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길 10일 차(광주 송산유원지에서 영암 석산 삼거리

by 김기만

'장화왕후'로 많이 나온다.

이제 전남에서 2일 차다.

오늘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시작하여 전남 영암까지 갈 것이다.

나주를 거쳐서 좀 더 멀리 내려간다.

송산유원지에서 다시 출발을 한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송정역으로 KTX를 이동한 후 송정역에서 송산유원지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한다. 송산유원지는 아침 일찍 오는 사람은 드물다. 유원지를 가는 사람이 등산배낭을 메고 있어서 쳐다본다. 백양산과 두륜산을 등산한 기억이 있고 나주 혁신도시를 방문한 기억이 있지만 나주, 영암, 해남, 강진 등을 방문한 기억이 없어서 오늘은 사뭇 기대가 된다.

광주의 송산유원지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에 위치한 유원지로, 오랜 세월 동안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던 황룡강(黃龍江)의 섬을 유원지로 조성하였고. 섬을 빙 둘러 나 있는 산책로가 있고 산책로를 따라 우리 꽃화원·나리원·허브원·무궁화원·야생화원, 잔디 객석을 갖춘 야외 공연장, 배구·족구장, 수변카페, 보트 계류시설 등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저 송산유원지가 있고 물놀이 하는 것을 주로 보았다.

광주 광산구에서 평동저수지를 거쳐서 서광산 IC를 경유하여 나주로 들어간다. 평동저수지 주변 물가의 갈대들이 노래하는 것 같으며, 물결이 살며시 친다. 평동저수지의 갈대에 감흥이 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진에 담는다.

호남선 철도를 벗어나 먼 거리에 있었는데 어느새 호남선 철도가 옆으로 와 있다. 철도를 옆으로 끼고 걷는다. 1번 국도는 광주로 들어간 이후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호남선 철도를 건너 폐역이 된 노안역을 지나 영산강변에 도착하였다.

나주는 백제시대에 개라부(發羅部)라 칭(稱)하고 신라에서는 금성부[錦城部, 일명 금산군(錦山郡)]이라 하였다. 신라 진성왕 때 견훤이 기병(起兵)하여 백제를 회수(回收) 통괄(統括)하여 고려 성종 14년(995)에 이르러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郡)이라 칭하여 해양도(海陽道)에 속하였으며 고려 현종 9년(1007)에

주(州)를 두어 나주(羅州)라 칭하면서 목사(牧使)를 두었으며,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나주는 고려 태조의 '장화왕후' 오 씨의 고향이고 서남해안 도시 중 최초로 고려에 복속된 도시여서 견훤이 처음 후백제의 터전으로 삼은 무진주(현재 광주)에 비하여 우대를 받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고려의 후대 왕들도 태조가 중요시하였던 도시를 홀대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산강변을 떠나 이제는 나주시내로 들어간다. 나주에 처음 도착하여 접한 것이 나주 청암역(터)이다. 이곳 청동마을은 과거 봉수와 더불어 우체통신의 기능 즉 공문서의 중계 전담, 공무수행자에게 말 제고, 물자 수송 등의 업무를 담당했던 청암역이 있어 던 곳으로 고려 성종 연간(982-997)에 22도역 525역으로 정비되면서 나주 청암역은 승나주도의 29개의 속역을 관할하는 중심역(찰방역)으로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전라우도 청암도의 10개의 속역을 관할하는 청암도역(찰방 종 6품)으로 유지되다가, 1896년 근대적인 체신 제도 도입으로 폐지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당시에 쓰던 우물 2개소와 말구유가 남아 있다고 한다.

