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자리에 누워서 지내는 하루는 길다. 정말 길다. 내일 뭐 하지. 생각만을 하면서 보낸 시간이 이었다. 분명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면서 내일 당장이라도 알바를 찾아서 떠나고, 능동적으로 뭔가를 할 것 같았다. 영화에서는 다 그러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오늘 하루가 싫었고, 내일이 오는 게 더 싫었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 무언가에서도 실패할게 뻔했다.
'아니 5인 이하 기업에서 내 자리도 제대로 못 지키고 방을 뺐는데 이것보다 더 큰 기업에서는 적응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고,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 별다른 목적도, 의욕도 없이 시간이 마구 흘러갔다. 하염없이 1주일이 흘렀을 때쯤이었나? 여자 친구가 내 자취방에 찾아왔다.
냉장고가 가득 찼네!
내게 남부럽지 않은 것 하나 자랑해보라고 하면 인복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다. 여자 친구는 내 보물 중 가장 큰 보물이다.
1주일... 아무리 길어도 2주일에 한 번씩은, 2시간 기차를 탄 후 버스를 40분 타고, 하차 후 20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내 자취방에 여자친구는 꼬박꼬박 찾아왔다. 와서 같이 밥도 해 먹고, 게임도 하고, 산책도 하고, 도서관도 갔다.
내가 대학시절 사람들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때에 여자 친구와 만났다. 하지만 그렇게 빛나는 시간을 여자 친구에게 길게 보여주지 못했다. 6개월 쯤 연애한 후 내가 대학졸업 전 직장을 다니게 되었고, 적응을 잘 못하여 그만두었고, 지금은 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상세한 내용은 이전 챕터에서 다뤘다.)
혼란해 하는 나와 다르게, 여자 친구는 나보다 더 태연해 보였다. "뭐~ 어디 내놓든 잘 살아 돌아올 사람이니까!"라며 나를 위로했다. 대신, 나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거를 꼭 신경 썼다. 전화를 해도 밥을 먹었는지와 오늘 산책을 하였는지를 물어봤다. 지금 생각해도 여자 친구에게 너무 고맙다.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몸무게가 10kg이나 불었는데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면 더욱 몸이 불었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이 있는데 여자 친구가 꼭 자취방에 들어오면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먹다 남은 소주가 있으면 꼭 변기 청소한다면서 부어버렸고, 냉장고에 식품이 차는지 빠지는지를 꼭 체크했다.
여자 친구는 냉장고 상태를 체크하며 내 상태도 같이 체크했던 것이다.
오빠 우리 이 고기면 충분해!!!
시간이 흘러서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우리가 연인이 되고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였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첫 직장에서 받던 월급을 잘 쪼개서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럭저럭 살았는데, 막상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돈이 필요했다. 통장 잔고는 7만 원이었다. 이 돈 다 쓰면 당장 내일부터는 며칠을 굶으며 집 밖으로 나와서 사회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돈을 아낀다고 해서 내 삶이 더 윤택할 일은 없었다. 결정을 내리고 7만 원을 전부 체크카드로 옮기고 여자 친구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30분을 이동한 끝에 시내로 나왔다. 여자 친구에게 하고 싶은걸 얘기하라고 했더니 대뜸 전통 행궁 앞으로 가서 연날리기, 달고나 뽑기, 딱지치기 등을 얘기해서 당황스러웠다. 전통 행궁 앞으로 가니 여자 친구가 하고 싶다고 한 놀이들이 몰려있었다. 하루 종일 재밌게 놀았는데도 둘이 20,000원도 쓰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때 진짜 재밌게 놀았다.
저녁이 다가왔고, 여느 커플처럼 근사하게 저녁을 먹고 싶었다. 그런데 스테이크를 파는 가게들이 전부 자리가 없어서 그 어디에도 들어가서 밥을 먹지 못했다. 결국 집에서 해 먹자고 이야기를 하고 마트를 갔는데, 매대에 남은 스테이크 고기가 100g에 30,000원이었다. 내가 생각한 예산을 아득히 초과한 고기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는데 여자 친구가 대형마트 말고 집 앞에 있는 정육점은 더 저렴할 수 있지 않냐고 설득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를 타고 넘어왔다.
자취방 앞 정육점. 집 앞 정육점이라고 해서 가격이 다르지는 않았다. 멍하니 서있는 나에게 여자 친구가 국거리용 수입 목심을 집어 들면서 "우리 이거면 충분해!" 하고 카트에 담았다.
요리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국거리용을 구워 먹으면 얼마나 질겨지는지 알기 때문에 구이용 고기를 구매하자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여자 친구는 완강했다. 결국 국거리용 목심을 사들고 와서 프라이팬에 구워 먹었다.
그날, 고기를 먹다가 눈물이 터져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여자 친구한테도 미안하고, 나한테도 한심했다. 쿨(?)하게 사표는 썼지만,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며 서로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는 이렇게 가면 안 되겠다고 이야기하며 주변 알바 자리에 지원서를 냈다.
그러고 나서 한 주가 흘렀고, 나는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치킨집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사회에 첫 발을 디뎠다.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법
정말 나 혼자 세상 적응 못한다고 생각했을때... 왠지 세상에서 내가 왕따라고 느껴졌을 때, 억지로 힘을 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힘이 나지 않았다. 자꾸 힘은 빠져나갔고 무서워서 도망가고만 싶었다.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누구한테도 이야기를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그런 사람이 있다면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억지로 힘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다만 지금 당장 본인에게 필요한 한 가지 희망만은 잊지 말라고 말을 건네고 싶다.
나에게는 그런 희망적인 존재가 여자 친구였다. 그리고 그 희망을 이상태로 가면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다.
인지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둘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이거나 또는 내가 무서워하는 것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이다. 만약에 지금 당장 일어날 힘도 없고, 일어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면 위의 두 가지 다 못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억지로 본인을 움직이려고 할수록 본인을 고장 내키는 일을 가속시킬 뿐이다. 그러니 그냥 본인이 힘든 것을 인정해주기 바란다. '내가 힘들구나' '내가 지쳤구나' 인정을 해주면서 차분하게 천천히 다시 회복하는거다. 그러다보면 생각이난다.
그럼에도 내가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뭐가 있을지 말이다. 그 정도면 된다.
괜찮다. 당신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상황이 당신을 일으킬 것이다. 지금은 그저 본인에게 나의 여자 친구가 내게 해줬던 것처럼 괜찮다고 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