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득한 심해 속에서
2016.10.16
Barcelona, Spain
늦은 밤, 분수를 보고 헤어지며 E언니와 나는 다음날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오전 8시 이전에 들어가면 구엘공원은 입장료가 없다는 소식에 한 푼이라도 아낄 겸 + 일출을 구경할 겸 일찍 만나 공원을 함께 가기로 했다.
다만 숙소에 들어와 자려 누우니 2시가 다 되었고 공원에 늦지 않게 갈려면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나를 괴롭혔을 뿐이었다. 요 며칠 생활패턴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반 강제나마 이른 기상을 해낸 게 대견하기까지 했다. 하.
비척비척 일어나 세수를 하고 덜 깬 머리로 매트로에 올라탔다. 다행히 무사히 언니를 만나고 일어난 지 한 시간밖에 안된 몸뚱이로 오르막길을 올랐다. 예상치 못한 새벽운동이었지만 7시 반까지 무조건 공원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입에서 단내가 올라올 때쯤 우리는 구엘공원 후문을 지날 수 있었다.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밤에 가까운 뒷골목이었는데 후문을 넘자 새벽공기가 가득한 전경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자리를 잡자 하나둘씩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주변이 조금 밝아지더니 곧이어 붉은 해가 새벽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구름 낀 하늘 위로 태양이 솟아올랐다. 생각한 것보다 선명하지 않았지만 기대한만큼 멋있었다. 분명 건물의 형태만 보였었는데 음영이 짙게 깔린 세상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색깔을 찾아가는 게 아름다웠다.
한번 세상이 빛을 받자 순식간에 날이 밝아왔다.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부지런히 공원의 마스코트를 보러 내려갔다. 가는 길에 텅 빈 통로에서 자연물의 모양을 따라 비스듬한 기둥을 구경하고 그 앞에서 요상한 사진도 서로 찍어주었다. 다리가 길어 보이게 괜히 몸을 쭈욱 늘려보기도 했다. 결과물은 둘 다 그저 그랬지만 그냥 그렇게 놀며 내려가는 게 즐거웠다.
귀여운 타일 도마뱀과 사진을 찍고 여유롭게 공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금세 떠오른 해처럼 사람들도 눈 깜빡한 사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추 독사진을 건졌던 게 꿈처럼 사람들이 가득 밀려들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볼거리가 넘쳐났다. 얼핏 투박해 보이던 울퉁불퉁한 돌기둥은 언덕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일정한 규격을 가지고 길을 지탱하고 있다. 기둥에 뭉툭한 돌로 쌓인 여인상을 보다 보면 자연물을 활용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든다.
가우디는 직선에 알레르기가 있었다는 농담처럼 어딜 봐도 유선형이 보였다. 차가운 타일로 어떻게 저렇게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조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름다웠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아마 한참을 타일의자 위에서 뒹굴었을 것 같았다. 가우디가 20년간 살았다는 저택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기회가 안되었다.
구엘공원에 3시간 가까이 머물렀는데도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냥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일찍 시작한 하루였지만 일정으로 꽉꽉 찬 날이었다. 언니와 나는 공원을 나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병원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산 파우 병원"은 가우디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건축가 "루이스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의 작품이다. 바르셀로나의 건축을 말한다면 가우디만 알고 있던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이 사람 역시 뛰어난 건축가였다. 바깥에서 건물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건축에 무지렁이인 나이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움을 모르는 건 아니다.
