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삼남길도 7일 차이고 7번이나 주말마다 남쪽으로 가다 보니 전주까지 갔다. 토요일만 산행을 하고 일요일은 쉰다. 월요일 출근도 하여야 하는 만큼 일요일에 무리를 하는 경우 월요일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금요일과 토요일이 연휴이다. 어린이날과 토요일이 겹쳐서 1박 2일 동안 남쪽으로 간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정읍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은 백양사역까지 가보려고 한다.
전주 IC, 전주 월드컵 경기장 등 전북혁신도시 근처에 쉽게 접근하기 위하여는 전주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시내버스를 이용해도 되지만 대전 이북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익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익산역에서 전북혁신도시로 이동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더욱 편리하고 빠르게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익산역에는 호남선과 전라선이 교차하는 만큼 많은 기차가 있다. 전주역은 전라선 기차만 있다. 익산역에 도착하여 환승할 수도 있다. 우리도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익산역에 도착하는 KTX를 타고 익산역 광장에 있는 환승센터에서 시외버스로 환승하고 전주 혁신도시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택시 또는 시내버스를 선택하면 되는데 우리는 2명이고 시내버스비나 택시비가 얼추 비슷하게 나와 택시와 전주 IC 인근인 전주수목원에 도착하였다.
전주수목원에 도착하니 9시다. 오늘은 1박 2일이고 한번 열심히 걸어보자고 결의를 한다. 사실 다시 서울로 복귀를 하지 않고 목적지 근처의 숙박시설에서 숙박을 하는 만큼 큰 부담이 없다.
걷는다. 전주시내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삼남길은 전주를 벗어나 호남고속도로를 건너서 원동마을과 물고기마을을 거쳐서 혁신도시의 마지막 끝자리까지 밖으로 나간다. 잘못된 길은 아니다.
5월 초의 더위와 햇빛을 걱정하는 식구들이 햇빛 속에 걸으면 얼굴이 검게 탄다고 우리에게 크림을 주었고 한 번도 발라보지 않은 크림을 얼굴에 바르니 끈적끈적하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발라서 눈 위에까지 바르니 땀에 크림이 흘러내려서 눈이 따갑다. 무엇이든 사용법을 배우고 사용하여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였으니 어쩔 수 없다. 원동마을 입구에 상수도가 있어 얼굴을 씻어서 크림을 완전히 제거하고 걷는다.
물고기마을이다. 이 마을이 물고기 마을인 것은 알지 못하였다. 논에 연못을 파고 물이 가득 차 있으며 산소가 공급되고 있어서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민물고기를 양식하고 있는 양식장이다. 강화도 나들길을 걸을 때 새우양식장을 보았지만 민물고기 양식장은 처음 본 것이다.
민물고기 공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계장을 닭을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보면 민물고기 양어장이 좁으면 그곳은 공장이다. 대량생산을 위하여 논에 양어장을 만들고 그곳에 민물고기를 양식하거나 분배를 하고 있으니 공장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저 물고기를 맛있다고 먹어야 할까 이런 고민에 빠져든다.
이제 물고기마을을 지나 이서면으로 향한다. 이서면에는 전북혁신도시가 위치하고 있어 예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서면은 완주군의 가장 서쪽에 있고 군청과 관련된 업무를 위하 별도의 출장소를 두고 있다고 한다. 전주시로 편입시켜 행정공백을 최소화시키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으나 완주군에서 반대를 하고 있어 어려움이 지속될 것이다. 이서면에 대하여 알아보니 국내 최대 초기철기시대 유적지인 신풍 유적지가 있으며. 신풍 유적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초기철기시대 움무덤 유적지로 2009년 전주·완주 혁신도시 개발지였던 완주군 이서면 갈산리, 완주군 이서면 금평리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기원전 3세기 이후의 대규모 무덤군과 청동거울 등이 출토됐으며, 확인된 움무덤수는 70여 기로 국내 최대 규모이다. 움무덤 내부에는 좁은 놋단 검과 청동거울, 검은간토기 등 대표 부장품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서면에는 오목내 방죽이 있고 이곳이 이서면에 거주하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전주시민들에게도 즐거운 휴식처라 되고 있었다. 이곳은 원래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였으나 주변이 개발되면서 연꽃 등을 심어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호남평야가 여기다. 논산에서 지루한 맛을 경험한 우리들은 이제 이곳도 지루함을 달래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걸었다. 하지만, 아니다. 이서휴게소를 지나고 김제 IC를 지난 후 삼남길은 사람들이 주로 거주한 촌락을 지나간다. 나지막한 야산에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김제는 지평선 축제가 열리지만 우리는 그 지평선을 감상을 할 뿐 그 지평선이 보이는 곳을 걷지는 않는다. 옛사람들도 그 지평선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모악산을 모산으로 하여 3-400m 정도 되는 산들이 있다. 이산들 주변에 촌락이 형성되고 그 촌락을 지나가는 것이 삼남길이 된 것이다. 이 길을 계속 가면 태인을 들르고 정읍까지 간다.
