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뒤 맑음
2016.10.14
Barcelona, Spain
아침에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중천에 걸려있었다. 오늘 바쁘게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꽤 늦은 기상에 부랴부랴 정신을 차렸다.
어제 일찍 잠들 거란 예상과 달리 방에서 만난 무리들과 놀다 보니 정작 침대에 누운 건 해가 떠오르는 새벽이었다. 다음날이 귀국이라는 한 무리의 젊은 피들은 휴식을 거부하고 마지막 밤을 불살랐다. 다행히(?) 방의 일행들이 다 같이 놀고 들어온 통에 자는 사람을 깨우는 일은 없었다.
8시쯤에 떠나는 룸메들을 배웅하고 다시 누운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리니 이미 11시가 넘어있었다.
어제 사온 납작 복숭아로 아침을 때우고 옷을 챙겨 입었다. 한 달 동안 캐리어 구석에 잠들었던 원피스를 꺼내 입는 기분이 오묘했다.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을 날았을 뿐인데 어제까지 꽁꽁 싸매던 가디건과 바람막이는 다시 가방 구석으로 밀려나고 한동안 완충재 역할이나 하던 원피스가 제 몫을 해낸다.
오래간만에 선크림도 꼼꼼히 바르고 길을 나섰다. 구름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어제의 천둥은 꿈이었던 것처럼 햇살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숙소에서 나와 사람들이 붐비는 길을 따라 걸으니 금방 목적지인 보케리아 시장에 도착했다. 관광객들로 빽빽한 입구 위로 스테인글라스로 만든 문양이 반짝였다.
마트구경이 즐거운 만큼 시장도 꽤 괜찮은 볼거리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어제 궂은 날씨에 숙소에 있던 사람들과 배고픈 관광객들이 점심시간에 맞추어 쏟아져 몰려왔다.
그 복잡한 시장에서 내가 건진 거라곤 초입에서 산 오렌지 주스뿐이었다. 안쪽에는 다양한 푸드코트와 치즈, 햄들이 가득했지만 사람에 치이던 나는 그냥 쓰윽 둘러만 보고 재빠른 탈출을 선택했다.
시장에서 한 골목만 꺾어도 사람이 확 줄어들었다. 얼마 되지 않는 오렌지주스를 쪽쪽 빨며 바로 다음 목적지인 구엘저택으로 향했다.
'구엘'은 바르셀로나 여행을 검색해 봤거나 건축에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이다. 이제는 본인의 이름보다는 공원의 이름으로도 유명한 구엘은 관광객들이 바르셀로나에 오는 큰 이유 중 하나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건축한 그 '가우디'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가우디에게 의뢰해 지은 구엘의 대저택은 같은 이름의 공원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들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모두가 시장으로 몰려갔는지 저택은 한산했다. 그나마 있는 관광객들도 절반은 그저 외관만 구경하고 금방 자리를 옮겼다. 커다란 아치문을 통과하고 티켓을 끊으니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 주었다.
저택의 외관부터 짐작했지만 눈을 돌리는 모든 곳이 특별했다. 굳게 서있는 대리석 기둥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고 나무천장은 화려하게 문양을 짜내었다. 그 흔한 조명마저도 곡선의 철제 장식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구엘저택은 이제껏 독일에서 봐온 궁과는 다른 의미로 굉장히 화려한 집이었다.
