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열여덟 유럽일기 037

내가 좋아하고 네가 좋아한다면

by 강단화

2016.10.15

Barcelona, Spain


원래도 엄청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스페인에 와서는 뭔가 방탕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단 이틀 만에 뭐 한 것도 없이 이런 기분을 느끼나 싶었지만 이틀 연짝으로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정오가 다되어가는 시간에 눈을 뜨다 보니 일기가 저절로 반성문으로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덜 든 철 때문인지 바르셀로나의 마력인지 그런 이틀이 너무 재밌어서 앞으로도 이러고 싶단 생각이 솔솔 솟아오른다. 물론 얇은 지갑을 제하고도 저질체력 때문에 무리겠지만.


쨍하게 내리치는 햇살을 경계하며 얼굴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옷도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 얇은 것을 꺼내 입었다. 그 와중에 다리를 내보이는 게 싫어 레깅스스타킹을 꺼내 신었다. 방안에 달린 거울을 보니 살이 좀 빠진 거 같았다. 내 배에서 복근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걷기만으로 6kg 가까이 감량한 게 신기하다. 매일 5시간 동안 걸으니 열량은 소모되고 타지라 긴장을 계속하게 되어 잘 먹지도 않으니 살이 빠졌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내 허벅지가 여전히 뚱뚱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코웃음 하나로 날릴 생각이지만 열여덟의 나는 내 다리가 아이돌 같은 다리가 아니기 때문에 맨다리를 보이는 게 창피하단 생각을 했다.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생각인지.

내 과거 사진에서 창피한 건 튼실한 허벅지도 바보 같은 웃음도 아닌 원색 반바지에 검은 스타킹을 신는 괴랄한 패션센스뿐이다.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숙소를 나왔다. 저녁을 어제 만난 E언니와 같이 먹기로 했기에 그전까지 목표한 곳을 다 들려야 했다.

오늘의 여행은 어제와 비슷하게 '가우디 투어'가 콘셉트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천재 건축가의 건물이 성당과 구엘저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거리를 조금 걷다 보니 얼마 되지 않아 목적지가 보였다. 언뜻 봐도 '나 가우디의 건물이에요'를 온몸으로 외치고 있던 건물은 외관부터 반짝이는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카사 바뜨요'. 우리나라말로 바꾸면 단순하게도 '바뜨요의 집'이 된다. 꽤 잘살던 바뜨요씨가 옆집보다 멋있는 집을 원해 의뢰한 집은 이제는 세계 각국에서 오는 관광객을 맞이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바뜨요씨는 잠깐의 선택으로 집자랑을 백 년 넘게 하고 있다.


표를 사고 오디오가이드를 받고 드디어 들어간 건물의 첫인상은 '복잡하다'였다. 어제 갔던 구엘 저택의 3배는 되는 사람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입장대기가 있어 어느 정도 각오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오디오가이드 화면에 띄워주는 내부를 보며 사람들 사이에 서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맨눈대신 화면을 보고 있는 스스로에게 살짝 실망할 찰나, 단체 관광객이었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쑥 빠져나가고 공간이 생겼다.

사람이 빠지자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에서 빛을 받아내던 유리창은 내부에 오니 그 진가를 발휘했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은 따뜻했고 내부의 벽과 부딪치며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가우디 특유의 곡선으로 가득한 내부장식들은 그 분위기에 완벽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나무와 타일과 유리라는 서로 다른 성질들이지만 어느 하나 본질을 죽이고 묻히지도 않으며 서로 다름을 뽐내며 어울리는 것이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제일은 지붕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났다. 계단옆으로 작게 만들어진 중정에는 타일로 이루어진 바다가 놓여있었다. 기다란 벽을 따라 촘촘히 붙어있는 타이를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 짙푸른 색을 띄웠다.

보는 위치와 빛에 따라 바다같기도, 하늘같기도 한 그 계단참이 참 아름다웠다. 층마다 놓인 유리난간은 부러 구불구불하게 울고 있었는데 그 창을 통해 벽을 바라보면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20161015_131022.jpg 흔들리고 비틀린 것처럼 보이는 유리너머의 풍경


타일로 이루어진 바다를 오르면 알록달록한 타일이 장식된 작은 옥상이 나타났다. 마치 도마뱀의 비늘처럼 동글 거리는 장식이 달린 입구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예쁜 하늘과 색색의 타일은 꽤 예뻤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이리저리 치이며 구경해야 했다.


길게 뻗은 특이한 굴뚝을 구경하고 도망치듯 옥상을 나섰다. 다시금 바다를 가로질러 천천히 내려가면서 혹시나 놓친 장소가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퍼즐같이 조형된 나무문을 구경하고 거칠 거리지만 단단해 보이는 기둥도 다시금 살펴보았다.


건물을 나서면서 다시 한번 목을 치켜들어 건물전체를 눈에 담았다. 한때는 '뼈의 집'이라 불리었던 빌라는 알록달록한 타일을 배경으로 기묘한 하얀 테라스를 자랑하고 있었다. 문득 건물자체가 거대한 도마뱀 몇 마리를 잡아다 지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양이질 때쯤 본다면 더 예쁠 건물이었다.


'카사 바뜨요'를 나와 몇 블록 더 직진하다 보니 다음 목적지가 나왔다. 아까와는 달리 반사광에 눈이 아파오는 '카사 밀라'가 내 앞에 나타났다. 햇살을 받은 건물은 맨눈으로 보기 조금 괴로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워낙 강한 햇살에 이미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선명한 색을 위해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자 두 눈으로 찌르는듯한 햇살과 건물이 들어왔다.


