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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만 Mar 01. 2021

금산사, 모악산 어느 것이 우선인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악산은 그렇게 힘들었는데 모악산은 그렇지 않았다

전주, 완주, 김제 근처의 사람들은 눈을 돌려보면 보이는 산이 모악산이다. 모악산에 대한 설명을 가장 열심히 한 곳은 김제시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김제시 입장에서 보면 김제평야가 있지만, 김제를 알릴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모악산이 있고 금산사가 있기에 이웃한 군산, 정읍, 부안 등에 비하여 미약하기 그지없는 관광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에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제시청 홈페이지에 가면 김제시의 다양할 볼거리를 안내한다. 동진강에 형성된 벽골제가 있다. 역사책에도 나오는 것인 만큼 이를 널리 알리면 되겠지만 한번 왔다 가면 더 이상 올 일이 없다. 하지만, 종교시설인 금산사와 완주 쪽에서 올라오는 산행객들도 모악산 정상을 오는 만큼 이를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본다. 김제시에서 오죽 어려운 관광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지평선 축제도 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찾아오는 관광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활용하여야 한다. 그래서 정상에서 김제 쪽 화율봉으로 가기 직전 능선에 있는 전망대에서 모악산 정상을 담아 보았다.

"금만경 평야의 젖줄인 모악산은 과연 어떤 산인가. 일설에 따르면 모악산의 원래 이름은 금산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금산사란 절 이름에 근원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금산(金山)이란 무슨 뜻인가. '큰산'을 한자음으로 표기했다는 설과 금산사 입구 금평호에서 사금이 나오기 때문에'금(金)'자가 들어갔다는 설로 갈리기도 한다. 또 모악산은 그 정상에 마치 어미가 어린애를 안고 있는 형태로 보이는 바위가 있어 이로부터 생겨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금산사지」에 의하면 모악산은 우리나라 고어로 '엄뫼'라는 말이지만 '큰 뫼'라는 말은 모두 아주높은 태산을 의미한 것으로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는 어머니의 뫼라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의역해서 모악(母岳)이라 했고 '큰 뫼'는 큼을 음역하고 뫼는 의역해서 금산(金山)이라고 칭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절을 개창하면서 금산사(金山寺)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산은 사명(寺名)이 되고 모악은 본래대로 산명(山名)이 되어 모악산 금산사라는 명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김제시 홈페이지에 모악산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찾아보았다. 어디에서나 지방자치단체가 설명하는 자료가 가장 공신력이 있는 만큼 그 고장의 관광자원을 확인하기 위하여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를 찾아본다."(출처 : 김제시청 홈페이지, 모악산에 대한 설명)


또, 금산사는 이렇게 보면 최대한 찾아올 수 있는 자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후백제를 건국하고 아들하고 권력싸움에서 패퇴한 후 유배되었던 견훤이 한동안 머물렀던 금산사다. 하지만, 금산사 어디를 가도 견훤과 관련 시설물도 없다. 각색도 필요한데 그렇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모악산을 갈 때 고민을 많이 하였다. 처음 가는 것인 만큼 그래도 볼거리도 있고 의미도 있어야 한다. 모악산을 완주 쪽에서 올라갈 수도 있고, 김제 쪽에서도 올라갈 수 있다. 금산사와 모악산을 동시에 보기 위하여 김제 쪽으로 접근을 하였다. 금산사와 모악산을 동시에 경험하기로 한 만큼 도립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이동을 한다. 도립공원 주차장도 무료였고 금산사 매표소 입구에 있는 주차장도 무료였다.


이 지도를 사전에 확인하지 않고 걸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후회를 하지 않는다. 금산사와 모악산을 동시에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금산사를 먼저 보고 모악산을 경험하기로 한 만큼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악산을 먼저 보기를 원하고 입장료 3,000원이 아까운 사람은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능선을 이용해서 가면 된다. 능선 오른쪽 화율봉인 해발 617m라 만만치 않지만 모악 기맥을 타고 오른다 생각을 하면 된다. 혼자서 산행을 한다면 3,000원이지만 여럿이 산행을 한다면 ×n 이 되기 때문이다. 화율봉을 오른 후 뱃재, 장근재를 거쳐서 정상으로 간 후 북봉에서 매봉으로 하산하거나 심원암으로 하산하여 금산사를 둘러보면 된다.