괜히 당대의 거부가 아니었는지 저택은 앞에 '大'자를 붙여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 커다란 저택이 구엘의 손길과 미감으로 꽉꽉 가득 차있었다. 어느 가구하나 허투루 놓은 게 없었고 작은 소품하나 분위기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화장실 안에서 타일로 맞춘 변기를 봤을 때는 약간 질리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택은 내 취향의 '집'이 아니었다. 가구들은 가우디의 손길로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었지만 너무 무거워 보였고 대리석 계단의 목조 장식은 아름다움에 경탄이 나왔으나 부산스러웠다. 화려한 대리석과 장식된 타일들은 집을 한층 더 이국적이게 만들어주었으나 너무 차가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잘 어울려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택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그 저택을 마주한 순간부터 방문객들은 새로운 세상에 도착한듯한 느낌을 받는다. 문을 넘으면 펼쳐지는 익숙함이 비틀어진 그 공간이 새로운 미학을 일깨우고 마치 동화 속 세상에 온듯한 경험을 맞이한다. 21세기를 사는 나도 그러한데 당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놀랐을까. 그런 의미로 이러한 모험심 가득한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구엘 역시도 기인이었다.
저택의 하이라이트는 각기 다르게 장식된 기묘한 굴뚝들이었다. 타일과 돌조각으로 장식된 그 작은 작품들은 붉은 지붕 위에서 절대 지지 않는 색채를 내뿜었다.
파란 하늘과 붉은 지붕 위로 타일들이 꽃을 피웠다. 다양한 색들의 굴뚝을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문득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저택 내부에서도 느끼기는 했지만 밖으로 나와 위에서 바라보니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관광객들이 두런거리며 타일을 구경하는 옆으로 오래된 아파트가 보였다. 칠이 벗겨진 외벽 옆으로 타일만큼이나 화려한 색의 빨래들이 줄줄이 널려있었다.
그동안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저택을 구경하느라 몰랐지만 이곳은 엄연한 거주구역이었고 옆 건물에는 계속 사람들이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꿈같은 순간이 저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이고 더 나아가 피곤한 일상이었다.
나 역시도 관광지 근처에서 삶을 살아가며 피곤함을 느끼곤 했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아까까지는 그냥 소리가 조금 크구나 싶었던 옆에서 대화하는 가족의 소음이 한순간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에 속으로만 사과를 건넸다.
잠깐의 꿈같은 경험을 뒤로하고 저택을 나왔다. 오히려 저택이 조용했던 것이란 듯 관광객의 소음이 거리를 집어삼켰다.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절로 피곤해진 기분에 호스텔로 발을 돌렸다. 소리에 예민해진 것이 잠을 자지 못한 탓이라 핑계 대며 늦은 오후에 도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2시간쯤 낮잠을 때리니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이대로 저녁을 보내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여행지에서 혼자 먹는 저녁이 아쉬웠던 적은 없었는데 바르셀로나는 하루 만에 나를 변화시켰다.
애매한 시간이라 바뀐 룸메이트들과는 얼굴도 보지 못했고 전날밤의 분위기를 봐선 호텔 아래 펍은 혼자 가기에는 너무 열렬했다. 결국 오랜만에 동행을 구하는 카페글을 찾아들어갔다.
야경을 구경하고 분수쇼를 같이 볼 일행을 찾는다는 글에 댓글을 남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설령 답이 안 온다 하더라도 숙소 앞만 다녀올 생각이었다. 이제껏 동행 없는 야경은 시도해 본 적 없었지만 7시라면 아직은 돌아다닐만한 시간 같았다.
다행히 답장은 늦지 않게 돌아왔다. 다만 전날 날씨로 분수쇼가 취소되었으니 그냥 야경을 구경하고 술을 한잔 하자는 내용이었다. 단 둘이나 2~3명이라면 고민했겠지만 글쓴이가 모아 온 사람은 무려 열명이 넘는 대인원이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식당에 모인 열 명의 사람들이 통성명을 나누었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자연스레 근처에 앉은 사람들끼리 여행을 공유했다. 그렇게 E 언니를 알게 되었다.
복작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뭐가 통했는지 모르겠지만 E 언니와 나는 야경을 구경하는 내내 함께했다. 사진을 찍어주고(나는 내 극악의 실력에 관해 계속 사과했다), 이것저것 여행에 관해 수다를 떨다가 내일 일정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도 모르게 오늘 보지 못한 분수쇼를 같이 보자 말하고 덥석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내 스페인 여행의 동행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