김제평야가 있어서 그런지 수리시설이 잘되어 있다. 모내기철이 가까워서 그런지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농수로에 물이 가득하다. 이 농수로는 마을 앞길과 뒷길 논 주변을 휘들러 나간다.
금산사가 있는 원평장터 근처에서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 운동 기념비가 있어 둘러본다. 1919년 3월 20일 원평장날을 기해 거사를 하였으며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큰 태극기를 장대에 달아 들고 원평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장날 모인 수백 명의 군중들이 호응을 하였다고 한다.
인근의 금산사는 우리가 국사 공부를 하면서 후백제의 견훤왕이 아들인 신겸에 의하여 폐위되고 이곳에 유폐되었던 곳으로 배웠다. 연무대에서 견훤왕릉을 보고 왔기에 한번 가보고 싶지만 걸어서 갔다 오면 우리의 일정이 엉망이 될 것 같아 이를 뒤로 미룬다.
김제 IC에서부터 우리는 1번 국도가 다시 친구처럼 이웃한다. 좌측에 있다가 우측에 있다가 마을을 지날 때는 저만치 간다.
금산면은 김제평야의 동쪽의 모악산을 중심으로 해발고도 500∼600m 정도의 국사봉(國師峰)·상두산(象頭山) 등 산지가 서쪽으로 넓게 펼쳐져 대부분이 산악지대로서 산지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원평천(院坪川)·금산천(金山川) 주변의 평야지대에서 주곡 농업이 이루어지고, 배 등의 과수재배와 양잠·잎담배·생강·고추 재배가 활발하다고 설명되어 있다. 모악산 주변의 편마상 화강암에 함금석영맥(含金石英脈)이 많은데, 그것이 풍화되어 원평천을 따라 이동·퇴적되어 주변의 금구면·봉남면과 함께 사금(砂金)의 김제(金堤)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소규모로 채취되고 있다고 한다. 사금을 채취하기 위하여 하천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을 보지는 못하였다.
이제 태인을 거쳐서 정읍시내로 간다. 조선시대에는 태인면이 중심이었으나 호남선 철도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태인읍이 중심이 되어 있다. 태인면은 산을 끼고 있으나 신태인읍은 평야지대의 한 중심이다.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을 합쳐서 생긴 이름이다. 1409년(태종 9)에 태산(泰山)과 인의(仁義)를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이 되었고, 현의 치소를 거산역(居山驛)으로 옮겼으며, 1413년에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기차가 중심이 되었을 때에는 신태인으로 태인의 존재감이 상실되었으나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태인 IC가 건설되면서 태인도 알려지게 되었다.
태인현은 넓은 호남평야와 동쪽의 산악지역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태인동헌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이 점령한 적이 있으며 동헌 뒷산인 성황산 전투에서 패한 후 동학군을 완전히 해산했다고 한다.
조설 말의 관원이면서 의병장으로 전라도 태인에서 의거를 했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생을 마감한 최익현 선생이 생각났다. 어떻게 보면 이 시대에도 이러한 인물이 필요하다.
자료에 따르면 최익현 선생은 1906년 1월부터는 전라도 태인을 근거지로 의거를 준비하였고, 그는 의거를 함에 있어 호남의 임병찬과 함께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6년 4월 13일 태인에서 문도와 유생을 모아 강회를 하면서 유생 80여 명과 함께 창의토적소를 올림으로서 의병운동을 행동화하기에 이르렀고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군사를 모아 그 숫자가 많아졌고 군량과 병기도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한다. 최익현의 의병 활동에 대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최익현의 의진을 해산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진위대가 포를 쏘면서 대항해 와서 최익현 의진은 거의 흩어지게 되었으며 최익현의 의진 1천여 명은 거의 흩어지고 21명의 의사가 끝까지 최익현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곳에서 저항하다가 모두 체포되었는데, 최익현 일행은 대마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투쟁하다가 12월 30일 순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74세였다.