나는 금산사를 먼저 둘러보고 심원암을 거쳐 북봉으로 간 후 정상을 거쳐 장근재, 뱃재, 화율봉으로 하산하였다. 결과는 3000원을 내었고 탐방객도 없고 순례객도 없는 금산사를 둘러보았다

김제, 완주, 전주에서는 모악산을 둘러보는 둘레길인 모악산 마실길을 운영하고 있다. 금산사를 가는데 어는 분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셨냐고?"

"어디에서 왔어요"

"우리하고 마실길을 같이 갑시다. 우리는 오늘 12km를 걸을 예정입니다"

"길이 좋났요?"

"길이 좋아요. 나이 많은 우리들도 걷기 좋아요"

"저는 오늘 금산사를 거쳐 모악산 정상에 가려고 왔어요. 아쉽네요"


연세 드신 분들도 걷기 좋은 길이라고 한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김제 권역이 재미있을 것 같고, 완주도 그럭저력일 것 같다. 길을 걸으면서 오손도손 걷는 것도 좋고 건강을 찾을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언제가 한번 걸어보고 싶지만, 걷고 싶으면 대중교통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싶지 않을 것 같다.  

금산사 경내는 산책로도 잘되어 있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산행에 대한 기록과 금산사에 대한 설명이 혼재될 수 있어 금산사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뒤로 돌리고 우선 산행에 집중해 본다. 산행기록이라고 해야 그렇게 길지도 않다. 모악산은 악산이라고 되어 있지만, 한자로 母岳山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경기도의 5악이라고 하는 산은 대부분 암산이지만 모악산은 큰 산으로서 바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금산사 일주문을 지나서 금산사 금강문을 지나기 전 계곡으로 가는 이정표에 심원암이라고 되어 있는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마실길과 같이 움직이기에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갈림길까지 걸을 수 있다. 심원암으로 방향을 튼 순간 이제부터 본격적이다. 여기에서 이정표는 우리를 혼란하게 한다. 정상이라고는 이정표는 직선으로 되어 있고 심원암이라는 표시가 있고 정상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상이라는 방향으로 걷는다고 한다.


심원암으로 가기 전 갈림길에 모악산 예찬이 있어 옮겨 본다.


모악산 예찬

       -현암 최순식-


산에 오르면 산의 호연지기에

우리모두가 성(聖)스러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 끼리

모임을 갖은지 열다섯해

그 이름 모악산악회!


모악산은 우리고장의 태산(泰山)이요 영산(靈山)이다.

백제땅 벽골제(碧骨堤)의 수원(水源)이요

금만평야(金萬平野)를 살찌우는

어머님의 젖줄일세


그리고 모악산은

겨레의 애환(哀歡)이 서려있는

민족신앙의 발상지요

영원한 조국의 혼(魂)불!


고향당 어머님의 품안 이어라.


심원암을 지나서 3층 석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심원암 앞에 있는 부도탑이 눈길을 끈다.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혼자서 길을 걸을 때에는 산에서 길을 잃을까 하고 걱정을 한다. 하지만, 길은 단순하다. 심원암 옆에 가니 이정표가 있다. 사실 심원암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약간 더 높은 곳에 있었으나 소실된 후 이곳에 복원되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이 사찰의 북강3층 석탑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북강 3층 석탑을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모악산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잘되었다. 암자를 지나자마자 대나무들이 길을 열어 주고 있다. 대나무가 수문장이 되어 길을 안내한다. 나도 걷는다. 옛 심원암이 있던 사찰터까지 가파르게 오른다. 복원을 하면서 그 가파름을 해소하기 이렇게 복원을 하였다고 본다.

