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길 8일차(정읍에서 백양사역까지)

by 김기만

정읍사 여인을 주 테마로 부부ㆍ연인 사이의 천년사랑을 스토리텔링하여 조성한 테마형 숲길인 정읍사 오솔길이 있는 정읍에서 1박을 끝내고 바로 시작이다.

서울에서 삼남길을 가기 위하여 이동하였지만 이번은 정읍내에서 이동이다. 정읍내 숙박시설에서 새벽을 깨우고 아침을 해결한다. 어제밤에 비가 왔는데 오늘은 그쳤는지가 궁금하다. 밤에 내리든 비는 새벽에 그쳤고 아침을 하는 식당을 미리 수배하여 이른 아침을 해결하고 또 택시를 타고 어제 종료한 지점으로 이동한다. 오늘도 갔다가 온다.

우리의 길에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고장 어느 마을에 가도 그 마을의 전설이 있고 그 전설을 스토리텔링하면 그 마을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정읍시내를 가로질러 북면에서 다시 시작이다.

평지길에서 정읍의 공단을 거쳐 능선으로 길을 잡는다. 태인동헌의 뒷산도 성황산이고 정읍시 뒷산도 성황산이다. 정읍시민의 휴식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네주민들이 보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새벽에 동네산을 오르면서 배낭을 매고 있으니 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물어볻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우리들은 서울에서 왔고 삼남길을 걷고 있으며 어제 여기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부터 걷는다고 이야기 하니 등산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준다.

성황산 정상까지 아침운동을 하러 온 사람들이 바쁘게 걷기도 하고 천천히 걷기도 하는 사람들이 몇몇있다. 성황산 정상에서 이제 정읍시청방향으로 하산한다. 하산하는 길은 도시근교 등산로의 일발적인 형태와 동일하게 등산로가 여기저기 갈래를 이루고 있다. 이정표를 잘 따라가야 한다고 이야기 한 동네주민들의 의견을 참조하면서 정읍시청으로 내려온다. 정읍시청쪽으로 내려오자마자 충열사가 있고 정읍충혼탑이 우리를 기다릳다.

충열사는 이순신 장군이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1591년 전라좌수사로 이임했는데, 그가 이곳 현감으로 있을 때의 덕을 추모하고 그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공의 탄신일인 4월 28일에 매년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이라고 한다. 충열사는 1689년(숙종 15)에 창건하여 충무공의 제향을 올렸으나 1857년(철종 8)에 철폐되었다가 충렬사 본종회를 구성하여 도민 성금을 모아 중건을 착공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63년 4월에 착공하여 월전 장우성 화백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충무공원이라고 한다. 공원 안에는 충렬사, 정읍정악원, 정읍국악원, 충혼탑, 정읍을 빛낸 선열들의 묘가 있다.

정읍은 학교시절 배운 백제노래인 정읍사의 고향이다. 정읍사를 기념하기 공원이 있고 동 공원은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를 주제로 조성된 공원으로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정읍사 망부상과 정읍사 노래비, 정읍사 여인의 제례를 지내는 사우 등이 건립되어 있다고 한다.

정읍사의 내용을 보면

정읍사(井邑詞)


(前 腔)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小 葉) 아으 다롱디리
(後腔全)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대를 디디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過 編) 어느이다 노코시라.
(金善調) 어긔야 내 가논 대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小 葉) 아으 다롱디리


이제 천원사거리를 거쳐 입안으로 간 후 길재를 넘어 백양사로 가면된다. 우리가 어제 걸은 길이 무려 51km였고 오늘은 30km내외만 걸으면 되기 때문에 여유가 있다. 하지만, 다리는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51km를 걸은 휴유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km을 걷고 나니 내 다리가 오늘은 많이 못 걸어요 한다. 아직은 15km가 남았 있는데 하면서 산길을 넘어간다.

천원역은 거의 폐역이 되어 있고 내장산 IC를 넘어 입안에 도착하였다. 입암은 이번 삼남길을 걸으면서 새로 발견한 도시다.

임안은 호남선 철도가 통과하며 천원역노령역이 개설되어 있다. 또한 호남고속도로 내장산IC가 설치되어 있다. 한때 증산교 계열의 종교였던 보천교의 근거지였다. 호남고속도로를 지나면 보이는 입암저수지가 있다. 입암에 면직물공장이 즐비하다. 전국에 대규모 공장이 아닌 중소기업공단으로 이렇게 면직물공단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노령역은 이제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무궁화호가 하루 1-2번 정도 정차하는 역이 되어 있다.

