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모멘토, 2024)
앞 책날개에서 안정효 소설가는 "중학생 때부터 그려온 만화를 포기하고 영문학과로 진학한 1961년 이후 적극적인 책 읽기와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세계 명작을 닥치는 대로 읽는 사이에 문학에 되취되었고, 나도 그런 좋은 작품을 쓰고 싶어졌다. 내 나이 스물이었을 때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일상적인 작은 경험도 위대하고 숭고한 지적인 모험이었다.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이야기마다 '문학'이요 '작품'이었다. 스스로 습작을 하면서 창작을 가르치는 책들을 구해 읽으며 글을 쓰고, 또 글을 쓰고, 그리고 썼다"라고 했다.
기자 출신인 그는 영문과를 나와 영어에 능통하다.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1983년에 등단하여 1992년에 김유정 문학상을 수상했다. 영어에 능통한 아버지의 영향인지 두 딸도 외국어에 다재다능하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그의 네 식구가 구사하는 언어의 총 개수는 25개다. 집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쓰인 책들이 다채롭게 꽂혀있다고 한다.
여느 책과는 다르게 이 책은 두껍다. 530쪽이다. 이어 쓰기 편집이 아니었다면 족히 700쪽이 넘는 사전급 분량이다. 두께로 보아 '한가롭게 슬슬 걷는 걸음' 정도로 만만한 책이 아닌 듯싶었다. 다섯 마당 216개 꼭지마다 작가의 성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글쓰기 만보(漫步)가 아니라 만보(萬寶)다.
첫째 마당의 단어에서 단락까지 시작하여 다섯째 마당 글쓰기 인생의 만보까지 버릴 것이 하나 없다. 글쓰기 기초부터 심화학습까지, 일기에서 장편소설까지, 쉬우면서도 때론 심오하게, 좁은 듯하면서도 폭넓게, 각론부터 총론까지 친정엄마가 시댁으로 돌아가는 딸에게 이것저것 모두 담아 주는 마음처럼 독자에게 가득 퍼준다.
이 책은 나에게 세 가지 보물은 주었다. 첫 번째 보물은 나쁜 엄마가 되지 마라다. 안 작가는 모두가 다 아는 세 가지 원칙을 말한다. "조금씩, 날마다, 꾸준히-이것이 글쓰기의 세 가지 원칙이다"라면서 "몰아서 쓰는 일기보다 훨씬 더 나쁜 짓은 엄마가 대신 써주는 일기다"라고 했다. 소위 '극성엄마' 그릇된 훈육방식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먼저 나에게 원칙이 있어야 타인의 원칙을 만날 때 비판하고 취사 선택 할 능력이 생겨난다. 그래야 나 스스로 계속해서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 낸다. 남이 써 놓은 원칙을 읽고 머리를 끄덕이며 무작정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엄마가 해주던 숙제에 익숙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창작도 모방에서 나온다지만, 내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남의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마치 대목(접을 붙일 때 그 바탕이 되는 나무)이 있어야 접목(나무를 접 붙임)이나 접순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하나씩 나의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 보물은 구분과 묘사의 방법론이다. 안정효는 "단락의 단위는 길이가 아니라 상황과 행위의 종결을 기초로 삼는다. 기승전결은 인과(因果)의 흐름이다. 단락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며, 생각이 잘라지는 곳에서 단락은 갈라진다. 따라서 주제나 행동의 기승전결이 맺어지기 전에는 함부로 줄을 바꾸지 않도록 해야 한다. "라고 문단의 구분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저 막연히 알고 있던 단락(문단) 나누는 기법을 콕 집어 준다.
묘사의 기법도 이렇게 상세하게 알려준다. "모든 사물과 풍경과 배경의 묘사에서나 마찬가지로 인물을 묘사하는 서술법에서도 나는 항상 루돌프 플레시의 세 원칙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단순함, 간결함 그리고 보여주기(시각적 재현)의 세 가지 기본 원칙이다. 예를 들면 키가 크다보다 키가 184센티미터다 처럼써라"라고 말하면서 개념의 이해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무엇인가를 동력으로 삼으려면 그 개념의 본질부터 이해해야 한다. 대상 인물의 내면을 깊이 관찰하여 거기에 본질적 특성을 찾아내어 정확학 묘사하면, 구성된 인물에서는 인간의 취향이 난다"
상세하게 묘사하려면 세밀하게 관찰해야 하고, 정확히 묘사하려면 그 사람의 성상을 알아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그만큼 철저해야 된다.
세 번째는 안정효의 보물상자다. 그는 "모든 글쓰기 전쟁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해놓는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구상 작품들을 줄기세포처럼 다음과 같이 보관한다고 한다. "여러 개의 서류철에 따로따로 나눠서 관리하는 그 줄거리들은 관련된 상황과 해석 방법, 주제, 인물 설정, 절묘한 표현, 상큼한 단어 따위가 생각날 때마다 쪽지가 하나 둘 늘어가고, 저마다 여러 명의 아들딸처럼 동시에 성장을 계속한다. 참고가 될 만한 책, 잡지, 신문에 실린 기사와 논문도 닥치는 대로 모아들인다.
철저한 준비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뱁새 수준이지만 나도 1998년부터 오프라인으로, 2021년부터는 온라인으로 신문에서 읽은 사설이나 칼럼 가사 중에 글 쓰기에 참고할 만한 글감을 네이버 블로그와 네이버 메모에 모아 오고 있다. 대부분 인용이나 필사용 글감이다. 더 필요한 것은 내 것이 된 글감이다. 마치 꿀벌이 꽃에서 꿀을 모아 벌통에 저장하는 것처럼 천연꿀만은 못해도 사양꿀이라도 체화되어 내 것의 글감을 만들어 보관해야 한다.
한 권의 책 속에는 안정효의 인생이 오롯이 있다. 그의 눈과 손을 거쳐간 수많은 책과 글들의 줄기세포를 성장을 꿈꾸는 이에게 나눠주고 있다. 그 나눔이 문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초보작가들에게 많이 이식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