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길 12일 차(다산선생과 영랑선생을 뵙다)

by 김기만

어제의 악전고투를 익히 알고 있지만 오늘은 즐거운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잠을 깬다. 잠은 악전고투를 잊고 새로운 날을 준비하기 위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선물이다. 이 선물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고통이 따른다.


강진에서 2일 차다. 강진이라는 도시를 잘 알지 못하고 단지, 청자와 다산 선생이 우리의 뇌에 있다. 청자는 우리가 어제 강진읍으로 들어오면서 산에서 그 모양을 보았다.


어제 우리가 종료한 지점으로 이동하기 위하여는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만 오늘도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일어나 움직인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하나 더 잡는다 하고 하였다. 하지만 일찍 일어나 돌아다는 새가 독수리나 매의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

금당 백련지는 강진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금당마을의 연목으로 백련이 피며 동백나무와 소나무, 오죽이 어우러진 정자는 풍요로우며 한가했던 남도 사람들의 삶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고 하였다. 금당마을을 지나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산길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집 앞으로 쑥 들어가서 민망하기도 하였다. 새벽에 남의 집 안마당까지 들어갔으니 더욱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금당마을을 지나 산을 타고 강진읍으로 이동한다. 다산선생 유배길도 똑같다. 다산선생도 이 길을 걸어서 강진을 들어갔다고 안내가 돼 있다. 다산 선생의 유배길은 65,7km이며 오늘 걷는 길은 시인의 마을 길,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이다. 주작산을 왜 다산 유배길인지 모르겠다.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강진의 둘레길을 만들면서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것 같다.

강진군에서 다산선생 유배길이라고 안내를 하고 있고 이정표는 길은 정비가 되지 않아 삼남길을 걸으면서 산속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어버렸다. 이정표도 어디쯤에서 사라지고 전날 비와 아침이슬로 인하여 걸을 때마다 신발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고 신발 속에 내발은 냇가를 지나냐고 물어보고 있다. 고사리밭을 지나는데 새벽에 밭을 나온 사람에게 길을 물어본 죄이다. 이분이 산행길이나 삼남길을 알지 못하는데 그분이 이야기 한 길을 걸은 죄이다.

1시간 산속을 헤매고 산 정상을 거쳐 능선을 따라 등산로이지 삼남길을 찾았다.

따뜻하고 신발을 벗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신발을 떨고 젖은 양말은 벗어 배낭에 걸고 전날 신은 양말로 대체한다. 전날 신은 양말이지만 젖은 양말에 비하여 양반이다. 젖은 양말은 걷다 보면 마르겠으나 적은 신발은 언제쯤 뽀송뽀송 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치고개를 지나서 고성사를 지난다. 특별히 감흥은 없다. 하지만 이곳에 보은산방이 있다. 보은산방은 다산선생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공부한 곳이라 의미가 있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는데, 처음에는 주막집에서 기거하였고 승려 혜장(慧藏)을 알게 되면서부터 고성시와 인연을 맺었고 다산은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큰아들 학연(學淵)과 함께 학문 활동을 하며 약 1년간 거주하였다고 한다.

다산이 처음 머물렀던 주막집 쪽방 ‘사의재(四宜齋)’라고 한다. 유명인이 유배를 와서 머물렀던 곳이 주막집 쪽방이지만 이름이 남겨진 것이다.

다산이 산위에 올라 자신을 돌아 보면 쓴 글이다.


九日登報恩山絶頂 在康津縣北五里 望牛耳島

(구일등보은산절정 재강진현북오리 망우이도(다산, 정약용))


나주와 강진이 바닷길 이백리인데

험준한 두 이안 하늘이 만들었던가

삼년을 묵으면서 풍토를 익히고도

자산이 여기 또 있는 것은 내 몰랐네

사람 눈은 그 힘이 멀리 보지 못하여

백 보 밖의 얼굴도 분간을 못하는데

더구나 탁주 같은 안개구름 껴있으며

눈앞의 섬들도 자세히 보기 어려움에랴

먼먼곳을 실컷 본들 무슨 소용 있을 건가

괴로운 마음 쓰라린 속을 남들은 모른다네

꿈속에나 서로 보고 안개 속을 바라보다

눈 물 커지고 눔물 말라 천지가 깜깜하다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유배를 가면 본인들이 돈이 있으면 그곳에서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돈이 없는 사람의 경우 그곳의 유력인사 들이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는 등 의식주를 해결해 주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사람이 한양에 복귀를 하면 그 사람의 영향력에 의하여 무엇인가 특혜를 바라고 이를 하였을 것이다. 다산선생과 같이 학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경우에는 제자가 되어 스승으로 모시고 스승의 삶을 책임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보은산을 내려오면 이제 영랑생가다.

