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 5. 급변하는 시대에 유통장인은 어때?
MZ사회초년생 이야기
급변하는 시대에 장사기술을 배우면 괜찮지 않을까?
유통, 인사, 소방공무원.. 그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유통이었다.
유통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세가지 중에 가장 비젼이 있어보였다. 이 오만한 생각을 조금 더 부연설명하자면 인사와 소방공무원은 언젠가는
조직을 떠나게 될 경우 나 혼자 체득한 기술이 없어서 어려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장사하는 기술은 끊임없이 내가 취급할 수 있는 품목을 늘려가고,
젊었을 때 부터 이물건 저 물건을 거래해본 경험이 나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고민고민하다가 나는 택배 물류센터로 갔다.
유통도 엄청 다양한 직무가 있는데 갑자기 택배 물류센터로 갔다고 해서 당황하는 독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택배물류센터를 간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로 가양각색의 물건들을 어떻게 분류하고, 보관하여 배송을 하는지 그들의 시스템이 궁금했다. 두번째는 물류센터마다 특색이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가 없던 때라 택배 알바는 인기가 많았다. 겨우겨우 모두가 기피하는 상하차 직무로 첫 출근을 하였다.
물류센터에는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많았다. 어린 친구들은 군대가기 전 혹은 대학생활을 하며 본인들의 용돈을 벌기위해 왔고, 4~50대로 보이는 남성들은 정년퇴직하고 각자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왔다. 여기서도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일을 시작하고 덩치가 크고,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로 캔음료를 나르는 일에서 생수페트를 나르는 일로, 생수 페트를 나르는 일에서 쌀포대를 나르는 일로 팔려갔다. 그러다가 하차 차량이 들어오면 어김없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하차지점, 물류센터 입고 지점, 출고지점, 상차지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렇게 네가지의 직무를 1주씩 돌아가면서 1달을 근무했다. 일이 어느정도 익숙한 다음에는 도심 한 가운데 있는 물류센터에 지원도 해보고, 시골 외곽에 빠져있는 물류센터에 지원을 해보았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갔다. 그때 쯔음 물류센터 시스템이 어떤것인지 느낌이 왔다.
고속도로, 산업도로, 도시, 시골 이 네가지로 나오는 물류센터 입지
패딩을 입고도 적응이 안되서 덜덜 떨던 추위는 패딩쪼기로도 따듯하다 느낄정도로 익숙해졌을 때, 나는 물류센터들의 입지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깨닫게 되었다.
먼저 물류센터 주변에는 고속도로가 30분 안에 닿는 장소에 있었다.그리고 최소 편도 3차선이 지나는 국도 또는 산업도로를 끼고 있었다. 두 문장을 합치자면 IC에서 나와서 산업도로로 30분 안쪽에 있는 지점에 물류센터들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지도 어플을 이것 저것 누르다가 우리나라 용도지역을 확인할 수 있는 팁도 얻을 수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던 만큼,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의 쾌감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두번째는 도시와 시골에 적재되어 있는 물건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도심지역에는 생수 페트병이 많았고, 시골지역에는 강아지 사료, 쌀 등이 많았다. 지역에 따라서 이렇게 다를 일일까 하고 고민하다가 입고되어서 관리되고 있는 품목들도 확인해보니,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시 지역 물류센터에는 순환율이 빠른 제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물품이 물, 통조림, 과자류 등이었다. 반대로 시골지역 물류센터에는 오래 적재할 수 있고 무게가 나가는 제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쌀, 반려동물 사료, 가구등이 대표적이었다. 이 부분은 운영진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정답이 나왔다. 공간은 정해져 있는데, 취급하는 품목을 탄력적으로 잘 운용하기 위해서는 고객이 찾는 특징에 맞춰서 했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난 받는만큼만 일합니다만?
물류센터 알바는 사람에 대해서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택배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분들 중에 미래의 꿈을 갖고 일을 임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여유시간을 돈버는데 사용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기억나는 사람이 3명 있다.