최익현 선생이 의병으로 봉기를 한 곳이 태인향교라고 한다.
태인에는 피향정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신라 헌안왕(857∼860) 때 최치원(崔致遠)이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재임 중 세웠다고 전하나 정확한 초창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피향이란, 향국(香國)을 둘로 나누었다는 의미로, 본래 이 누정의 상하에는 상연지제(上蓮池堤)와 하연지제(下蓮池堤)의 두 연지(蓮池)가 있어 여름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누정의 주위에 가득차므로, 이를 뜻하여 피향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주변이 많이 변형되어 옛 정취는 사라지고, 마치 평지 위에 누정이 건립된 것처럼 보인다. 이 건물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정자의 하나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태인의 동헌이다. 태인동헌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동헌건물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며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중종(재위 1506∼1544) 때 건립되었고, 순조 16년(1816)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이 동헌을 지은 사람은 1,000냥만으로 동헌을 지으려는 현감을 꾀어 3,000냥에 짓도록 하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태인을 벗어나는 지점에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친모인 최숙빈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고 하여 들여다보았다. "조선시대 영조의 친모이자 숙종의 후궁이었던 최숙빈이 어린 시절 태인 대각교(현 거산교) 근처에서 놀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 두 번째 왕비)의 부모가 영광군수로 발령을 받아 한양에서 남쪽으로 가는 도중 대각교 근처에서 쉬는데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가 있길래 딸과 나이도 비슷하여 몸종으로 쓰기 위해 데려다 함께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인현왕후의 아버지는 곧바로 한양으로 다시 발령이 나서 올라갔었고, 인현왕후가 어린 나이에 간택이 되어 궁궐로 들어가면서 몸종도 함께 따라 들어갔고. 그 후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계략으로 궁궐 밖으로 쫒겨났고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몸종이었던 아이는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드리던 중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숙빈이라는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라고 한다.
해당 지역의 지자체는 전설 등을 각색하여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
이제는 정읍시내로 들어가야 한다. 정읍은 대학 친구가 여기에서 학교를 나왔고 지금은 광주에 있어서 찾아볼 수 없다. 정읍시가 예전에 정주시였다. 태인을 벗어날 때 시간이 벌써 오후 6시다. 여기에서 멈출 것인지 아니면 더 갈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어두워지기 전까지 걷자로 결론을 내렸다. 기본적으로 10시간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오후 7시까지는 걷고 더 걸을 수 있으면 걷자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늘에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우리에게 우산은 있지만 비 오는 낯선 곳은 어떨지 궁금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앱에서 알려주는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동진강에 도착하였다. 만경강을 건넌 후 10시간 만에 동진강을 건너는 것이다.
동진강(東進江)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묵방산(墨方山)에서 발원하여 호남평야 남부를 서북 방향으로 흘러서 황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2016년 현재는 방조제에 막혀 호수가 된 새만금호로 흘러든다. 주운에는 별로 이용되지 못하나 호남평야, 김제평야의 관개에 큰 역할을 한다.
강이라기보다는 조그마한 하천임에도 여름철 수량이 많아서 강으로 분류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시점에서 강과 하천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으나 뚜렷하게 그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예전부터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하천이 되고 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오후 7시가 넘어서 계속 걸어야 한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정읍시내에 최대한 접근을 하여 종료하는 것이 내일의 걷는 걸이를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있다. 어둠이 짙게 깔리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계속하여 이 마을에서 저마 을로 저마을에서 이마을로 이동을 한다. 국도나 지방도를 가로지르는 지점이 오늘의 종료지점이 될 것인데 국도는 토끼굴을 통해 통과한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평택에서의 우를 우리는 또 범했다. 정읍시청 제2청사 지점에서 종료를 하여야 하였으나 약간의 욕심이 더하여 40분을 더 걸었다. 하루 동안 51km를 걸었다.
지방도와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니 이제는 거의 11시간을 걸었고 비도 계속적으로 오고 있어 종료하였다.
대중교통을 기다리기보다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정읍시내로 향하였다.
김기만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