암행어사 출두 할 때 나온 나졸들은 이 역에 있던 나졸이다. 해당 고을의 나졸이나 이웃고을의 나졸은 인지상정 등에 따라 비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으므로 역 등에 소속된 나졸들은 병조에 소속되어 있어 지방이 아닌 중앙기관 소속이어서 비밀이 누설될 우려가 없기 때문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호제를 지나 동신대학교를 정문을 거쳐 정렬사에 도착하였다.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에 있는 사당.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그의 아들 상건(象乾, 1557~1593), 양산숙(梁山璹, 1561~1593), 임회(林檜, 1562~1624), 이용재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606년 (선조 39) 현 나주고등학교 뒤편 월정봉 아래(교동)에 창건하였으며 1607년 정렬사로 사액되면서 사우를 나주 읍내(현 나주잠사공장터) 부근으로 옮겼으나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84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고 한다.

정렬사 사당 옆에 김천일 장군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정렬사를 들려서 김천일 장군의 영령에 참배를 하고 이웃한 금성산의 둘레길을 돌아 한수제에 이른다.

나주의 진산(鎭山)인 금성산의 높이는 451m이며,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봉우리는 노적봉(露積峰), 서쪽 봉우리는 오도봉(悟道峰), 남쪽은 다복봉(多福峰), 북쪽은 정녕봉(定寧峰)이라 불리운다. 또한 금성산에는 금성산성이 있어 군사요새 기능도 하였던 곳인데, 올라가 보지는 못하였다. 둘레길로 걷는데 올라가 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흙이 우리를 유혹하였다.

나주에는 이러한 저수지가 많은 것 같다. 한수제의 멋진 풍광을 한번 담아 본다.

한수제는 금성산 자락 골짜기에 담수되어 있는 저수지로서 금성산 아래 경현리와 성안을 이어주던 길목인 한수제 일대는 크고 넓적한 바위가 많아 예로부터 나주 시민들이 시원한 금성산 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던 놀이터의 역할을 하였고. 등산로 입구 우측으로 벚꽃길이 조성되어 있어 봄이면 화려한 벚꽃을 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과거의 나주와 현재의 나주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이동한다. 과거의 나주는 금성관 주변이며, 현재는 나주 시청 주변이다. 금성관은 그 규모나 명성, 나주 고을 한복판이라는 입지조건, 그리고 주변에 나주곰탕이라는 먹거리 집이 있어 관광객들에게는 ‘나주 답사 1번지’로 손색이 없다. 때문에 나주를 안내하는 해설사들도 방문객들을 늘 금성관으로 먼저 안내한다고 한다. 금성관은 나주목에 있는 객사이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를 말한다. 객사 건물 뒷마당으로 돌아가 보면 수령이 600년이나 되는 우람한 은행나무가 무성한 잎을 피어 올리고 있다. 금성관은 근대에는 또 나주인 들의 항일정신을 대표하는 장소로 대표된다.

금성관은 일제 강점기에 창호·마루 등 내부를 개조하여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크게 변형되었다가 1976~1977년까지 금성관을 정말 해체한 뒤 거의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는 작업이 이뤄졌다고 한다.

현재의 나주로 이동한다.

나주시청 주변을 중심으로 신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나주는 영산포읍과 나주읍이 합쳐서 형성된 도시인만큼 나주시를 지나면서 아직 형성되지 못한 도시의 형태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영산포로 이동을 하여야 한다.

나주는 도시계획을 보다 잘 하여야 할 것이라고 본다. 나주, 영산포 그리고 혁신도시가 도심을 이루고 있다. 혁신도시는 신도시로 역할을 하고 나주와 영산포는 그 나름의 상징성을 갖고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주시장은 머리가 복잡할 것이라고 본다.

영산포를 넘어가기 전에 이곳엔 후삼국 시대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왕건 장군이 나주로 내려와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할 당시 상스러운 기운이 돌고 있는 샘가에서 후에 고려 2 대 왕의 어머니이자 태조 왕건의 부인이 되는 나주 오 씨 오다련의 딸인 오 씨 부인(莊和王后) 과의 첫 만남의 장소인 완사천(浣紗泉)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끊임없이 마르지 않고 샘솟고 있는데 오씨 부인이 왕건에게 물을 뜬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어 공손히 바치는 장면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는 곳을 지난다.

