냐고 용인에서 발원하여 성남을 가로질러 잠실운동장 옆으로 한강에서 합류하는 것이 탄천이다. 탄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말도 안 되게 동방삭도 나오고 고려시대 이야기도 나온다.
용인의 난개발에 따른 생활하수에 의하여 오염되었던 기억이 가득하다. 요즈음은 하수처리장으로 이것을 옮겨서 문제가 없지만 예전에는 탄천 옆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면서 탄천이 생활하수로 오염이 되었다가 이제는 깨끗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 세월이 약이고 그만큼 압축성장을 한 것이다. 오랫동안 성장하였으면 탄천은 지속적으로 썩었을 것이고 정화하는데도 수십 년이 걸렸을 것이다.
탄천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볼 수 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우리들 사는 세상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옛사람들 일제강점기 전 우리 옛사람들이 이렇게 걸었다고 볼 수 없지만, 경기도에서 옛길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를 즐기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제 탄천을 지나 법화산으로 간다. 법화산으로 가기 전 마불도 석불입상을 보고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그 뜻을 보여준 민영환 선생 묘소를 찾는다.
마북동 석불입상에 대한 소개자료를 보니 "석불입상은 직육면체의 몸통에 높은 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장방형으로 턱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였습니다. 눈은 크게 치켜뜨고 있으며, 코는 크고 오뚝하게 부각시켰으며, 입은 꼭 다물고 있는데 얼굴에는 볼륨감이 전혀 없고 석인상의 엄격성과 근엄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수인(手印)은 복부 부근에서 두 손을 모아 보주 내지 홀(笏)을 잡은 계인의 형태이며, 가슴에는 ‘만(卍)’자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착의는 불의가 아닌 관복을 착용하고 있으며 의습선은 손과 배 아래 부분에만 몇 가닥의 선으로 간략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북리 석불입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널리 유행하던 마을 미륵 신앙의 일종으로 민간에서 치병, 기자, 마을의 수호, 기복 등을 빌던 불상으로 여겨집니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마북동은 이제 도시화가 되어 있고 주변의 아파트촌이 즐비하다. 석불입상과 석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경우 동네 주민들이 이곳이 무엇인가 알고 싶을 경우를 대비하여 안내간판을 잘 구비하여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사찰도 없고 하니 이제는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관리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도시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공적비가 마북리 석불입상 및 석탑을 호위하고 있을 뿐이다. 죽은자들의 흔적이 석탑을 지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구성초등학교는 옛 구성현의 관아 자리로 식민 지 시기에 김량장으로 군청을 옮기기 전까지 구성면 일대는 용인 지역의 상업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탑은 임진왜란 때 파손 도괴되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후에 조합해 놓은 것으로 본래 기단부 사용된 방형의 판석을 지반석으로 하고 우주가 있는 유일한 몸돌이 올려져 있다고 한다. 대체로 고려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일명 용화사지라 불리는 절터라는 것을 표시한다고 한다.
다음은 민영환 선생 묘역이다.
민영환 선생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외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누군가가 말했다.
"일본놈을 한 명이라고 죽이고 죽을 것이지 자결하면 무슨 의미냐?
"단지, 나는 왜놈들하고 같이는 못살아"
"그래도 그것이 본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당시의 선비 정신이야"
그래도 민영환의 유서를 확인해보면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다. 유서 한 통은 작은 명함에 썼는데,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다. 한자로 작성한 것인 만큼 가능하였다고 본다.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將且殄滅於生存競争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億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決心戮力復我自由獨立即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배 더욱 기운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법화산을 올라간다. 오른쪽은 옛 경찰대, 왼쪽은 공원묘지다 많은 사람들이 공원묘지에 온다.
경찰대는 처음 개교할 때는 용인에 있었는데 수도권 공공기관 이전과 교육기관 이전에 맞추어 멀리 가지도 않고 아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골프장은 경기경찰청에서 관리하면서 체력단련장이라는 이름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찰대에 무슨 골프장이 필요하였을까 생각해보지만 군인들도 체력단련을 위하여 골프을 치는데 경찰을 예외로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일반인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법화산을 오르면서 왼쪽의 천주교 공원묘지를 쳐다본다. 천주교 공원묘지는 곳곳에 있다. 묘지 공화국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종교 논쟁은 싫지만, 불교에서처럼 이제는 공원묘지를 탈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불교는 예전부터 화장하는 문화가 있어고 납골당이 있었으며 그 사리탑이 곳곳에 있다. 이제 우리도 현실을 직시할 팔요가 있다고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법화산은 불교의 법화경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는데 천주교 공원묘지가 있다.
법화산은 가볍게 등산을 하는 동네 주민들의 주요한 휴식터가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산을 내려오면서 보면 오른쪽에 또 골프장이다. 법화산 자체는 공원묘지와 골프장으로 포위가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산을 내려오면 다시 용인의 아파트 촌이다. 언제까지 저렇게 아파트가 올라갈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정(漁汀)’은 『대동지지』에는 ‘어정개(漁汀介)’로 기록된 곳이며 본래는 주막거리로 유명했고 인근에는 구흥역(駒興驛)이 있었다고 한다. 어정사거리에서는 동쪽으로 길을 잡아 용인동백호수공원 쪽으로 가다가 공원 앞의 호수공원삼거리에서 동백죽전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오산천을 건널 수 있다. 호수공원에서 멈추고 다음 코스로 진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