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궁전
뮌헨여행을 계획하면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이름이 하나 있다. '루드비히 2세'. 과거 뮌헨이 바이에른 왕국일 적 왕좌에 앉았던 사람이자 건축왕, 무능한 왕, 미치광이왕으로 불리었던 자다.
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민걱정 없을 것 같은 인생의 시작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차가운 물속에서 40세의 나이로 끝난다. 스스로 선택했는지, 타인에 의한 것인지도 모를 죽음이었다.
당시에는 예술과 사치로 현실도피에 빠진 왕이었지만 그가 남긴 사치의 유산은 후손들이 알차게 이용해 먹고 있다. 루드비히가 건축한 3대 성(城)은 투어 상품의 단골 품목이며 그중 하나는 디즈니에서 만든 성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3개의 성을 다 방문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팍팍했다. 결국 두 개의 성을 이번 여행에 보고 마지막 하나는 다음을 위해 미뤄두었다. (당시에 보지 못했던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다음기회에 동생과 함께 가서 보았다. 디즈니의 모토가 된 성이라 가장 유명하고 사람이 많았다. 그 덕인지 다른 두 성에 비해 정보가 많고 가이드도 잘 되어있었다. 얼떨결에 동생과 방문하기 가장 적합한 성을 남겨두었다.)
오늘 가기로 정한 곳은 3곳의 궁전 중 유일하게 완공된 린더호프 성이었다. 어제 구입한 통합권을 잘 챙기고 나와 뮌헨에서 2시간이 조금 안되게 떨어진 작은 도시인 오버암머가우로 향했다.
언제나 두려운 환승을 하고 무사히 도시의 중앙역에 내리자 나를 맞이하는 건 짙은 안개와 비냄새였다.
도시에 대한 첫인상은 '안개'였다. 관광객이 많을 거란 예상과 달리 텅텅 빈 도시는 짙은 안개와 함께 어울려 공포영화 속 한 장면을 그려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절로 이빨이 떨려왔다. 뮌헨보다 확연히 떨어진 기온에 가지고 온 겉옷을 둘둘 걸쳐보았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역을 나와 버스정류장에 붙은 시간을 확인해 보니 1시간을 더 기다려야 성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안 그래도 나쁜 교통편이 주말이라 한층 더 불편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가 안개비가 되고 곧이어 부슬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감기에서 나았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는데 도로 감기에 걸릴 판이었다.
버스정류장안으로 비가 들이쳐 입고 있는 옷이 눅눅해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근처에 있는 리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훈기에 절로 몸이 풀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작은 내부에 오래 머무르는 게 조금 뻘쭘하게 느껴졌다. 손님은 없고 공간은 작은데 나는 너무 눈에 띄는 기분이었다. 결국 요깃거리가 될만한 빵과 간식거리를 고르고 최대한 천천히 계산을 하고 나왔다.
도로 차가운 길바닥에 나오니 울컥 서러움이 차올랐다. 그깟 뻘쭘함이 뭐라고! 저 안에서 독일어 해석이라도 하며 30분은 버틸걸! 하다못해 과자 고르는 것도 성분표 다 보고 고를걸!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스스로의 성격에 대한 피드백을 한참을 하고 있다 보니 내 옆으로 사람하나가 들어왔다. 패딩을 입은 모습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 나은가 싶다가도 안개비 맞으며 모르는 남자와 서있자니 덜컥 무서움도 들었다. 머릿속으로 만약 도움이 필요할 경우 알디로 뛰어갈 최단 루트도 짜보았다.
다행히, 또는 당연히 내가 도움을 청할일은 없었다. 남자는 잠시 기다리다가 추운지 얼마 전의 나처럼 알디로 향했고 조금 뒤 음료수 한 병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아저씨도 뻘쭘했구나 싶었다.
달달 떨면서 기다린 지 한 시간 만에 나는 성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30분 정도 달려 도착한 정류소에 내려 매표소로 향했다. 15일권을 보여주고 성의 티켓을 수령했다.
직원은 가이드 투어의 시간에만 입장가능하다며 정해진 시간에 줄에 서있으라 당부했다. 매표소에서 성의 입구까지 거리가 있었기에 마음이 바빠졌다. 열심히 걸어 성의 입구까지 다가갔다.
성의 첫인상은 '아담하다'였다. 안개 낀 산에 둘러싸인 성은 기대보다 작은 크기였고 궁전보다는 저택이, 저택보다는 별장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크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장식들과 정원과 분수가 앞으로 곧게 뻗어있어서 초라하단 감상은 들지 않았다.