매끈한 외벽은 하나의 모래언덕 같았지만 차근히 떼어보면 조금씩 색이 다른 벽돌이 쌓아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입구 쪽으로 다가가 표를 끊고 내부로 들어가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밝은 외부와 달리 빛이 막힌 중정은 한낮의 햇살을 받으면서 저녁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앞의 두 가우디의 건축물과 달리 카사밀라는 지금까지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보기만 해도 꿈결 같은 중정을 가로질러 출퇴근을 한다면 꽤나 좋은 하루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부러움이 솟아올랐다.

인상 깊은 중정을 지나 이곳의 하이라이트인 옥상으로 향했다. 사람이 살고 있기도 했고 개방된 구역이 많지 않아 일부러 옥상을 찾아간 게 아님에도 금방 옥상에 도착해 있었다.


문을 나서자 나를 맞이한 건 사막이었다.

기이하게 생긴 굴뚝들은 전에 보았던 알록달록한 색깔대신 모래언덕 같은 색만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타일을 붙여둔 굴뚝도 하얀색계열로 맞춰놓았기에 옥상은 하나의 작은 사막 같은 느낌을 주었다.

투구를 쓴 얼굴 같기도 하고 나무 열매 같기도 한 그 모양들을 보자니 영화 <스타워즈>의 감독이 여기서 영감을 받았단 소리가 왜 나오는지 알 거 같았다.

20161015_135930.jpg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기묘한 굴뚝들을 실컷 구경했다


카사바뜨요보다는 훨씬 적은 관광객들이었지만 그나마 볼 것이 옥상이기에 다들 몰려있었다. 그럼에도 워낙 넓고 구조가 꼬여있어 사람이 많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복잡한 계단과 조형물 사이를 마치 비밀기지 돌아다니듯 쏘아다니며 옥상과 바르셀로나 전경을 실컷 구경했다.


옥상에서 내려와 작은 가우디 전시관을 구경하고 건물을 나왔다. E 언니와 저녁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만나기로 한터라 약속장소로 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듯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젤라토를 하나 사들고 시내를 구경했다. 돌아다니다 가우디가 만든 가로등을 보고 달려 나가자 언니가 사진을 찍으라며 나를 재촉했다. 사진을 찍는 게 영 어색하고 누군가 찍어준다고 포즈를 잡으라고 하는 건 더 어색했다. 뚝딱거리며 포즈를 바꾸는 나를 언니는 참 열심히도 찍어주었다.


나 역시 언니의 사진에 힘을 내어보았으나 결과는 잘 모르겠다. 부디 언니가 나중에 사진을 보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과에 자신이 없으니 물량공세를 펼쳤다. 100장을 찍으면 1장이라도 건지겠지. (아직까지도 나는 사진을 찍을 때 물량공세를 펼친다.)


유명한 람블라스거리를 쭉 따라 걷다가 해변가에 도착했다. 요트들이 가득한 선착장에서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다 보니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레 우리 둘은 언니가 미리 찾아본 식당으로 향했다.

타파스(식사보단 술안주에 가까운 한입거리의 가벼운 음식) 전문점이라는 식당은 꽤 맛있었다. 맥주를 한잔씩 주문하고 타파스도 두어 종류 시켰다.


추천받은 바게트 위에 무화과와 하몽이 올려진 타파스가 나왔다. 나는 딱 두입으로 먹을 수 있을 거 같았고 아빠라면 한입에 다 넣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조금 무리해서 크게 베어 물자 숨어있던 크림치즈가 입안에서 으깨졌다. 부드러운 치즈를 씹을수록 하몽의 짭짤한 맛을 잡아주며 동시에 무화과의 달짝지근함과 잘 섞이게 도와주었다.

버섯을 워낙 좋아하는 나의 주장으로 주문한 버섯해산물 역시 맛있었다. 전체적으로 짭짤했지만 맥주 안주라고 생각하니 괜찮은 정도였다. 다만 조금만 덜 짰으면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기는 했다.


식사를 마치고 어제 불발되었던 분수를 보러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니 관광객들이 모두 한쪽으로 열심히 걸어가는 게 보였다. 우리도 그 행진에 합류했다.


맥주를 한잔씩 손에 들고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운이 좋게도 시야를 가리는 사람 없이 분수를 볼 수 있었다. 어두워진 광장을 배경으로 화려한 분수쇼가 시작되었다.

노래와 빛이 가득한 분수쇼는 예뻤지만 혼자라면 부러 보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두운 시간에 사람이 많고 술을 파는 곳에 혼자 가는 것은 아직 내겐 위험한 도전이었다. 일행이 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빠르게 바뀌는 빛을 구경하는데 언니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라며 기뻐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클래식의 변주곡이었다. 곧이어 내가 좋아하는 팝송도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내가 좋아라 했다.


"네가 좋아하는 거랑 내가 좋아하는 게 잘 섞였네. 그래서 우리 둘 다 좋아하나 보다!"


분수를 배경으로 들리는 E언니의 말이 가슴에 콕 박혀왔다. 꼭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로의 좋아하는 것이 반절씩만 들어가도 좋았다. 내가 느끼는 것만큼의 기쁨을 동행이 함께 느낀다는 게 이런 거구나. 같이 여행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과 느낄 줄 몰랐던 즐거움이 차올랐다. 여행지의 동행이 이런 거구나.

즐거운 저녁이었다.


keyword
이전 26화열여덟 유럽일기 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