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이면 두 번의 차례와 세 번의 제사를 모신다. 그때마다 한 시간 이상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 과일이 밤이다. 우리가 쉽게 전하는 과일 중 밤처럼 손이 많이 가야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드물다. 대추와 딸기는 씻어, 그냥 먹으면 된다. 사과, 배, 감도 씻어 그냥 먹어도 되지만, 깎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밤은 그냥 먹을 수가 없다.
단단한 겉껍질을 칼로 힘들여 깎아 낸다. 요즈음은 명절에 대형마트에서 알밤을 사서 원하면 겉껍질은 기계로 제거해 주지만, 시골에서 가져온 밤은 직접 까야만 한다. 떫은 속껍질을 바로 까기도 쉽지 않다.
몇 시간쯤 물에 담가 놨다가 부드러워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깎는 것도 각을 잡아야 한다. 그릇에 올려놓으면 보기가 좋으면서 굴러 다지지 않게 말이다. 경자년 추석 차례 준비로 밤을 까고 치며 자기보호 본능과 자존감이 큰 밤나무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밤나무 /공유마당
어릴 적 시골에서 가장 흔하게 접했던 나무가 감나무, 대추나무와 함께 밤나무다. 대추나무는 마당 근처, 감나무는 밭 근처, 밤나무는 야트막한 야산에 주로 있었다.
그 시절에 있었던 그 나무들은 아니지만, 지금도 시골에서 수확한 감, 대추, 밤을 먹는다. 집 주변에 있는 대추·감나무와는 달리 좀 멀리 떨어져 지내는 밤나무는 1년에 두 번밖에 관심을 받지 못한다.
밤꽃이 필 무렵과 밤이 익어갈 무렵. 밤꽃이 필 무렵에는 벌로부터, 밤이 익을 무렵은 인간으로부터다. 두 번의 관심에 굴하지 않고 밤나무는 우리 인간과 함께 100세 시대를 함께하고 있다.
자존감이 강한 밤나무는 자식 사랑도 지극정성이다. 대부분의 종자식물은 새싹이 틀 때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온다. 밤나무는 그 반대다.
뿌리와 줄기가 올라가는 땅 부근에 오래도록 달려서 어린 밤나무가 자라도록 오랫동안 자양분이 되어준다. 이는 다른 나무 열매와 달리 껍질 속 알맹이 자체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나무는 가시 밤송이 속에 단단한 겉껍질에다 떫은 속껍질로 단단히 이중삼중으로 자식을 보호하고 있다. 어떤 생명체나 종족 번식을 위해서는 최상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밤나무도 번식에 필요한 특별한 보호장치가 필요했다.
밤꽃, 공유마당
밤나무는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다. 밤꽃이다. 여유의 상징 밤꽃은 느긋하게 가장 늦은 봄에 꽃을 피운다. 마치 하얗게 염색한 흑인의 레게머리처럼 실을 꼬아 놓은 듯한 가지런한 꽃대가 멀리에서 보면 아름답다.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나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꽃냄새(향기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만으로도‘밤꽃이 피었구나’ ‘6월이구나’를 알 수 있다.
밤꽃은 아카시아꽃 다음으로 가는 중요한 밀원식물이기도 하다. 보기에는 탁해 보여도 밤꿀에는 페놀과 플라보노이드 같은 항산화·항균물질이 아카시아꿀보다 10배 많이 들어 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꿀 중 항산화 효과가 가장 뛰어나다.
알밤, 공유마당
알밤도 알차게 활용된다. 밤은 많은 영양소를 함유해 식량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구황 식량 역할을 했다. 어릴 적 소풍 갈 때, 삶은 계란과 함께 단골 메뉴였다. 밤은 탄수화물 단백질, 칼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어 인체발육에 도움이 되며, 비타민 B1은 쌀의 4배, 비타민C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나무 열매(과실) 중 가장 많이 들어 있다.
널리 활용되지는 않지만, 잎 또한 기능성 화장품 원료로 활용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밤나무 잎 추출물에는 항산화 및 항노화 효소 활성을 갖는 천연원료로 미백과 주름 개선에 활용될 수 있다 (생명과학학회지 제23권 제6호/2013.06, 대한화장품학회지 제35권 4호/2009년).
관혼상제는 물론이고 군밤, 찐 밤, 생 률, 맛 밤 등 남녀노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부담 없는 기호식품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밤 생산량은 5만 3,384톤으로 중국(196만 5,351톤)·터기(6만 3,580톤)에 이어 세 번째다.
공유마당
밤송이와 밤나무도 버릴 것이 없다. 지금이야 안 그렇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에는 난방과 취사를 위해 아궁이가 대부분 있었다. 미래 해다 놓은 나무가 없으면, 마른 밤나무잎과 마른 밤송이도 훌륭한 땔감이다.
밤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아 신주, 위패, 제사상을 대부분 밤나무로 만들었다. 밤나무 가지는 윷가락으로 많이 활용됐었다. 밤나무 가지는 변재(통나무의 겉 부분)와 심재(나무줄기의 중심부에 있는 단단한 부분)가 확연히 구분되고 무게감과 경쾌한 소리로 윷가락으로 사랑을 받았다.
꽃이면 꽃대로, 열매는 열매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우리에게 모두 주는 밤나무. 어찌 자존감이 강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너도나도 밤나무라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 식물 이름에는 ‘너도’ ‘나도’라는 접두사가 흔하다. 비교 대상 식물과 형질 등이 비교적 가까우면 ‘너도’가 붙고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식물이면 ‘나도’가 붙는다.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는 열매는 다르지만, 맛이 밤과 비슷하고 잎 모양도 밤나무와 가까워 붙여졌다. 반면 ‘나도밤나무’는 독성이 있는 열매 모양이 밤과 비슷한 것 빼고는 밤나무와 닮은 데라고는 없다. 분류를 달리한다. 천안시 가로수에 많이 있는 마로니에가 나도밤나뭇과의 대표 수종이다. 이름이 붙여진 데는 여러 설이 있다.
밤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면서 밤나무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탄생부터 고사까지 오롯이 인간과 동물에게 모두 주고 가는 밤나무. 까고 먹을 때만이라도 그 자존감에 경의를 표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