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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34

분홍빛 설렘이 찾아오면

by 강단화

2016.10.10

München, Deutschland


뮌헨에서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굳이 따지자면 프랑크푸르트로 떠나는 내일이 마지막날이겠지만 온전한 하루를 즐길 수 있는가를 본다면 오늘이 실질적인 마지막 날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도시를 알차게 즐길 수 있을까 고민해 봤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또 성을 찾아갔다.


뮌헨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곽에 님펜부르크 궁전이 있다. 이름부터가 요정(Nymp)에서 따온 이 궁전은 과거 바이에른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된 궁전이자 뮌헨에서 지겹게 들은 루드비히 2세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가깝고 교통편이 편리해 마지막까지 방문을 미뤄둔 곳이기도 했다.


부지런히 숙소에서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하며 캐리어와 가방을 맡겨두었다. 어제 들은 것과 같은 다시 체크인 관련 설명을 듣고 가볍게 길을 나섰다.

1회 교통권을 끊고 트램에 올라 성으로 향하는 내내 흐릿한 날씨가 걱정이었다.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짙은 구름이 언제든 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제발 비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빌며 여름 별궁으로 향했다.


트램에 내려 궁으로 향하는 길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궁에 다가갈수록 넓은 공원 사이사이 관광객과 가벼운 산책을 하는 주민들이 보였다.

티켓을 교환하고 중앙건물을 먼저 관람했다. 공개된 건물내부는 역시나 고전적이고 우아했다. 그러나 이미 루드비히 2세의 궁을 보고 나니 '화려하다'라는 감상은 조금 적게 느껴졌다.


외관 자체도 단조롭고 장식적인 요소도 거의 없었기에 '궁전' 보다는 '관공서'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어찌 보면 님펜부르크야말로 처음 독일의 궁전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붉은 지붕의 건물은 네모나고 단순하며 강조할 부분에만 약간의 장식을 두었다. 그러나 그게 빈곤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절제된 장식에서 나오는 멋이 있었다.

20161010_133132.jpg 멀리서 찍은 궁전의 전경. 별궁보다는 청사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렇다고 궁전이 화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어제 보았던 헤렌킴제 성과 비교했을 때 덜 화려하다는 것이다. 태양이 그려진 천장화가 인상적이었던 홀은 커다란 샹들리에들이 내려와 외부의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이쯤 해서 구름이 물러나기 시작해서인지 창밖으로 들어온 햇살이 여러 개의 샹들리에에 부딪쳐 반사되었다.


님펜부르크 궁전을 방문하기로 했을 때 내게는 3개의 목적지가 있었다. 하나는 정원에 놓인 작은 사냥별궁과 또 왕실의 탈것들을 전시해 둔 박물관, 마지막으로 당대 미인들의 초상화를 전시해 두었다는 미인화 갤러리였다.

그중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미인화 갤러리였다. 이름부터가 < King Ludwig I's Gallery of Beauties>, 루드비히 1세의 아름다움의 화랑이다. 화랑의 주인은 이제는 너무 익숙한 루드비히 2세의 할아버지 되시겠다. 나에게는 조금 징그럽게 느껴지는 이름이었지만 모두가 유명하다 하니 방문한 김에 꼼꼼히 봐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름에서 알수있다싶이 그냥 당대의 미인들의 초상화가 걸린 작은 방이었다. 하얀 벽위로 같은 크기의 네모난 액자에 여자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약간은 기괴하다 싶은 배치였다. 화랑의 주인이 이걸 보고 기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타입의 인테리어는 아니었다.


그림 속 여성들은 각기 다른 옷과 포즈를 가지고 있었다. 언뜻 보자면 얼굴들이 다 비슷비슷한가 싶지만 가만 뜯어보면 하나하나가 다 다른 사람이었다.

그림 속 수많은 얼굴 중 익숙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발견했다. 분명 본 적 없는 그림인데 묘하게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어 그 그림만 보게 되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엄마의 젊었을적 사진 한 장이 스쳐 지나갔다.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는 20대의 엄마 사진과 그림의 색감과 구도가 비슷했다. 얼굴이 닮았다기보다는 색감과 분위기가 닮아서 한 번에 떠올리지 못했던 듯하다.


