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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31

까마귀 인간을 아시나요

by 강단화

2016.10.07

München, Deutschland


장기여행자의 특권을 알차게 누리는 하루다. 늦은 아침 눈을 뜨고 침대 위에서 꾸물적거리며 게으름을 피웠다. 몸은 아직도 감기기운으로 축축 늘어졌고 멍- 한 머리는 한 시간만 더 누워있기를 종용했다.

시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오늘 정해둔 일정은 하나였기에 괜찮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약간은 차가운 시트로 몸을 둘둘 감고 침대 위에서 한 마리의 애벌레가 되었다.


부산스레 짐을 정리하던 룸메이트들을 떠나보내고 점심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옷을 챙겨 입으니 이미 오후가 되어있다. 근처 마트로 가 간단한 요깃거리와 간식거리를 구매했다. 물은 지난번에 사놓은 것이 조금 남아 건너뛰었다.

탄산음료가 가득 쌓여있는 코너에서 발이 멈췄다. 달달하고 톡쏘는 까만 물이 나를 유혹했다. 배를 채운 것도 없는데 당장 저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었다. 여기 와서 액상과당을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일 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했는데 요즘은 사나흘에 한번 액상과당을 산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작은 콜라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귓가에 아빠의 목소리로 '그 콜라 한 병에 들어간 설탕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는 잔소리가 메아리쳤지만 속으로 메롱을 날려주었다. 18년이나 안 마시고 살았으면 이제 500ml 한 병쯤은 내 맘대로 마셔도 되지 않을까.


역과 가까운 숙소는 마트역시도 지근거리였기에 나의 식량 쇼핑은 금방 끝이 났다. 방으로 들어와 그새 체크인한 새로운 룸메와 인사하고 침대 한편에 탄산과 식량을 차곡차곡 배치해 주었다. 앞으로 이틀정도의 끼니지만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간단히 짐정리를 하고 다시 숙소를 나왔다. 한낮에서 늦은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에 오늘의 목적지인 뮌헨 레지던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거 바이에른 왕국일 때 왕궁으로 사용했던 건물은 지금 거대한 박물관이 되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유럽의 대다수의 궁들처럼 일부만 공개하는 게 아닌 대다수의 구간이 공개되어 있어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한동안 독일의 바이에른주(州)를 돌아다닐 예정이라 관광 통합권을 구매했다. 이제 나는 이 빳빳한 종이티켓 하나면 15일 동안 바이에른의 성들과 박물관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기간 내 어디든 몇 번이고 방문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자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자유입장권을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보름간의 자유이용권이었던 바이에른 티켓


2시간 동안 궁전을 구경하느라 바쁘게 걸어 다녔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보이는 휘황찬란한 보물들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때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올려졌을 티아라, 주인의 재력을 과시하는 보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섬세한 공예품들이 나의 눈과 발을 잡아끌었다.

절대 두 시간 안에 다 못 보겠구나 싶어졌다. 아쉬울 만도 하지만 또 오면 된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빠르게 소장품들을 스쳐 지나가다가도 다시 올 수 있단 생각에 잠시 멈추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천천히 음미했다. 오늘은 마음에 드는 것만 천천히 봐야겠다 생각했지만 예쁜 것 옆에 예쁜 것이 놓여있어 발걸음은 한없이 늦어졌다.


나는 '예쁜 것'을 좋아한다. 누군들 싫어하겠냐만은 유독 예쁘고 반짝이는 것에 약해지는 것이 전생이 까마귀였나 싶을 정도다.

플라스틱 쪼가리도 빛을 받아 반짝이면 나는 한참을 보고 있을 수 있었다.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것들은 때론 보석이었고 어떨 때는 흘러가는 강물에 부서지는 햇빛이었으며 간혹 길가에서 보이는 색색의 들꽃이었다.

기준도 의미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반짝이는 것들이 내 눈 안에 가득 차는데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가만히 보물들을 바라보며 나는 왜 이리 어여쁜 것들에 약할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어릴 적부터 봐오던 할머니의 화단이 떠올랐다.


