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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Oct 14.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20

망가진 체인도 굴러는 간다

2016.09.26

Berlin, Deutschland


 베를린에서의 둘째 날은 나쁘지 않았다. 어제보다 더 좁은 방에 눈뜨면 반대쪽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발이 보였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았다. 위층에 남자는 새벽같이 짐을 챙겨 나갔다. 1층에 사람들만 늦잠을 자고 위층 사람들은 부지런히 다 나갔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야 하니 편한 옷을 챙겨 입고 혹시나 추울까 겉옷도 잘 챙겼다. 물도 확인하고 리셉션으로 내려와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는 보기와 달리 가벼웠다. 생긴 건 굉장히 묵직하고 내 몸의 1/3을 차지하는데 무게는 그렇게까지는 무겁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간단한 사용법과 주의사항을 듣고 자물쇠 열쇠를 받았다,


 자물쇠는 굉장히 두껍고 무거웠는데 직원은 열쇠를 건네주며 열 번은 더 자물쇠를 잘 잠그라고 말했다. 종종 자전거를 도난 맞고 오는 관광객들이 있는데 그럴 경우 자전거 값을 배상해야 하니 반드시! 꼭! 자물쇠를 잠그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 잃어버릴까 열쇠를 내 지갑에 연결해 두었다.


 페달을 밟아 굴리니 자전거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느낌도 좋고 날씨도 좋았다.

 오늘의 목적지는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인 장벽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다. 숙소는 물론 주요 관광지와도 멀리 떨어진 덕에 부러 이 하나만을 위해 먼 길을 가야만 했다.

 

 대중교통비는 아까웠고 걸어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자전거를 탄 오늘이 딱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 40분 정도만 달리면 되었기에 큰 무리는 아니라 생각했다.(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가는 길에 어제 보기만 했던 티어가르텐도 들리기로 마음먹었다. 걸을 때는 한 세월이더니 자전거는 슉슉 잘만 나아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녹음이 가득한 길은 달리기 편했다.

 '이 맛에 내가 자전거를 타지.' 오랜만에 느끼는 속도감을 즐기며 티어가르텐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어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전승기념탑이 내 앞에 있었다.


 근처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자물쇠도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고 있자니 옆으로 관광객인 듯 보이는 남자 세 명이 자전거를 세우러 나타났다. 자물쇠를 대충 걸어두고 나보다 먼저 탑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보며 모두가 경고를 잘 듣는 것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엉성하게 바퀴에 걸려있는 자물쇠는 진짜 말 그대로 '걸려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끌고 갈 수 있어 보였다. 괜히 내 자전거를 한번 더 확인했다.


 탑으로 들어가서 1층의 간단한 안내를 보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찾았다. 투박한 시멘트 계단을 몇 개 오르니 중간 테라스(?)가 나왔다. 한 바퀴 구경하고 내부로 들어가니 철제 계단이 나왔다. 생각보다 더 높고, 가파르고, 꼬불거렸다. 나보다 먼저 왔던 남자 셋이 대화하다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좀 많이 힘들었다


 뒤로 쫓아오는 사람도 없겠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탑내부의 서늘한 온도가 딱 좋았었는데 금방 숨이 차고 땀이 났다. 텅텅- 거리는 계단 밟는 소리와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계속 뱅글뱅글 돌다 보니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짧지만 강력한 운동 끝에 고지가 보였다. 빛이 나오는 곳으로 향하자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계단들을 올라올만한 풍경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벌리 시내 전경을 구경했다. 혹시나 내가 가 본 곳이 보일까 집중해 봤지만 위에서만 보고 맞출 정도로 건물을 잘 보는 것은 아니라 금방 포기했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건물들을 구경하고, 하늘과 공원의 조합을 즐기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땀이 식으며 '시원하다' 대신 '춥다'가 느껴질 때 탑을 내려왔다. 조금 힘들었지만 뿌듯하기도 했다.


 세워준 자전거를 챙길 때 살짝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맞는 열쇠인데 자물쇠가 잘 안 열렸던 것이다. 약간 힘을 주면 바로 열리기는 했지만 순간 스쳐 지나간 불길함은 떠나지 않았다.


 공원을 구경하며 빠져나와 원래 목적지인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향했다. 좁은 골목과 인적 드문 곳을 벗어나니 '자전거의 천국'이란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딜 가든 자전거가 있었다. 그리고 도로와 신호도 아주 잘 되어있었다. 


