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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39

나의 여행은 이빨로 오렌지를 까는 거야

by 강단화

2016.10.17 ~ 18

Barcelona, Spain


눈을 감으면 빨갛고 노란 꽃들이 빛을 뿌린다. 자고 일어나도 계속되는 여운에 잠을 깼음에도 도로 눈을 닫고 풍경을 꼭꼭 되새겼다. 아름다웠고 만족스러웠지만 스페인에서의 유일한 계획(이자 목적)이 끝나버리니 허전함도 느껴졌다. 여행이 한 달을 넘어가니 나른함과 귀찮음이 최고조로 치솟아 눈앞에 알짱거린다.


슬쩍 들춰보았던 세비야 쪽을 가볼까 하는데 1부터 10까지 다 다시 알아봐야 할 거 같다. 좀 더 알아보고 올걸 싶은 마음과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은 대책 없는 마음이 동시에 치고 올라왔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청소를 하러 들어온 직원을 보며 일어났다. 내 자리나마 내가 정리를 하던 중 직원이랑 눈이 마주쳤다.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던 직원은 내 건너편 침대구석에서 찾아낸 맥주캔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NO!라고 외치며 캔을 가리키는 것이 방 내부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란 소리 같았다.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니 이번엔 또 찾아낸 과자봉지를 들고 NO! 를 외친다. 혹시나 과자도 먹으면 안 되는 건가 싶어서 먹다 놔둔 과자를 들며 'No..?'라고 소심히 말해보니 고개를 젓더니 쓰레기통에 봉지를 넣고 정리했다. 그냥 방에서 먹지 말라는 말 같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나 혼날까 봐 가방을 세 내 식량창고를 가렸다. 그냥 일찍 나가거나 주의사항을 잘 읽었으면 되었을 일인데 게으름과 영어까막눈이 만나니 결국 눈치를 보게 되었다.


방에서는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아 복도로 나왔다. 의자같은 네모난 큰 창턱에 걸터앉아 밀린 검색과 통화와 예약을 해치웠다. 중간중간 나처럼 데이터를 잡으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엄청난 속도로 타자를 치고 있었는데 마치 기예같이 보일정도였다. 사무업무를 하면 모두가 저렇게 타자가 빨라지는지 궁금해졌다.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사라졌다. 늦잠으로 오전을 날린 탓도 컸다. 이대로 하루종일 숙소에만 있기는 아쉬워 나갈 채비를 했다. 검색을 하다 얻어걸린 츄러스집을 지도에 찍고 길을 나섰다. 꽈배기는 먹어도 츄러스는 먹을 일이 거의 없었기에 조금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고딕지구를 뺑뺑 돌다가 가게를 찾았다. 길이 복잡하기도, GPS가 일을 못하기도 해 한참을 돌다가 찾은 기분이었다. 작은 가게는 오로지 츄러스만 테이크아웃으로 판매했는데 약간의 대기가 있을 수 있다는 리뷰가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장님이 시에스타(스페인 전통 낮잠시간)를 즐기고 나와서인지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경쾌한 인사가 따라붙었다. 주문을 시작하자 사장님이 웃더니 한국어로 '반반?'을 물어봤다. 고개를 끄덕이니 나에게 오리지널 츄로스와 초코츄러스를 한 봉지씩 건네주었다. 나가는 길까지 한국어 인사가 따라붙었다. 엉겁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복잡한 고딕지구를 빠져나왔다.

20161017_170256.jpg 바삭하고 따뜻하고 달았다.


길을 걸으며 오리지널을 딱 한입 베어 물었다. 길거리에서 걸으면서 음식을 먹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데 도저히 참기 힘든 냄새였다. 파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튀김이 입안에서 부수어졌다. 달콤한 설탕과 바삭한 식감이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첫날 들렸던 마트를 다시 들렀다. 물도사고 요깃거리를 사러 들어갔다가 때깔이 좋아 보이는 오렌지 3개를 사게 되었다. 가격도 착하고 보는 것만으로 상큼해 사 오기는 했는데 방에 들어오니 그제야 내가 오렌지를 깔 도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매번 비슷하게 생긴 귤을 손으로 까던 터라 오렌지를 먹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단 것을 잊고 있었다.


이렇게 무대책일 수 있나 싶지만 별 수 있나. 먹고 싶어 사 왔으니 어떻게든 먹어야 할 터였다. 뽀득뽀득 물에 씻고 그대로 입에 물었다. 다음 여행에서는 반드시 맥가이버칼을 준비할 거란 다짐도 함께였다.

이빨로 까먹은 오렌지는 참으로 달고 맛있었다.


스페인에서의 목표를 재설정하느라 하루를 보내고 그다음 날도 비슷한 일정으로 움직였다. 여전히 늦잠을 잤고 한번 해봤다고 조금 능숙해진(?) 실력으로 오렌지를 까먹었다. 혹시나 룸메이트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봐 침대 커튼을 꽁꽁 친 채로 껍질을 벗겨먹었다.