갤러리를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구름이 많이 걷혀 햇살이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약간은 쌀쌀한 기온에 부러 햇살이 다은 길만 밟으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다음 목적지는 정원 속 작은 사냥별궁이었다.

내가 별궁에 대해 아는 거라곤 '궁전 안에 핑크색의 사냥별궁이 있다.'뿐이었다. 블로그에서 본 핑크빛 벽돌이 예뻤기에 딱 그것만을 기대하고 길을 나섰다.


정원 내부를 조금 헤매다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핑크빛 외벽에 홀린 듯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은 노후된듯한 문 사이로 관광객이 나오는 게 보였다. 겉으로만 보면 입장이 안될 것만 같은 상태와 분위기인데 다행히도 내부관람이 가능해 보였다.


티켓을 확인하고 쭈뼛이며 관람입구로 다가갔다. 작은 별궁은 방금 전 나간 손님이 마지막이었는지 나의 발자국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침대인지 소파인지 모르는 게 놓인 작은 방과 그림들이 잔뜩 걸린 방을 있었다. 몇 개 없는 작은 공간은 마치 인형의 집 같았다. 여기저기 금이가고 색이 바랜 기물들을 보자니 내가 작게 변해 오래된 인형의 집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특히나 관람 끝부분에 자리한 부엌은 그런 인상을 더 짙게 만들어주었다. 타일로 가득한 푸른색의 부엌은 요리를 위한 부엌보다는 소꿉놀이를 위한 장소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랑스러운 공간 중 제일은 거울로 가득한 작은 방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여기서 볼 거라 기대치 않은 반짝임이 한눈에 쏟아졌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덩그러니 서있다 보니 내가 이 공간의 주인인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20161010_123625.jpg 사방에서 들어온 햇살이 거울에 반사되었다


짧은 레드 카펫을 괜히 두어 번 왕복해 봤다. 빛이 들이치는 공간은 딱 기분 좋게 따뜻했고 고요했다. 괜스레 웃음이 삐져나왔다. 조금 더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면 좋겠지만 얼마 되지 않아 소란스러운 발걸음이 들려왔다.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들어왔는지 아이의 목소리도 홀을 따라 울렸다.

마치 짧고 단 낮잠을 꾼 기분이었다.


사냥용 별장까지 보고 나니 남은 곳은 마르슈탈 박물관뿐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이 박물관은 왕실의 마차나 썰매 따위의 탈것들과 마구(馬具)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들어서자 보이는 번쩍이는 황금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궁전에 발랐어야 할 황금을 죄다 이곳에 있는 마차에 발랐는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번쩍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시대별로 양식과 정도가 달랐으나 어느 하나 값싸보이는 게 없었다. 절로 벌어지는 입을 닫으며 눈을 굴렸다.

과거에 이런 마차들을 타고 황제가 행차했다면 절로 눈을 내리 깔았음직한 인상이었다. 물론 내가 굶고 있는 백성이었다면 이 마차에 탄 인간을 죽어서도 저주할 것 같은 사치스러움이었다.

20161010_125806.jpg 나는 태워준다 해도 부담스러워서 도망갈 마차였다.


소소하게 시작했다 화려함으로 끝난 궁전 관람을 마치고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워 저번에 다 보지 못했던 레지던츠로 향했다. 마지막까지도 별궁에서 왕궁이라니. 결국 나에게 뮌헨은 궁궐의 도시였다.


저번에는 시간관계상 듣지 못했던 오디오 가이드도 듣고 마음에 들었던 전시품은 다시 한번 천천히 바라보았다. 요일별로 오픈되는 방이 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넓어 나의 기억이 착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번 방문에는 열려있던 문이 닫히거나 잠겨있던 문이 열린 곳도 있었다.


오늘치의 반짝임은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보석과 조각이 반짝이니 도로 신이 났다. 시간이 넉넉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관람하고 나오니 마감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체크인을 하고 방을 배정받았다. 저번방과 달리 전부 다 여자였기에 훨씬 편하게 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따로 옵션이 없거나 추가금을 내어야 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 정도 쾌적함이면 조금 돈을 주더라도 여성전용방을 예약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쾌적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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