 너무 잘되어있어서 너무 낮설정도였다. 차도 한가운데를 자전거로 달리며 '내가 여기로 달려도 되나?'를 계속 자문했다. 그러나 내 옆을 쌩쌩 잘도 지나간 자전거들이 그런 내 물음에 'YES'라 답해주었다.

 차들과 신호를 대기하다가 같이 달리기 시작할 때는 겁도 났다. 맨몸으로 도로를 달리는 게 어색했다. '오토바이를 탄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차의 깜빡이대신 손을 뻗어 미리 갈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러면 차들이 자연스레 자전거를 향해 길을 비켜주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중에 이 얘기를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했더니 암스테르담을 추천했다. 그곳이 진정한 자전거의 수도며, 천국이라며 이야기해 줬다. 꽤 궁금했다.)


 목적지가 절반 조금 안 남았을 때 문제가 생겼다. 평지를 내달리는 도중 체인이 빠져버린 것이다. 갑자기 덜컥거리더니 헛돌기 시작한 바퀴에 서둘러 빈 공터를 찾아 헤맸다.

 다행히 큰 도로에서 빠져나와 작은 길을 달릴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근처 주차장에 자전거를 새우고 체인을 확인했다. 완전히 빠져버린 체인은 바닥에 늘어졌고 주위에 도움을 줄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자전거를 타보긴 했다고 무얼 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단순했다. 체인을 다시 키우면 된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위가 쉽다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돌멩이와 나뭇가지로 체인을 잡아끌어 걸쳤다. 그러나 그 정도의 정교함으로는 택도 없었다. 결국 손을 써야 했는데 딱 봐도 기름 범벅인 체인을 맨손으로 잡자니 영 찝찝함에 망설여졌다.

 고민이 길어짐에 따라 내 피로도 역시 올라갔다. 결국 가방을 뒤엎어 일회용 물티슈 한 장과 티슈 묶음을 찾아냈다. 있는지도 몰랐던 친구들에 마음이 좀 놓였다.

 체인을 끼우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고 기름은 미끌거리고 손가락은 아팠다. 그럼에도 결국 성공해내니 뿌듯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인지 나를 구경하던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다. 서로 당황하다가 멋쩍게 웃었다.

 물티슈로 대충 손을 닦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쭉쭉 나가는 자전거에 안심하기도 잠시 요놈은 두어 번 더 체인을 토해내었다. 하.


 지난한 싸움 끝에 엉망인 두 손과 어쨌든 고쳐놓은 자전거로 길을 나섰다. 내 옆을 달리는 자전거들은 스프린터 선수들같이 굉장히 가벼워 보이고 힘찼다. 그에 반해 나는 넝마가 되었고 거북이처럼 힘겹게 차체를 끌며 가고 있었다. 운동을 하자. 여행을 와서 백번쯤 한 다짐을 다시 한번 했다.

 주린배를 채워 넣으려 소시지를 하나 사 먹었다. 그토록 기대하던 카레부어스트(소시지에 소스를 끼얹고 커리파우더를 뿌린 음식)를 먹는데 맛은 있었지만 미식이나 여유보단 그저 살기 위해 먹는 기분이었다. 콜라까지 우겨놓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예상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생각보다는 그저 그랬다. 철거되지 않은 베를린 장벽 위로 다양한 벽화들이 수놓아져 있었지만 사람과 공사에 치여 느긋하게 구경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더불어 이미 바닥을 치는 내 체력으로 1.3km나 되는 길을 걷자니 그림이고 뭐고 앉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유명한 키스벽화만 보고 돌아가려다 조금 더 걷게 되었다. 되돌아가려도 밀려오는 사람이 버거워 반쯤 강제로 앞으로 걷게 되었다. 그러다 벽의 뒷면을 보게 되었다. 강가와 작은 길을 두고 닿아있는 벽의 뒷면은 예상치 못한 사진이 걸려있었다.


 사진 속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부서진 잔해더미의 사진을 보았다. 베를린벽의 뒤에는 시리아내전에 대한 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때까지 내게 시리아 내전은 '아 그런 일도 있지'정도였다. 이름도 낯선 나라, 거기다 중동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 내가 알지 못했던 나라.

 벽 뒤에는 간략한 개요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옆에서 흘러가는 평화로운 강과는 달리 소용돌이 같은 삶들이 거기 있었다.


