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칠 낙원을 만들 거야
스페인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일정을 조정하다 보니 예정보다 하루정도 더 뮌헨에 머무르게 되었다. 아침을 대충 때우고 리셉션으로 다가가 연장을 요청했다. 내가 머물던 방은 안되지만 다행히 다른 방이 남아있었고 내일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새로운 방으로 체크인을 하면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중요한 일도 해치웠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스텔을 나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바이에른 티켓을 끊고 몇 번의 확인을 거처 프린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정식명칭은 프린 암 킴제. 길지만 가이드북이나 나나 긴 이름대신 프린이라는 두 글자로 불렀다.
괜히 발음이 예뻐 혼잣말로 이름을 굴려봤다. 프린. 호수. 궁전. 꽤 판타지스러운 이름들의 조합이었다.
1시간을 달려 프린의 역사에 도착했다. 나의 목적은 이곳이 아니라 좀 더 안 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거대한 호수 속의 궁전이다.
헤렌킴제성은 어제 갔던 성의 주인인 루드비히 2세의 또 다른 건축물이자 마지막 성이었다. 언뜻 보면 바다로 보일만큼 거대한 호수 가운데 금녀의 구역인 섬이 있었다. 황제는 이 섬을 통째로 사들여 자신만의 은신처를 만들었는데 역시나 주인의 죽음으로 완공되지 못하고 남아있었다.
다만 외관은 이미 다 지어진 지라 겉으로 봤을 때는 마치 동화 속의 궁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열차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향하는 간이역으로 향했다. 가지고 있는 바이에른 티켓을 이용하면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었지만 시간을 보니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배 시간을 확인하니 버스를 기다려 타면 꼼짝없이 1시간을 서있어야 했다. 어제 실컷 기다리고 추위에 떨었던지라 오늘은 추가금을 내더라도 조금 빨리 가는 것을 택했다.
티켓을 구매하고 클래식한 증기기관차에 올라탔다. 외관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연료를 태워 나오는 증기로 움직이는 '진짜' 증기기관차였다. 추가금이 아깝지 않은 경험이었다.
작은 기관통에서 구름을 쉴 새 없이 내뿜으며 마을을 달렸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승차감과 속도감이 좋았다. 약간 느리게 흘러가는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선착장이다.
날이 맑아 어디를 보든 풍광이 좋았다. 바람도 별로 없어서 배를 타야 함에도 멀미걱정이 들지 않았다. 파란 배경사이로 노란 여객선을 올랐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좌석을 두리번거리다가 빈자리에 앉았다. 왜 사람이 없나 했더니 백발의 노부부 밑에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하품을 쩌억한다.
어색하게 앉아도 되나 물어보니 괜찮다는 답이 돌아왔다. 괜히 강아지(라 불리기엔 많이 큰)가 귀여워 말을 걸었다. 아쉽게도 그들과 나 모두 영어가 서툴렀기에 긴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주인은 사냥개는 아니라며 아주 착한 친구라며 개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딱 보기에도 말라뮤트로 보이는 개는 또다시 하품을 하고는 혀를 빼쭉 내밀었다.
여객선이 움직이며 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배 옆으로 튀어 오르는 포말들이 털 위로 떨어졌다. 인간은 약간 차갑다고 느낄 물방울들을 강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미동도 없다.
배가 움직인 지 20분이 되지 않았을 무렵 섬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대다수의 관광객들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개와 주인을 포함한 몇몇은 그대로 앉아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섬을 구경하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성의 입구로 향했다. 가지고 있는 바이에른티켓을 성의 입장권으로 교환했다. 역시나 투어로만 들어갈 수 있는 내부에 외관을 보며 영어 투어 시간을 기다렸다.
30여분의 투어는 알찼다. 그리고 눈이 돌아가게 화려하고 공허하고 심난했다.
어제본 궁전은 맛보기였다는 듯 볼거리가 몰아쳤다. 시작부터 거대한 마블 대리석과 부조, 그림들이 방문객을 맞이했다. 그리고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든 화려함이 묻어났다. 금빛 찬란한 장식들과 커다란 덩어린 줄 알았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하나 세심하게 조각되어 있는 천장의 부조들.
프랑스왕조를 동경한 루드비히 2세는 자신의 건물들에 그 동경을 짙게 발라놓았다. 헤렌킴제의 성은 외관이나 장식이 베르사유의 궁전과 거의 유사했다. 정원의 화려한 라토나분수는 베르사유복제품에 내부역시도 많은 부분을 참고해 건설했다. 그러나 설명을 하는 가이드는 한 가지를 더 강조했다. 루드비히는 그저 따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화려하게, 더 복잡하게 궁을 설계했다. 장식은 더 사치스러워졌고 건물의 기계장치들은 더 재기 발랄하고 정교해졌다. 정말 지독한 애정이다.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방 안에서 움직이는 기계장치를 발견할 때의 감정은 꽤나 오묘했다. 새삼스레 보이는 약식보다 성이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1880년도에 지어진 성은 그때에서도 이미 '옛날'이었던 과거의 유물을 복기한다. 150년 전 건물을 따라 짓는 황제를 보며 당대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황제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은 걸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보곤 했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말이다. 그러나 루드비히 2세의 성을 보고 그의 일생을 훑어보다 보면 그는 도망칠 낙원을 만들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불행히도 그는 그걸 실행할 권력이 있었으나 매듭지을 힘은 없었다.
성의 구조는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려한 응접실로 시작해 거대한 거울의 방을 지나고 눈이 아프게 번쩍이는, 그러나 천박하지는 않은 예술 작품들이 가득한 방들을 지나면 투어의 끝부분에 다다른다.
들어올 때와 같은 구조 같은 방이지만 텅 비어있는 하얀 공동은 자연스레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만든다.
투어를 마치고 나와 루드비히가 머물렀다는 수도원 건물도 보았다. 이곳에서 올라가는 건물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학이 발달하고 사상들이 꽃피울 때 대인기피증 회피형 왕이란 꽤 고생이었나 보다.
일기를 다시 읽으며 한때 모든 것에서 숨고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그러나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서 루드비히 2세에게 동질감 아닌 동질감이 들었다. 백 년 전 권력자에게 그런 걸 느끼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의 도피는 죽음으로 끝났고 나의 도피는 여행으로 이어졌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미미한 동정과 동질감이 내가 뮌헨과 그의 고성을 좋아했던 이유 같다.
감상에 가득 찬 관람을 마치고 정원을 따라 걸었다. 이대로 섬을 나왔다면 정말 감성과 사색에 가득한 하루였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마른 목을 축일까 싶어 카페에 들어갔더니 물을 팔천 원이나 주고 사 마셔야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에비앙 300ml에 내 돈 팔천 원을 태울 수는 없었다. 그냥 섬을 나가서 마시기로 다짐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사색이고 동정이고 다 필요 없다. 이 거대한 집을 짓고 후손에게 프랑스 출신 작은 물 한 병에 6유로를 받을 수 있게 한 황제보단 그 6유로가 아까워 침을 삼키는 내가 더 가여웠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