암이라는 지명은 산위에 있는 돌때문이며 전국에 입암이라는 지명이 영양, 계룡에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일한 특징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산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있다. 패러글라이딩의 명소도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내장산 이웃에 있으면서 패러글라이딩을 위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 온다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는 보지 못하였지만 이날 뉴스를 보니 이곳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든 중학생이 송전탑에 걸려서 3시간만에 구조되었다고 한다.


갈재길이다. 갈재는 해발 276m로 예로부터 노령산맥을 가로질러 호남평야와 전남평야 곡창지대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고, 지금도 국도 1호선, 호남고속도로, 호남선 철도, 고속철도가 관통하고 있다. 과거를 치르기 위해 한양을 오르내리는 선비들, 임지로 부임하거나 퇴임하는 방백수령들 또는 남부지방으로 유배를 떠나는 사람들로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원래 갈재는 노령 또는 위령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갈대를 의미한답니다. 한마디로 이곳에 예전부터 갈대가 많아서 갈재로 불렸다는것을 짐작케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철도가 놓이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고속도로가 뚫리는 등 근대 한국의 역사를 담고 있다. 구 호남선이 폐선되면서 이제는 일제강점기의 폐철로, 폐 터널, 굴다리 등이 남아 그 시대의 역사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백양사역까지는 10km정도 남았고 시간도 여유가 있다. 일찍 시작한 보람이라고 할 수 있다. 편의점 의자에 않아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면서 여유를 찾고 입암저수지를 경유하여 갈재로 향하였다. 입암저수지는 조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며 1986~1987년 3면의 제방을 증축하였다. 수면적은 23만 1,400㎡, 수심은 1.5~2.5m의 평지형 저수지이다. 노령산맥의 깊은 계곡이라 수원이 맑고 어자원이 풍부하여 민물낚시 인파가 많이 찾는다.


입암저수지를 지나면 군령마을이다.

수백년 묶은 당산나무가 마을을 지키는 군령 마을이다. 갈재초입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산적이 갈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 이를 제압하고 갈재를 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마을끝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돌을 깍아 쌓아올린 아치형의 굴다리가 남아있어 마을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갈재를 지나다보면 옛철길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설치되어 1987년까지 사용되다가 지금은 철로와 침목 등이 모두 철거되고 경치 좋은 길로 순꼽히는 호남선 옛철길이다. 폐철로가 놓여있던 수려한 곡선길이 주위의 가로수들과 함께 아름다운 탐방로를 만들어주고 있다.

당시에 건설하였고 운영하였던 터널 2개도 개방되어 운영중이었으며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었지만, 오늘은 개발이 되지 않아 입구만 보았다.

갈재는 추풍령, 쌍령, 죽령, 이화령, 대관령 등에 비교하면 그렇게 험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입장에서 보면 나지막한 야산들이 즐비한 곳에서 500m의 준령이 있고 270m의 재는 험준한 것이다. 첩첩산중인 것이다. 상대적 평가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갈재정상이다. 이재 백양사역까지 5.56km남았다.

갈재를 넘어가는데 시 한편이 있어 적어 본다

장성 갈재 넘으면(최일환)

종착역을 아직 묻지 않아도

장성 갈재 넘으면

긴긴 여향은 끝나는 것 같다.

쫓겨 온 듯 지난 길을

이제 비로소 되돌아보며

죄 있어 잡혀도 안심인 듯

행여 잘못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리

뭘하고 오느냐고 묻지 않아도

장성 갈재 넘으면

지난 것은 모두 잊어버린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껑충 뀌어

어머님 품인 듯 내리고 싶은 곳

어딘들 사립물들이 열려 있어서

된장국 냄새 확 코를 찌른다.


갈재를 넘어 장성으로 오면서 샘터가 있었다. 이곳에도 숙빈최씨에 대한 전설이 있다. 태인에서도 숙빈최씨에 대한 설화가 있는데 이곳도 있다.