말을 할 때면 아빠는 웃고 넘어가지만 나는 항상 진지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우리 할머니의 '미감'이다. 속된 말로 우리 할머니는 '얼굴을 봤다'. 아빠의 젊었을 때 사진과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할머니는 얼굴을 본 게 맞다. 물론 얼굴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얼굴'도' 봤다.


할머니는 본인의 취향이 확고하셨고 그 취향을 실현시키실 능력도 있으셨다. 특히나 화단을 꾸미는 능력은 내가 본 사람들 중 제일이었다. 작고 풍성하게 꾸며진 화단에는 내가 이름을 아는 꽃과 모르는 꽃이 뒤섞여있었고 중간중간 자리한 나무는 푸른 잎을 자랑하다가 때가 되면 맛난 열매를 맺어주었다.


본인의 취향이 가득한 화단을 매년 업그레이드시키시는 게 할머니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할머니의 피를 받아서일까 나 역시 내 취향 미감이 가득 찬 공간을 좋아했다.

박물관은 나에게 할머니의 화단 같은 공간이었다. 물론 내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거대한 태피스트리 사이를 걷다 보니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섬세하게 짜인 신화를 배경으로 푹신한 소파를 놓고 싶었다. 나무냄새가 올라올 것 같은 귀여운 티테이블 위에 따뜻한 커피와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재생되는 스피커까지 있으면 완벽할 거 같았다.


그나마 얌전했던 직물공예방을 나오자 다시금 번쩍이는 황금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한 건물이 이제야 슬슬 익숙해졌다. 다양한 방을 지나다 연주회장으로 쓰였다는 넓은 공간을 발견했다.

지금도 가끔 연주회가 열리는지 길게 의자를 깔아놓고 악기를 조율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배경만 보면 고전 영화 속 한 장면인데 의자는 모던하기 짝이 없는 철제의자다. 그 아이러니함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공간을 울리는 악기소리가 신기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오래된 공간을 채우는 소음은 그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멈췄던 시간이 흘러가게 만드는 마법이 있는 것 같다. 잠시 그 풍경을 구경하다 자리를 옮겼다.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폐장시간이 다가왔기에 좀 더 부지런히 발을 놀려야 했다.


번쩍이는 것들을 실컷보고 숙소로 돌아와 며칠간 벼르던 일을 시도했다. 잘못된 비행기 예약을 취소하기 위해 전화를 시도한 것이다. 결과는 처참했다. 난 상담원 연결까지도 가지 못했고 도와주던 J도 별 수가 없다며 포기하라 말했다.


며칠간 나를 괴롭히던 일이 결국 해결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우울한 감정이 오랜만에 통화한 엄마에게 짜증이란 이름으로 쏟아졌다. 와이파이가 잘되는 숙소에서나 겨우 목소리를 들었는데 기껏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서 짜증만 내버렸다. 미안하고 속상하고 보고 싶었다.


숙소밑 펍에 앉아 라들러를 한잔 시켰다. 달달한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데도 입맛이 텁텁했다. 여행에 몸이 지쳐가고 매일이 무던해졌다. 그럼에도 새로운 걸 보면 금세 신기하고 신이 났다. 가족이 보고 싶지만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루하루 경험을 쌓는다지만 모래성을 쌓는 기분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커닝이라도 하고 싶지만 답지도 없다. 막막하지만 또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즐거워서 그냥 잠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내일은 또 다른 성을 보러 갈 것이다. 그다음 날도 아름다운 것들을 잔뜩 봐야지. 딱 그 정도만 생각하고 순간순간의 감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나의 감정은 피곤함이었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또다시 마음이 착잡하다. 괜찮아질즈음 하면 들려오는 커다란 사고소식이 속을 으깬다. 아픈 연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24년도 찾아오는 25년도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두가 무탈하길 기원한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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