영랑생가는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1903∼1950)이 살았던 집이다. 김윤식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등의 시로 잘 알려진 인물. 영랑생가는 안채, 문간채, 사랑채 그리고 꽤 넓은 뜰까지 갖춘 전통 가옥이다.

시인의 가옥에 들어가면 시비가 여러 개 있다. 그래도 이곳저곳에 있는 시비를 사진에 담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모란이 피기까지를 담아보았다.

강진군청에서 이곳을 사들여 관리하였기 때문에 원형을 보존한 결과 우물,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는 등 시의 소재가 그대로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남길을 다니면서 만난 시인은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이 유일하다. 시인의 생가를 보존한 지자체에 감사를 할 뿐이다. 우리의 감흥을 그대로 유지하고 문화인으로서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보존되기를 바란다.


강진 시내를 지나 이제는 강진만 생태공원으로 흐르는 강진천을 따라간다. 강진천 주변에 임자 없는 땅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 자투리 땅에 농사를 짓고 있다. 그곳을 돌아 돌아 걷는다. 강진천을 건너 강진만 옆의 넓은 들에서 농사가 한창이다. 3월 마지막 주에 남태령에서 삼남길을 시작할 때에는 옷도 바람막이 자겠을 입었으나 이제는 반팔이고 농촌에는 아직 농사 준비도 시작하지 않았고 논농사를 위하여 준비가 시작단계였는데 이제 6월 초에 농사가 한창이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향하여 걷다가 마을 경로당 앞에서 아침부터 배낭에 걸고 온 양말이 말라서 갈아 신는다. 신발도 이제 제법 뽀송뽀송해졌다. 백련사를 올라가기 위하여 마을에서 산길을 걷는데 동네 할머니들이 힘들게 산길로 백련사를 가느냐고 묻는다.

백련사에 도착하여 산사의 밥을 축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친구는 못내 아쉬워한다. 내가 절밥 등에 대하여 그렇게 호감을 갖지 못한 것에 있는 것에 기인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상갓집에 가서 밥을 먹지 않았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상갓집이 생기면 동네 사람 모두가 그 집에서 일을 도와주고 삼시 세 끼를 그 집에서 해결하였으나 내가 가지 않으니 모친이 항상 집에 와서 밥을 챙겨 주셨다. 참 번거롭게도 했다. 아직 그 습성이 있어서 친구들이 번거롭다.


백련사는 혜장선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이웃한 다산초당의 다산과 교류한 것으로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도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길에 많은 이들이 오고 간다. 산길이 반들반들하고 다산초당을 온 사람들이 백련사로 올라가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백련사 주변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동백나무와 함께 비자나무, 후박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 아래에는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오래된 동백나무가 백련사 입구를 지키고 있다.

이제 다산초당이다. 강진으로 귀양 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원래 작은 초가집이었고 허물어진 것을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集字) 한 것이다. 방에는 정약용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다산초당 옆에 연못이 있고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는 이름이 있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고.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고 한다.

뿌리의 길( 시인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다산초당을 내려오면 다산기념관이 있는데 기념관을 볼 여유를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기념관을 뒤에 두고 덕룡산, 주작산을 볼 수 있는 도암면으로 걷는다. 우리가 이제는 끝을 내고 서울로 복귀하여야 하는 장소를 확정하여야 한다. 어디로 할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주작산 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시내버스를 탑승할 수 있을 것 같고 16시까지는 걸어야 될 것 같아 도암천 다리 위에서 일정을 종료하였다. 여기에서 더 걸으면 대중교통이 근접하기보다는 들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3-4시간을 걸어야 될 것이며 국도나 지방도를 만나지 못하고 농로 한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종료되는 지점에서 주작산을 바라보니 월출산이나 진배없다. 저 산을 한 번쯤 걸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암천 다리 위에서 주작산 휴양림 입구까지 30분을 걸었다.


이제 강진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강진-나주 간 시외버스를 타고 나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야 한다. 익산까지는 무궁화 익산에서 KTX로 환승을 한다. 돈이 문제다. 시간은 그래도 우리의 지친 몸을 기차에서 추수르면서 가면 되니까? 익산역에서 늦은 저녁을 먹어도 되니 그렇게 이용을 한다.

강진 시내에 도착하니 나주로 가는 버스가 80분 후에 있다.

오늘 하루 끼니를 여기에서 해결한다. 친구가 절밥을 먹자고 할 때 먹었으면 했지만 나는 그것이 어렵다.

나주터미널에서 나주역으로 직접 오는 시내버스는 없어 근처의 정류장에 내려서 걷는다. 10분 정도 걸었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걷는다. 이것이 우리들이 삼남길을 걷는 원칙이다.


이제 강진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2일만 더 걸으면 우리의 삼남길은 완성이 될 것이다.

언제쯤 날을 잡아서 1박 2일 하여야 한다. 토요일만 걷고 연휴가 있을 경우 1박 2일 원칙이 연휴가 없어도 이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끝내기로 부하 뇌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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