여기서부터는 북봉까지는 아무것도 없다. 좌우에 능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오르고 오를 뿐이다. 북봉에 올라야 정상도 보이고 완주도 보인다. 사람도 없다. 내가 너무 일찍 움직여서 그런지 사람이 그리워진다. 1시간 남짓 오르니 북봉이다. 북봉에 완주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정상을 향하여 사진을 담는 사람도 있다. 나도 담아 본다. 정상에는 송신소에 있는 케이블카가 움직인다. 이곳도 케이블카가 있다. 관악산에도 있듯이 송신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근무교대 등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모악산 정상석은 두 곳에 있다. 송신소에 있는 정상석과 함께 송신소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전망대에 있다. 이곳의 송신소는 개방을 한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10시부터 16시까지 개방을 한다고 되어 있다. 송신소의 옥상도 개방을 하여서 누구나 이를 이용하여 조망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시민들과 함께한 것이다. 군부대 시설이 아니라면 이를 개방하여 즐길 수 있는 것도 좋다고 본다.

이제는 하산이다. 화율봉까지 간 후 주차장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약 6km라고 되어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산에서는 인사를 한다. 마스크를 쓰고 지나간다. 화율봉에 가기 위하여 바로 송신소에서 문을 개방하여 놓지 않았기에 우회를 한다. 우회는 다시 오르는 것이 힘들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숨을 헐떡이면서 오르는데 완주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송신소를 열어 놓았어요"

"예 열어 놓았습니다"


헬기장에서 이제 화율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정상을 바라보고 멀리 금산사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 이렇게 멋진 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을 지나칠 수 없다.

미세먼지가 없어서 그런지 하늘이 방금 지나간 비행기가 만든 비행운에 따라 예술적이다. 이것을 담아낼 수 있는 요즈음의 휴대폰 카메라에 찬사를 보낼 뿐이다. 금산사는 그렇게 잘 나오지 않았지만 하늘과 산과 평야과 조화를 이루었다.


장근재, 뱃재를 거쳐 화율봉에 오르니 주차장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디에도 전망이 보이지 않다가 화율봉에서 잠시 곁을 내준다. 모악산 정상이 유혹을 한다. 이제는 하산을 한다. 하산을 하는 등산로가 너무 멋있어서 또 걷고 싶을 뿐이다. 1시간 남짓 걸으니 주차장이다.


금산사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금산사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다시 한번 김제시 홈페이를 인용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미륵사상이 도입된 이래 호남지방에서 미륵사상은 모악산을 중심으로 개화했다. 금산사의 미륵전이 그 대표적인 표상이다. 그런가 하면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도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을 빌미로 후백제를 점령했다. 근세에 이르러 동학혁명의 기치를 든 전봉준도 모악산이 길러낸 인물이다. 모악산 일대를 신흥종교의 메카로 만든 강증산(姜甑山)도 이산 저산 헤매다가 모악산에 이르러 천지의 대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금산사는 백제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습니다.766년 진표율사는 미륵장육존상을 세우고 미륵전을 지어 점찰법과 미륵십선계로 민중을 교화하였습니다.1079년(고려 문종33) 혜덕왕사 소현 화상이 대사구와 봉천원구, 광교원구 등 총 88당 711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하였고, 35부 353권의 불교전적을 판각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유가종찰과 미륵성지의 위상을 한층 격상시켰습니다. 1592년(조선 선조25)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뇌묵 처영대사는 천여명의 의승군과 함께 왜군을 격퇴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1635년(조선 인조13)수문대사가 지훈, 덕행, 천성, 응원, 학련, 대전, 운근 등 15명의 화상과 함께 35년간에 걸쳐 대적광전과 미륵전, 대장전 등 대사구역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출처 : 김제시 홈페이지, 모악산과 금산사)