그동안 안 보이던 사람들이 다 여기에 몰렸는지 가이드 줄은 복작복작했다. 겨우 영어가이드 줄에 합류해 기다리며 앞으로 뻗은 정원을 구경했다. 거대한 조각과 부조들이 안개비를 머금고 있었다. 건물도 조각도 화려했지만 날씨 탓인지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음산한 느낌마저 주었지만 결코 음침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 우아해 보이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30분간의 가이드투어는 역시나 어려웠다. 빠르게 지나가는 말은 따라가기 급급했고 이해를 하기도 전에 바뀌는 주제를 기억하기는 무리였다. 사진촬영이 안 되는 내부에 아쉬움도 잠시였다. 아마 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찍느라 가이드에 하나도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은 공간에 화려함이 가득했다. 위를 봐도 아래를 봐도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내 안의 까마귀가 저 거울을 가지고 싶다 말하고 내 안의 빨간 피가 위정자의 사치에 혁명! 을 부르짖었다. 마음 한구석의 소시민이 혹시나 부딪칠까 가방을 정리했고 그 옆의 몽상가가 이런 방에서 잠을 자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했다.
궁전은 작고 사치스러운 커다란 보석함이었다. 하이라이트는 투어의 마지막인 거울의 방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가득한 거울이 금장식과 부조들, 샹들리에를 비추고 있었다. 프랑스왕조를 동경했고 그들의 궁전을 탐냈던 루드비히 2세는 본인의 궁전마다 거울의 방을 만들어 두었다.
나는 이 정도의 화려함에도 질릴 것 같은데 가이드는 이것이 루드비히의 제일 작은 거울의 방이라고 말한다. 내일 가볼 궁전이 한층 더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나와 정원을 구경했다. 날이 서서히 개고 있어서인지 계속 움직여서인지 춥지는 않았다. 궁전 맞은편의 계단식으로 조형된 건축물도 구경하고 크게 돌아 뒤쪽으로 향했다.
루드비히 2세는 음악가 바그너의 열렬한 팬으로도 유명했는데 오로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감상을 위해 궁 뒤편에 인공동굴을 만들 정도였다. 사진촬영은 가능했지만 나의 카메라에는 심령사진으로 나왔다.
동굴 벽에는 거대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앞쪽의 연못에는 배가 하나 띄워져 있다. 실제로 루드비히가 이곳에서 <탄호이저>를 관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그너에 대한 팬심 하나만큼은 어마무시했던 거 같다.
작은 부속건물들까지 다 보고 나오자 정원의 분수에서 짧은 분수쇼가 시작되었다. 화려한 기교는 없었지만 높게 솟구치는 물기둥과 배경으로 보이는 숲과 성이 꽤 그럴싸했다. 루드비히 2세가 보고 싶었던 것은 이런 풍경이었을까.
분수까지 보고 나니 슬슬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올 때 찍어두었던 버스시간을 확인하니 아뿔싸. 또다시 버스를 놓친 터라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아까워하기에는 버스시간에서 40분이나 지나있어 아쉽지도 않았다. 공원을 한번 돌고 아래 매표소로 내려왔다. 가만히 있으면 추워지는 날씨에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길을 따라 걸어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앉을 곳도 없는 그 정류장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이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 것이 더 괜찮을 거 같았다. (추위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던 거 같다.)
한 시간 가까이 도로를 따라 걸었다. 멀리 보이는 산 위로 눈이 희끗희끗 보였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가 있었지만 교통량이 많지는 않았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끝도 없어 보이는 길을 걷다 보니 여기서 차에 치인채 방치되면 아무도 모르겠다 싶어졌다. 한참을 걸어 내려와서야 위기감이 드는 게 우스웠다.
1시간쯤 걸어 내려왔을까 다리를 하나 건너니 마을이 보였다. 다리 밑으로 쌩쌩 지나가는 차들도 많아진 것이 이쯤 해서 정류장을 찾으면 되겠구나 싶어졌다.
구글맵이 알려주는 정류장에 앉아 또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다행히 몸의 열이 식기 전에 버스가 도착했다. 15분 정도 앉아있으니 한번 와봤다고 익숙한 정류장이 눈에 보였다.
오늘 하루는 기다림의 날이라고 불러도 좋을듯했다. 버스에 내려서 나는 또다시 뮌헨으로 향하는 열차를 20분간 기다렸다.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는 하루였지만 그 사이에 본 풍경들이 만족스러워서 기쁜 하루였다.
안개 낀 산과 조금만 멀어지면 성은 제 모습을 감추었다. 날씨 탓인지 몽환적이기까지 한 공간은 마치 깊은 숲 속에 숨겨진 보물 같은 감상을 주었다. 성의 주인이 여기에서 숨고 싶었던 것인지 쉬고 싶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조금은 외롭게 보이는 그 모습이 나는 좋았다.
눈이 아릴 정도로 실컷 본 황금 장식도 예쁘지만 안갯속에 쌓인 성의 풍경은 정말 오랫동안 기억할듯했다. 그 속이 얼마나 요란하게 빛나든 겉으로는 조용했던 작은 궁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오고 가는 길이 힘들어서 더 기억에 남는 것 같기도 하다.
숙소에 들어와 뜨끈한 물로 샤워하며 감기기운을 털어냈다. 어제 만난 외국인 남자가 보드카 한잔이면 감기는 끝이라고 주장하던 게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이 사준 보드카 덕인지 아니면 한국에서 가저온 감기약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 떠날 길이 복잡하니 미리미리 준비해 일찍 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