입고 바코드를 찍는 곳에서 만난 왠 아주머니는 휴가 갈 계획에 신나 있었다. 겨울 패딩을 나르고 있으면서 본인의 머릿속에는 이미 스키장에 가 있었다. 그 분이 꼭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다. " 내가 이 일을 안해도 먹고 사는데~ 무료해서 말이야~" 라는 말이었다.
두 번째 사람은 진두지휘해서 알바생들을 통제하는 알바생이었다. 헤드렌턴부터 시작해서 전문 장갑까지.. 처음 봤을 때는 물류센터 직원인줄 알았다. 직원들에게 깍듯이 대하고, 알바생 조회시간에 같은 줄에 서서 체조를 하는 것을 보고 우리와 같은 알바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직원들도 그를 정말 직원처럼 대우했다. 복장 불량인 알바생을 알바생이 집에 보내는 일까지 벌여졌으니 말 다했다.
마지막 사람은 알바 시작만 되면 어디 틀여박혀서 안보이다가 점심시간만 되면 게임이야기를 하는 아저씨였다. 본인이 어떤 게임의 길드장(팀장)이라고 소개를 하며, 과거에는 이름있는 회사에 몸담고 있었으나 다 부질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지금 본인의 삶에 마족한다는 아저씨였다.
이 세사람은 공통점이 없어보이지만, 신기하게도 작업이 진행되면 몸에는 한가지 문장이 세팅되는 듯 했다. 바로 '받는만큼만 일한다.' 였다. 무거운 물건을 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힘든일은 도망을 갔다. 그러다보니 정말 어려운 일은 회사 직원들 몫이었다.
'받는 만큼만 일한다.'
이 말에 좋다 나쁘다 말을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같은 조직에서 몸을 담고 있어도 입장의 차이, 생각차이에 따라 천차만별의 근무태도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고민을 했다.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
순탄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어느날 사건이 터졌다. 할아버지 제사 관련해서 아빠한테 전화가 온걸 못받은 것이다. 물류센터안에 핸드폰을 들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밖에서 걸리는 전화를 일이 끝나고 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제사 참석을 하라는 아버지의 전화였다. 그런데 날짜를 보니 물류센터 아르바이트 날짜와 겹쳐있었다. 난 아빠에게 전화를 하여서 제사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이야기를 하였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가족일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화를 내는 아버지였지만, 이 일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그리고 있었던 중이어서 흐름이 끊기는게 싫었다. 문제는 아버지는 내가 유통계열에서 일을 하려는 것을 반대하셨다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과 생활리듬이 달라지고, 사람과 계속해서 부딪히기 때문에 사람이 싫어지고, 특별한 기술이 생기는 직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물류센터에서 일한다는 것은 비밀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서 제사에 불참석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특히, 나의 시간인 만큼 우선순위를 세우고 관리하고 있으니 갑작스럽게 일정조정을 요청하지는 말아달라고 말씀드렸다. 전화를 끊고 내가 이 일을 이만큼 하고 싶어하는 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가슴뛰는 일을 찾으시나요?
예 저도 찾고있습니다. 네? 벌써 찾은것 아니냐고요?
그럴리가 있겠는가.. 나도 아직도 찾고 있다. 요즘도 아침만 되면 참 출근하기 싫어 죽겠다. 하지만 회사 퇴근하고 집에 와서 멍때리다가 갑작스럽게 어떤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가면 메모장부터 키는 자신을 보며 피식 웃고는 한다.
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좋다. 이런 일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는가 하고 생각해보니, 시행착오를 하며 조금씩 그렸던 그림들이 나를 완성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처음 인터넷 신문사에서, 두번째 빔프로젝터 회사에서, 세번째 물류센터에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 그림들이 하나둘 모이고 수정되면서 가슴뛰는 일보다는 나에게 잘 맞는 일을 찾아가는 길라잡이가 되었다.
이 글을 읽으며 아직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또는 '내가 원했던 이런 일이 아니야'라고 하소연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기부터 쓰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분명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분들이 걸어왔던 길에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맞는 핏은 내가 걸어온 길에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