금산사를 들어가면서 무엇일까 궁금하였다. 후백제의 견훤이 유폐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금산사는 김제에 있으면 모악산 밑에 있다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미륵사상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견훤과 쌍벽을 이루었던 궁예가 미륵의 화신이라고 하였는데 궁예가 왕건에 의하여 폐위되고 견훤은 아들에 의하여 미륵사상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갔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세조가 단종을 유폐시켰던 청룡포는 탈출을 할 수 없는 천혜의 유배지였는데 이곳 금산사는 모악산을 둘러본 결과 그렇게 천혜의 유배지는 아니었다고 본다. 뒷산은 높지만 육산이고 험준하지 않기에 탈출이 가능했다고 본다.


강화도는 연산군이 유폐되었던 곳을 흔적을 찾아 교동도에 무엇인가 만들어 놓았는데 김제시는 그러지 못하였다. 나 같으면 김제시도 금산사와 협의하여 무엇인가를 하나 만들어서 운영하는 것이 역사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금산사는 미륵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륵전이 있는데 미륵전 옆에 갑자기 석가모니의 적멸보궁이 있다. 이것도 재미있다. 미륵과 석가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미래와 과거가 공존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륵전은 신라시대 창건되어 문제없이 보존되다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의하여 전소되었다고 한다. 전쟁에도 문제없이 유지되었는데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가 일본군에 의하여 유린당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임진왜란 당시 이곳의 승병이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격퇴한 것에 보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편으로 정유재란 당시 선조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끌어내린 결과일 수도 있다고 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주요 도시만 점검하고 평양까지 갔다. 그 결과는 소규모 도시에서 의병들이 집결하여 일본군을 괴롭혀 그들이 패퇴한 것에 교훈을 얻어 정유재란 당시는 곳곳을 유린하고 파괴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륵전은 인조 때 다시 복원하였고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곳은 지리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보전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은거지라고 해서 국군과 경찰에 의하여 사찰이 불에 소실되었으며, 또한, 반대 측도 이러한 이유로 불을 질렀다.


이곳에 있는 사찰 수호기도 재미있다. 조선말 이곳에 금광이 채굴되었으며, 채굴업자와 채광꾼들에 의하여 금산사가 침범을 당하였으며, 이곳에 있던 각민대사가 미륵전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채광꾼들과 맞서다 그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이 물러나면서 사찰이 수호되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최근에 지율스님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것은 공익이 먼저냐 아니야였고, 이곳의 이야기는 사익에 대항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금산사는 넓은 경내를 자랑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뒤에 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뒤로 돌아가면 모악산 정상까지는 1시간 남짓 더 걸어야 한다. 속리산의 법주사와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은 이상하게 종교와 관련된 시설이 오랫동안 역사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의 사찰, 개신교 교회, 가톨릭 성당이 오랜 역사를 같이 하고 있다. 불교의 사찰은 금산사, 개신교 교회는 금산교회, 가톨릭 성당은 수류성당이라고 할 것이다.


김제시에서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양귀자 작가의 소설 '숨은 꽃'의 무대로 유명한 귀신사와 천년고찰 금산사, 100년 된 'ㄱ'자형 한옥교회 금산교회, 강증산의 증산법종교와 작은 마을임에도 신부를 많이 배출한 수류 천주교회까지 둘러보면 여러 종교가 이웃해 있는 금산지역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출처: 김제시 홈페이지, 종교문화기행)


먼저, 금산사를 갔다가 내려오면 도립공원이고 전주나 김제시내로 나오기 위해서는 옛날 국도를 이용하면 만나는 것이 금산교회이다. 금산교회는 1908년 설립된 교회로서 옛 건물이 보전되어 있다. 옛 건물은 'ㄱ'자형이다.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으니 목사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여성, 왼쪽은 남성이 앉되 서로는 같이 앉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오래된 교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수류성당이다. 모악산 주변에 있는 성당으로서 1908년 건축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고 현재는 1959년 현대식으로 건축한 성당이 있다고 한다. 수류성당은  "한국뿐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지역으로 이름이 나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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