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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40

그 새벽을 건너

by 강단화

2016.10.19 ~ 20

Barcelona, Spain

Sevilla, Spain


늦은 아침을 대충 때우고 최대한 늦게 호스텔을 체크아웃했다. 나오기 전 몇 번이나 짐을 다시 싸고 점검했지만 무언갈 놓고 나온 게 없는지 불안했다. 카드를 반납하고 호스텔 한구석에 마련된 거대한 짐보관소로 향했다. 워낙 여행자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이제껏 직원이 보관하는 짐을 받아주던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마치 지하철 보관소같이 전자식으로 되어있었다.


줄을 서고 기다리는데 내 앞사람이 지폐를 넣었다 실패하는 게 보였다. 오로지 코인만 받는 것 같았다. 급하게 내 지갑을 뒤지자 1유로 하나와 센트가 몇 개 보일뿐 락커의 가격을 맞출 만큼 금액은 되지 않았다. 그냥 내 뒤에 서있는 사람한테 달라고 했다.

금발의 남자는 내가 물은 '동전 있어?'라는 말에 주섬주섬 제가 가진 동전을 다 꺼내 보였고 나는 5유로짜리 지폐를 동전 3개와 골라 교환했다. 덕분에 무사히 내 캐리어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짐을 맡기고 나와 E언니를 만났다. 세비야에 가서도 같이 다니지만 바르셀로나의 마지막까지 언니와 함께했다. 봐두었던 아시안 누들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먼저 이동해야 하는 언니를 배웅했다. '하루뒤에 봐.'라는 그 인사가 굉장히 어색하면서도 특별했다.


6일간 익숙해진 거리를 걸어 짐을 다시 찾았다. 돌돌거리며 돌아가는 바퀴가 불안했다. 독일서부터 바퀴가 영 이상했었는데 테이프로 수선을 해둔 것이 슬슬 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거리를 걸었다. 짐이 늘어났는데 그 짐이 거의 3발로 굴러가다 보니 가까운 길이 더 이상 가깝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플랫폼을 찾았다. 큰 도시의 정류장이 그러하듯 정신없이 분주했다. 눈치껏 앉아있다가 버스가 들어오길래 탑승했다. 장거리 코스라 검표를 좀 더 신식(?)으로 할 줄 알았는데 기다란 종이에 신상정보를 적고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여권을 보고 한참을 뒤져 선을 긋는 것을 보니 승객들의 개인정보가 괜찮은가 싶었다. 시작부터 얼레벌레인 야간버스다. 심지어 출발시간보다 4분 이르게 플랫폼을 떠났다.


작고 불편한 의자에 기대 지나가는 풍경들을 구경했다. 바르셀로나를 떠난다. 그토록 오고 싶어 했고 보고 싶어 했던 도시를 떠나는 것은 지금것과는 다른 기분을 주었다. 이상한 기분이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지겨울 정도로 달리던 버스는 4시간 뒤 모든 승객을 쫓아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8시 반에 갑자기 쫓겨난 나는 비슷하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관광객 옆자리에 앉았다. 1시간 동안 쉬었다 다시 출발한다는데 왜 모든 승객을 쫓아냈어야 했는지 의문이었다. 기사님의 좀 더 쾌적한 휴식을 위해서였을까.


한 시간이 지나고 내렸던 승객과 새로타는 승객들이 뒤섞여 차량에 올랐다. 비어있던 내 뒷자리에도 아저씨 하나가 들이찼다. 명이 아니라 하나로 세는 것은 그가 지독한 매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 하나가 자연스럽게 내 옆 팔걸이 쪽에 걸쳐졌다. 올라온 줄도 몰랐던 발을 알게 된 것은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꾸정내 때문이었다. 다행인 점은 내 옆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이다. 재빨리 도망가 코를 쥐어박았다. 빵빵한 에어컨 덕인지 공기순환은 되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멈추며 달리던 버스는 '야간'치고는 굉장히 밝고 소란스러운 밤을 보냈다. 자정임에도 환하게 켜진 내부아래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가 이어폰을 뚫고 들려왔다. 와중에도 잠을 자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 뒷자리 아저씨도 시끄럽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오지 않는 잠과 귀를 울리는 소음도 괴로웠지만 의외의 복병은 추위였다. 새벽이 되었음에도 에어컨은 멈추지 않고 돌아갔고 스페인의 더위를 믿은 나는 얇은 카디건 하나만 꺼내둔 상태였다.