그 옛날 길객들의 메말랐던 목을 축여 주었을 옹달샘 조선 숙종때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숙비최씨가 어린시절 스님이 살길이라 알려준 곳이 장성갈재 샘터라고 한다. 스님의 말을 듣고 장성갈재 샘터로 와서 샘터에 앉아 있는데 나주목사로 부임하던 민돈중의 눈에 띄어 한양까지 가게되고 그 후 인현왕후와 함께 궁으로 들어간 후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이다.


장성방향으로 내려오면서 갈재에는 편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편백나무 향이 진동한다.

재를 넘어 백양사역으로 이동하는 경로에 갈애바위얘기가 있다. 여기에 대한 전설도 재미있어 옮겨본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여년 전 장성땅 목란마을 갈재고개 아래에 주막집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 주막에서 묵어갔다.

어느날 주모는 태몽을 꾼다. 오색영롱한 구름이 가래바위를 애워싸더니 바위틈에서 어여쁜 처녀가 나오는 것이었다. 처녀는 부인에게 다가와 넙죽 절을 하며 “저는 가래바위의 정기를 받아 부인의 몸을 빌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하더란다. 이 후 주모는 꿈에 본 처녀와 똑같은 아기를 낳고 가래라 이름 지었다.

가래는 커갈수록 아름다움이 더해갔고, 시와 가무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그러자 주막에 들른 선비들이 가래의 미모에 반해 며칠씩 묵어가기도 하고, 과거도 잊은채 떠날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전라도 관찰사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도중에 목란을 지나다가 가래라는 처녀에게 반해 허송세월을 하는 자가 많아 피해가 막심하다’는 상소를 올리자 왕은 그냥 두었다가는 인재가 모두 절단 나겠다며 가래를 없애라고 장수를 보내나 명을 받은 장수조차 가래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겨 주저앉고 만다.

왕은 크게 노하여 선전관에게 친히 어룡도를 내리며 모두를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목란으로 내려온 선전관은 장수의 목을 치고 다시 가래를 내리쳤다. 순간 괴이한 바람소리와 하늘에서 여인의 통곡이 들려오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에 선전관은 때늦은 후회를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 가래는 얼굴에 칼을 맞아 눈이 일그러진 채 죽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산봉우리의 바위가 한쪽이 일그러진 사람얼굴 모습으로 변했고 마을사람들은 가래의 억울한 혼이 바위에 스몄다며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원덕리의 미륵불은 이 갈애와 총각의 애뜻한 사랑이야기로 연결된다.

갈애바위 전설에 나오는 갈애와 마을총각이 사랑에 빠져 있는데, 전설에 나오는 바와 같이 선전관에 의하여 갈애가 죽으면서 바위가 되었고 총각은 혼자만의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산 능선 바위에 올라 갈애의 얼굴을 새긴다. 그러나 바위 절벽이 워낙 가팔라 두 눈을 완성하지 못하고 한쪽 눈만 새긴 채 넋을 잃고 벼랑에 추락하고 만다. 이를 애틋이 여긴 마을 사람들이 총각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갈애바위 근처에 석불입상을 세워 영원히 같이 있도록 해주었다고 전한다. 그 석불이 바로 원덕리 미륵석불이다.


백양사역으로 이동하면서 호남고속도로 개선작업을 하면서 폐도로가 된 옛도로를 걷다보니 어느집으로 들어간다. 이상하게 쳐다본다. 주변은 온통 논과 밭이다. 그 사이로 호남선 철로가 지나고 바로 맞은편엔 호남고속도로도 지난다. 또 그 옆엔 국도 1호선이 있고, 지금은 폐로가 된 구 호남고속도로도 방치돼 있는 것이다. 마을주민들이 폐로를 이용하여 농작물을 말리고 있는 것이다.


백양사역으로 가기 전 개울을 건너면서 갈재를 넘어 온 땀을 씻는다 등산화도 벗고 발을 담그고 머리도 감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서울로 가면서 남들에게 땀냄새로 인한 민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다.


백양사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넉넉하다. 서울로 가는 기차가 아니라 익산역까지 간 후 익산역에서 KTX로 갈아 탈 것이다. 1박2일 동안 80km를 걸었다. 장성군 북이면은 백양사IC와 백양사역이 있다.

무궁화 열차를 타고 익산역으로 이동하면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찾아본다. 노령역을 지날때 입암면의 정경을 보고 정읍역, 신태인역 등을 보면서 호남평야와 모악산 주변에 대한 추억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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