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언제나 어려워서
2016.10.11 ~ 13
Frankfurt am Main, Deutschland
Barcelona, Spain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예상보단 이르지만 외출을 준비하는 여행자의 소리에 맞춰 나 역시 일어났다. 간단히 씻고 짐을 점검했다. 그러고도 체크아웃을 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잠시 근처 마트를 다녀오기로 했다.
한동안은 먹지 못할 독일의 빵을 구매하고 남은 판트도 완료하자 얼추 체크아웃시간이 맞아떨어졌다.
키를 반납하고 받은 보증금까지 소중히 챙기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3시간 동안 이어진 지루한 기차여행은 꾸벅꾸벅 졸다 보니 의외로 금방 지나갔다. 역을 지나칠까 봐 억지로 눈을 뜨다가 그냥 알람을 맞춰두고 속 편히 잠들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1시간 반 뒤, 조용히 울린 진동이 나를 깨워주었다.
독일의 다음 여행지는 스페인이었지만 뮌헨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바로 가는 표를 구하지 못했기에 나는 굳이 굳이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항상 당하는 거지만 변동성은 즉석으로 목적지를 정하는 자유여행의 단점이자 특징이었다.
다시금 프랑크푸르트에 숙소를 구하다가 맨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포함되었던 친한 이모의 지인인 B가 떠올랐다. 여행에 와서도 연락이 이어졌기에 혹시나 싶어 여쭤보니 다행히 신세를 질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내가 이틀밤동안 머무를 곳이 생겼다. 불편한 교통과 불편한 짐 때문에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B가족의 집에 입성할 수 있었다.
B는 고맙게도 나를 픽업하러 마을 역까지 나와주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초행길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미 나는 행복했다. 집으로 가기 전에 잠깐 장을 보고 들어간다는 B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를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말하니 영 안 믿는듯한 웃음이 돌아왔다.
마트는 내가 한 번도 안 들어가 보았던 브랜드였다. 역시나 여타 브랜드처럼 다양한 제품들이 가득했다.
그동안은 바로 먹을 수 있는 완제품이나 약간의 조리만 있으면 되는 가공품을 보다가 B의 가족을 따라 원재료들을 구경하니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짧은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마치 작은 단지처럼 세로로 길쭉한 집들이 저들끼리 모여있었다.
첫 숙소인 한인민박 역시 독일에 사는 한국인이었지만 영업장이고 여러 이유로 당연하게도 '집'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렇기에 B의 집은 내가 처음으로 머문 '외국에 사는 한국인의 집'이었다. 일반가정집보다는 하숙집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신기한 경험이었다.
B의 집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내가 온전하게 머문 시간은 하루였기에 대화를 할 시간은 없었다. 그나마 사람과 대화한 것은 첫날 저녁에서 B의 가족과 식사를 할 때와 같은 방을 쓰는 B의 딸과의 수다가 다였다. 오랜만에 먹는 한식을 맛있게 먹고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길지 않은 대화 속 느껴지는 삶의 피로와 고단함에 괜히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인지 혹은 타인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둘째 날 오전은 내일 떠날 여정을 준비하고 스페인에서의 계획을 짜며 보냈다. 오후에는 부족한 생필품을 사러 길을 나섰다. 렌즈를 더 사고 싶었지만 근처에 있는 드럭스토어는 다른 브랜드여서 포기했다. 무엇이든 넉넉하게 모아두고 싶은 성격이라 이미 렌즈가 있는데도 2개쯤은 더 쟁여놓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어린아이 둘을 만났다. 당연하게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걸 보는 게 어색했다. 나도 소심하게 'Hi'를 내뱉고 손을 들었다. 자연스레 행동하고 싶었는데 내가 느끼기에도 뚝딱거리는 인형 같았다. 뛰어가는 아이는 B의 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떠나는 날 B는 마을역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역시나 무거운 짐을 끌고 새벽부터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이르게 나오느라 인사를 전하지 못한 B의 딸에게 안부를 전하고 작은 열차에 올랐다.
한 시간을 조금 안 달리고 멈춘 역에서 다시 공항으로 가는 열차로 바꿔 탔다. 한 달 전과 반대방향에서 본 플랫폼은 조금 어수선하고 추웠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당당히 수속카운터로 갔지만 나를 반기는 건 텅 빈 데스크였었다. 저가항공사라 그런지 아직 닫혀있는 창구 앞에서 사람구경을 시작했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내 주위에 하나씩 수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다행히 동료들이 생긴 덕에 외롭지는 않았다.
출발이 2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 공항 카운터가 열렸다. 짐을 맡기고 혹시나 싶어 잘못 예약한 표를 취소할 수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역시나 안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보안구역을 통과하고 다시 기다리고, 비행기에 앉고 또다시 기다렸다. 언제나 그렇듯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하지 않는다.
2시간의 비행 끝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새로운 나라다.
그 무엇보다 이곳이 스페인이란 걸 알려주는 것은 시끄러운 공항도, 여기저기 도배된 기념품도 아니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열기가 이곳이 스페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독일을 떠날 때의 최고기온은 9도였다. 그리고 정오가 되지 않은 바르셀로나는 기온은 19도였다. 당장이라도 입고 있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짐을 찾는 내내 삐질삐질 땀을 흘리던 내게 구원이 되어준 것은 공항버스였다. 빵빵하게 나오는 에어컨을 배경으로 'Hola(안녕)!'를 외치는 아저씨에게 후광이 보이는듯했다.
시원한 버스로 땀을 식히며 숙소로 향했다. 관광지 근처의 대형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다.
짐을 정리하고 다시 먹통이 되어버린 핸드폰으로 와이파이를 잡았다. 지도를 다운로드하고 알아두었던 목적지를 저장하며 부선을 떨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가장 중요한 휴대폰 개통을 위해 호스텔을 나왔다. 들어올 때만 해도 부슬비가 내리고 있긴 했지만 그새 빗줄기가 꽤 굵어졌다. 에니카에게 받은 우산을 챙겨 들고 서둘러 길을 찾았다.
성공적으로 휴대폰에 데이터를 채워 넣고 근처 마트로 향해 비상식량도 든든히 구매했다. 빈 가방이 채워지니 괜스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계산은 20분이나 걸렸지만 말이다.
태양과 열정의 나라는 비와 천둥, 그리고 번개로 첫인사를 건넸다. 숙소에 앉아 사온 납작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다들 칭찬이 자자했는데 나는 독일에서 먹은 게 더 달게 느껴졌다.
한 손에 과일을 들고 가만가만 빗소리를 듣다 보니 이것도 꽤 나쁘지 않구나 싶어졌다. 그동안 독일에서 만난 비는 안개처럼 내리거나 부슬비가 조금 내리다 만 터라 이렇게 굵은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저녁이 깊어지자 건물이 부서져라 내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물에 젖어 빛나는 야경을 구경했다. 거친 비바람이 지나간 내일은 한층 더 쾌청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