붉은 벽돌의 외벽 사이사이 화려한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입이 벌어지는 조각이 첨탑 앞에 서있고 그 주위로 작은 금장식이 달린 지붕이 보였다. 높게 높게만 올라갈 줄 알았는데 옆으로 눈을 돌리면 이슬람 사원처럼 둥근 지붕이 자태를 자랑했다. 오묘하게 섞인 그 양식이 마치 판타지 속의 왕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 언니는 병원이 마치 과거 번영했던 영업이 끝난 테마파크 같다고 말했다. 나 역시도 생활감 없는 그 건물들에게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산파우는 지금은 운영되지 않는 병원이었지만 그렇다고 병원의 흔적이 사라진 곳은 아니었다. 정문을 지나 통로를 이동하여 부지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 통로는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환자를 수송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부지 내부에 건물은 일부만 공개되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타일로 이루어진 내부는 화려하고 밝았으며 장식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났다. 또한 곳곳에 환자를 배려하기 위한 장치가 있었는데 기술적 측면보다는 정서적인 배려가 더 돋보였다. 어딜 보든 성화와 십자가가 보였고 단 한시도 녹음이 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현대의 수술이나 처치를 하는 병원보다는 요양을 위한 호스피스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마 기대보다 더 미학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인듯했다. 건물을 지은 몬타네르는 "예술에는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라고 믿었다 한다. 그리고 그 신념의 정수가 바로 산 파우 병원이라 생각됐다.
병원까지 다 보고 나오니 점심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언니가 찾아본 식당으로 향했다. 스페인식 해물볶음밥인 빠에야를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다음 일정이 있는 언니를 배웅하고 숙소로 돌아와 잠깐 휴식도 가졌다. 다음 일정을 위해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금 길을 나섰다. 드디어 스페인에 온 목적이자 내 버킷리스트의 한 줄을 지울 시간이다.
예전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본 적 있다. 빛이 가득한 내부가 화면에 가득 차고 세세한 부조가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늦은 오후 우연히 본 그 장면 하나로 내 버킷리스트가 새로 추가되었다.
언젠가는 저 땅에 가봐야지. 직접 저 빛을 보고 저 기둥을 만져봐야지.
그 커다란 건물이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동당거렸다. 이제껏 어떻게 참았는지 정문을 본 순간 심장이 쿵쿵 뛰고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사진으로, 영상으로 보던 입구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소음들이 멀어지고 눈을 찌르던 태양이 색을 바꿨다. 빛으로 가득 찬 그 공간에서 절로 넋을 잃고 눈을 굴릴 뿐이었다.
쭉쭉 뻗은 백색의 기둥을 따라 고개를 올리면 열매와 꽃이 가득한 천장이 보였다. 세심하게 뻗은 천장을 눈으로 훑고 내려오면 거대한 스테인 글라스가 색색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위치에 따라 들어오는 색들도 달라서 마치 거대한 공간이 구역으로 나뉘어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맞은편에 서있던 여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자연스레 서로를 보고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금방 서로를 스치고 둘 다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운이 좋게도 붉은빛이 들어오는 창가 아래에 앉을 수 있었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푸른색의 빛을 계속계속 바라보았다.
마치 물속을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잠을 못 자 졸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멍한 머리는 색들만 바라보고 반짝이는 유리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꿈결 인가 싶어 가만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뜨면 아직도 찬란하게 빛나는 빛들이 꿈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
카메라를 아무리 조작해도 그 빛을 다 담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업으로 삼는 카메라 감독들도 이 빛을 다 담을 수 없었다. TV로 보던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따끈한 공기와 등을 기대고 있는 돌벽의 서늘함,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얼굴에 일렁이는 푸르고 붉은 그 빛들을 어떻게 카메라가 잡아낼 수 있을까.
너무나 안온했다. 동시에 북적였으며 남들에게 설명하기 힘든 벅참이 차올랐다. 아마 성취감이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유럽여행을 계획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떠올렸고 방문을 계획했다. 계획과 일정은 처음과 많이 달라졌으나 결국 나는 직접 그 빛들을 느끼고 기둥들을 만졌다. 건물자체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몇 년이나 소원하고 그리던 일이 현실로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 내가 계속 달려왔다는 사실이 더 큰 감상을 주었다.
저녁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오늘 맛본 감정을 꼭꼭 씹어 내 안에 가득 쌓아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