어제 알아본 여행지와 예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음 목적지는 바르셀로나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나오는 지역인 '세비야'였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을 고민할 때 몇 가지의 후보가 있었다. 남부 쪽으로 쭈욱 내려가며 소도시를 들리거나 아니면 마드리드로 갔다가 포르투갈로 넘어가려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스페인을 돌아보고 싶었다. 독일과는 조금 다른 맛난 음식과 술이 내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다음을 고민할 때 E언니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본인의 계획을 말하면서 이것저것 정보까지 알려준 덕에 나는 큰 고민 없이 언니의 루트를 참고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미리미리 준비한 언니와 달리 2~3일 전에 예약하려 하니 비행기는 아예 엄두도 나질 않고 가성비라는 야간버스도 더 이상 '가성비'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여행에 이런 변수가 한두 번이었을까. 오렌지를 깔 칼이 없다고 멀쩡한 오렌지를 안 먹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빨로라도 까먹어야지.


비싼 돈을 주고 야간버스를 예약하고 손품을 팔아 방을 구했다.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방을 잡으려니 금액을 올려도 방 자체가 별로 없었다. E언니의 아는 사람이 먼저 머물고 있는 호스텔의 방을 대신 잡아 줄까 물어봐 주기도 했다. 어찌어찌 방을 구하니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저녁이 찾아왔다.


E 언니와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늦은 오후 길을 나섰다.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구글에 한국인 리뷰가 없는 동네 식당을 가게 되었다. 평점은 나쁘지 않았지만 사실 기대나 맛보다는 배가 고팠고 가려 한 곳에 가지 못했기에 선택한 차선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된 간판 밑으로 아저씨가 열심히 요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식당에는 한 커플만이 밥을 먹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너무 비어있는 식당에 멈칫하기도 잠시 도로 나갈 수 없으니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스페인어가 가득한 메뉴판을 받고 사진과 번역기를 이용해 주문을 완료했다. 내가 시킨 것은 카레처럼보이는 음식이었는데 버섯과 쌀이라는 단어에 꽂혀 주문한 음식이었다.

추천받은 레몬맥주를 따르고 한입 마셔보니 역시나 내 취향이었다. 맛있는 술에 저녁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갔다.


20161018_201720.jpg 만족스러웠던 저녁식사


오래 걸리지 않아 요리가 나왔다. 생각과는 조금 다른 비주얼이었지만 충분히 맛있어 보였다. 오랜만에 먹는 흰쌀밥을 입에 넣으니 약간은 설은 듯한 딱딱한 식감이 느껴졌다. 고기와 버섯 위로 둘러진 소스는 카레보다는 그레이비소스에 가까웠다. 달큼하면서도 후추향이 섞인 국물과 밥을 같이 떠먹으니 절로 미소가 뗘졌다.


버섯은 쫄깃하면서도 소스를 머금어 자극적이었고 고기는 칼을 대자마자 해체되었다. 입에서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게 마치 신기루 같았다. 요리에서 가장 식감이 단단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쌀밥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밥맛과는 다른 그 묘함마저도 곁들인 양념이 맛있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어졌다.


E 언니 역시도 주문한 요리가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러운 후기가 이어졌다. 정신없이 먹어치우고 빈 그릇을 아쉽게 바라보자니 언니가 나에게 눈짓을 건넸다. 언니는 조용히 옆자리 커플이 먹고 있는 디저트를 바라보며 혹시 저게 뭔지 알겠냐고 물어보았고 힐끔 본 디저트는 마치 작은 계란찜 같았다.

분명 아는 이름인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언니 역시 마찬가지라며 머리를 짚었다. 둘이 끙끙 대며 이름을 맞추려 해도 디저트의 이름은 입안에서 맴돌 뿐 튀어나오지 않았다.


결국 언니가 총대를 맸다. 익스큐즈미로 시작된 질문은 옆자리 커플의 반쯤 비워진 그릇을 가리키는 걸로 이어졌고 우리는 그 디저트의 이름이 'Crema catalana'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나와 언니는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입 안에서 맴돌던 이름은 '크림브륄레'였다. 생긴 것도 이름도 맛도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디저트였다. 그러나 맛있다는 건 동일했다.


기대치 않은 곳에서 생각보다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꽤 멋진 경험으로 보내고 있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후식을 먹고 나오긴 했지만 마지막 입가심으로 레몬 아이스크림까지 입에 물고 거리를 걸었다. 거리의 아이스크림 가게는 친절하지 않았지만 맛은 좋았다.


수다를 떨고, 거리를 구경하고, 내일의 일정을 약속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만 해도 새로운 경험을 몇 개나 했는데 내일이면 또 새로운 경험이 찾아올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야간버스를 타본다는 생각에 약간 신이 났다. 마냥 편하지는 않겠지만 '처음'이라는 수식어는 모든 걸 설렘으로 바꾸어 줄 준비를 마쳤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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