영산강을 건넌다. 영산교를 지나서 영산포에 도착하는 것이다. 영산강은 국토의 서남부를 적시는 우리나라 5대 강의 하나로, 길이는 115.5킬로미터로 5대 강 중 가장 짧아 낙동강의 5분의 1 정도이다. 남도의 넉넉한 들판을 흘러온 물길은 수량이 풍족해서 무안쯤에 오면 한강이나 낙동강 못지않은 큰 강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나주에서는 그렇게 수량이 많지 않지만 2020년에는 물을 보에 채우지 않지만 2016년에는 보에 물이 가득하여 제법 넓은 강을 이루고 있었고 황포 돛 대배도 운영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때부터 조창이 설치되어 전라도의 전세 등 여기로 모아서 배로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철도교통과 도로의 건설에 의한 교통의 발달과 토사 퇴적의 증가는 영산포의 하항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하였다. 나주시에만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산포에도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다. 이를 적절히 이용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시외버스가 영산포 터미널에 정차할 경우 영산포 터미널을 이용하면 나주역에 접근하는 것이 나주터미널을 이용하는 것 보다 접근성이 좋았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보면 영산포까지 군함을 타고 올라와서 주민들을 위로한 것이 보이는 만큼 과거에는 수운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영산포에 남도 주민들이 좋아하는 홍어 관련 가공시설들이 즐비한 것을 보면 서남해안에서 잡은 홍어를 영산포로 배를 이용하여 운송하여 가공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산포에는 내륙에 등대가 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내륙 등대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5년에 설치된 영산포 등대는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8킬로미터의 영산강 뱃길을 타고 수산물과 곡물을 실은 선박을 안내했다고 한다.

이제 동창 터미널까지 만복천을 끼고 걷는다. 만복천을 걷는 길 11km를 130분 만에 걸었다. 그런데, 그늘이 하나도 없다. 5월 말 햇빛은 우리에게 방어선이 없이 공격하였다. 그늘이 없는 상태에서 반팔셔츠을 입고 걸은 우리 팔은 검게 그을렸다. 제방길에 나무는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여름처럼 무성하게 자라지 않은 결과다. 제방에서 바라다 본 나주평야는 한창 보리 수확을 하고 있고 보리수확이 끝난 논에는 벼농사를 위한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만복천을 끼고 걸으면서 만복천을 가로지르는 1번 국도 아래에서 작별을 한다. 우리는 이제 강진 해남으로 간다. 너는 이제 무안을 거쳐 목포로 잘 가라 인사를 한다.

동창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고 아직 낮은 길다. 그래서 더 걸었다. 1시간을 더 걸었다. 영암군 금정면 석산 삼거리까지 걸었다.

하지만, 빠져나오기 위한 대중교통은 정류장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농사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사람이 있어 우리를 반기면서 물어본다. 어디에서 왔냐고 우리는 서울에서 왔고 오늘 광주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왔고 이제 버스를 기다린다고 하니, 이 분이 자기는 오늘 광주에 모임이 있어 가는데 우리를 나주까지 때워주시겠다고 한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농촌 인심이 이렇게 좋은 것이다.

친구는 이 분이 너무 고마워 막걸리 값을 드린다.


나주역에 도착하니 아직 서울로 가는 기차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 우리가 농부의 도움을 받아 너무 빨리 도착한 것이다. 익산역까지 무궁화열차를 타고 익산역에서 KTX로 갈아타기로 하였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그렇게 빨리 돌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중에 서울까지 가면 되고 대중교통이 중단되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면 된다.

나주역 주변은 승용차로 포위되어 있다. 이 승용차는 나주 혁신도시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주말을 이용하여 서울로 가면서 주차장이 부족하니 도로 양옆을 가득 메워 나주역은 승용차로 포위된 것이다. 혁신도시에 이주하지 않고 주말은 가족이 있는 수도권으로 간 것이다.


익산역에 도착하니 KTX가 도착하기 전까지 여유가 있다.

익산역은 예전 이리역이다. 우리 어릴적 이리역에서 폭발사고 발생한 사실이 있고 그 생생한 현장의 사진과 익산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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