 시리아 내전은 2011년에 시작되었다. 내가 베를린에 갔을 때가 2016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요즘처럼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시간 없다는 게 와닿는 때도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니아, 이스라엘과 하마스로 시작된 여러 국가와 단체 간에 국지전과 테러들. 세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진보되었다 말하고 나아진다 말하지만 단 하루도 총성이 멈추는 날은 없다. 결국 세계 어디서든 폭탄은 계속 터지고, 사람은 계속 죽고 있었다. 

 문득 그런 사실이 자각될 때 방금까지 즐기던 향긋한 커피가 고약하게 씁쓸한 맛을 낸다.

 남일이라 생각하기에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남이면 어떤가. 그게 그들의 죽음에 무던해질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벽화보다도 그 사진들을 더 오래 보다 발을 돌렸다. 입맛이 썼다.


 그러나 사람은 슬퍼도 배가 고프고 밥을 먹어야 한다. 숙소에 절반쯤 왔을 때 미치도로 배가 고프고 페달을 밟는 게 힘들어졌다. 이대로 가다간 사고 나겠다 싶어 자전거를 새워두고 근처 식당을 검색했다.

 

 도심지구로 들어와 식당이 많을 줄 알았는데 죄다 금액대가 높은 레스토랑만 뜨고 내가 비벼볼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샐러드 하나에 16유로를 받는 곳을 갈 바에는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겠다 싶을 때 소시지집을 발견했다.

 멀리서 보이는 외관은 썩 좋지 않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가격이었다. 사랑스러운 가격에 서둘러 가까이 향했다. 식당보다는 푸드트럭에 가까운 외관에 의자도 없이 서서 먹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들 어떠하리. 소시지&감자튀김과 음료세트가 8유로인데!

 

 아까 먹은 것과 같은 커리부어스트를 시켰다. 이름 그대로 커리(카레) 맛 부어스트(소시지)다. 카레라면 삼시세끼 7일 밤낮을 먹어도 좋아하는 나에게 딱인 소시지였다.

 너무 급하게 먹은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나름 여유를 부렸다. 짭조름한 맛이 강해질 때 같이 나온 감자튀김을 먹었다. 그리고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 맛있었다. 지친 몸에 튀긴 탄수화물이 들어가니 가뭄에 물 만난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지만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소스를 뿌려줄 때 마요네즈까지 주는 것을 보고 약간 당황스러웠는데 이제는 뿌려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감자튀김에 마요네즈를 찍어먹으니 그 고소한 느끼함이 너무 맛있었다.

 평소 마요네즈는 제일 작은 것을 사도 2년 동안 절반도 안 줄어든 채 방치될 만큼 관심이 없었는데 감자튀김과 먹으니 잘 어울렸다. 질릴 때쯤 새콤한 케첩과 커리향 듬뿍 나는 소시지를 먹으니 금세 한 접시가 사라졌다.

 

 먹은 쓰레기를 버리고 뒤처리를 하고 있자니 가게 주인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뭔가 잘못됐나 싶을 때 척! 하고 그의 엄지 손가락이 올라왔다.

 "그렇지! 쓰레기통이 있는 이유는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지!"

 어지간히 먹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에 싫증 났는지 주인은 연신 굿! 을 외쳤다. 당연한 일을 하고 칭찬을 받은 듯해 기분이 묘했지만 그냥 웃으며 땡큐를 외쳤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내일 아침으로 먹을 과일과 군것질을 샀다. 오늘 마신 탄산 판트까지 챙기니 한국돈으로 2천원이 조금 넘게 나왔다. 믿기 힘들 정도의 물가다.

 신나게 과일봉지를 들고 자전거로 오니 자물쇠가 또 말썽이었다. 오늘 하루만은 내 자전거 이것만 마치 도둑처럼 낑낑거리며 키를 돌렸다. 장장 5분의 싸움 끝에 나는 다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자전거를 반납하며 키에 대한 컴플레인을 걸었다. 첫날에 친절한 언니는 사용법을 다시 한번 알려주겠다며 한번 잠가보았다가 다시 열리지 않는 자물쇠에 깔끔하게 포기했다. 알려줘서 고맙다는 언니에게 손을 보여주며 체인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힘든 하루를 보냈겠네"

 "응. 근데 즐거웠어"


 방으로 올라와 기름자국이 남은 손을 빡빡 씻었다. 직원이 말한 대로 힘든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직원에게 말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글을 쓰던 도중 베를린시에서 소녀상을 철거하려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람이든 도시이든 내가 사랑했던 존재가 내가 사랑했던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은 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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