생각보다 강한 추위에 카디건으로 몸을 감싸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어찌어찌 선잠을 자다 작은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에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버스가 멈춰있었다. 작은 주유소에서 나오는 불빛이 너무 밝게 느껴졌다. 시동과 함께 꺼진 에어컨 덕에 온도도 딱 적당했다. 약간은 후덥지게 느껴질 때쯤 다시 잠에 들었다.

여기저기서 알람이 울리며 탑승객들이 일어났다. 나도 눈을 뜨고 대충 짐을 정리했다. 버스는 신기하게도 시간표에 맞춰 출도착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리미리 내릴 준비를 해두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도시가 보였다. 버스를 내리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약간은 쌀쌀하던 버스가 그리워질듯했다.


20161020_081646.jpg 새벽과 아침의 경계였던 세비야


호스텔로 향해 짐을 맡겼다. 무거운 짐이 없으니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근처 대성당으로 향했다. 아직 입장시간도 아니었고 오늘 들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외관을 한번 돌아보고 싶었다. 거대한 성당을 한 바퀴 도는데만 8분이 걸렸다. 그 사이 가로등의 불이 꺼지고 세상이 점차 밝아졌다. 구엘공원에서도 느꼈지만 새벽에서 아침으로 향하는 그 시간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스타벅스를 쳐다도 안 봤건만 유럽에 온 뒤로는 자주 찾게 되었다. 일찍 열고 와이파이가 되면서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켜놓고 자리를 잡았다. 앉은 것보다도 드디어 에어컨 밑으로 들어왔다는 기쁨이 더 컸다.

잠시 여유를 가졌다가 E언니를 만나 점심을 먹으러 이동했다. 달고 상큼한 띤또 데 베라노(레드와인과 레몬소다를 섞은 음료)를 주문하고 생선구이를 먹었다. 여기 와서 반주가 당연해지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맛있었다.


숙소로 돌아가 체크인을 하고 짐을 정리했다. 가장 더울 때는 실내에 있는 게 좋을듯해 숙소에서 쉬다 길을 나섰다. 도심을 구경하고 더위에 지칠 때쯤 중간중간 가게로 들어가 몸을 식혔다.

이른 아침에 혼자 왔을 때는 조용했던 스페인 광장이 언니와 같이 오니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어찌어찌 인파를 뚫으며 사진을 몇 장 건지고서 분수를 구경했다. 일행이 있으니 사진을 많이 찍게 되었다. 비록 아직도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어색해 결과물이 썩 좋지는 않지만 최대한 힘을 내보았다.


수다를 떨고 주위를 구경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언니가 봐둔 식당으로 갔더니 웨이팅이 길게 걸려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뒤돌아 가겠지만 이번에는 돌아가는 대신에 벽에 기대어 언니와 수다를 떨었다. 1시간이 지나서야 우리는 식당에 앉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먹은 리조또와 띤또 데 베라노는 내가 유럽에서 먹은 그 어떤 음식과 술보다 마음에 들었다. 1시간의 기다림이 아깝지 않은 식사였다.


20161020_092114.jpg 각 도시를 화려한 타일로 꾸며놓았던 스페인광장


저녁을 먹고 나오니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더 이상 저녁이라 부르기 민망한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작은 식당에는 손님들이 앉아있었다. 독일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광경이다. 한국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늦은 밤에도 문을 연 식당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반팔만 입고 밤거리를 걸어도 춥지 않았다. 한 낮을 태우던 태양은 사라졌는데 달궈져 있던 땅은 뜨겁기만 하다. 약간은 후덥지근한 그 공기를 들이마시며 숙소로 돌아와 뻗었다. 내일도 E언니가 알차게 짠 코스를 따라다니려면 얼른 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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