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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Aug 25.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02

여행의 시작

 삶의 대부분을 섬에서 보낸 나는 고속버스보다는 비행기가 더 친숙한 사람이다. 장기간의 버스보다는 단시간의 비행을 선호하고 거대한 철덩이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적은 편이다. 열네살부터 혼자 비행기를 탔고 이제는 외국여행도 몇 번 다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공항이 무섭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이 안 통하는 공항"이 무섭다.


2016.09.07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쉼 없이 바뀌는 전광판,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란스러움이 커다란 공간을 가득 채우고 머리를 아프게 만든다. 저절로 긴장되는 몸은 내가 어떻게 풀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패닉과 분노의 그 어드메. 내가 한국을 떠난 지 4시간 만에 느낀 감정이었다.


 3개월의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최대한 싸고 가성비가 좋은 것을 찾아다녔다. 내가 성격 버리고 몸 부셔가며 번 돈으로 떠나는 여행이었기에 실수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다면 단돈 100원이라도 아끼고 싶었다. 

 그렇기에 가장 고민했던 것이 비행기표였다. 처음 타는 외국행 비행기에 비싸도 한 번에 가는 국적기와 조금 싸지만 여러 번의 환승을 거치는 외항사들 사이에서 나는 짧은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환승은 너무나 무서웠지만 빈 지갑은 더 무서웠다. 최대한 저렴하지만 환승은 한번 이내로. 당시 악명 높은 중국항공은 피했다. 그렇게 뒤지고 뒤져 고민 끝에 고른 것이 베트남의 호찌민을 경유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베트남항공의 비행기표였다. 표를 끊은 그 순간부터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에서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환승을 잘할 수 있을까?"


 4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베트남은 무척 덥고 낯설었다. 불친절한 안내판에 헤매며 환승게이트를 통과하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몇 번이나 울리는 게이트 변경 안내와 분명 영어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송들, 잊을만하면 나오는 승객을 찾는다는 안내방송은 나를 불안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의자 앞 모니터에서는 게이트가 수시로 변경되었지만 안내방송은 모니터가 바뀐 다음 10분 정도가 흐르고서 흘러나왔다. 그 방송에 당황에 모니터를 확인해 보면 10분 전에 바뀐 번호가 여전히 깜빡거리곤 했다.

 답답한 마음에 지상직 직원에게 물어보아도 직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영어를 못했지만 그 직원은 그때의 나보다 더 영어를 못(안)했다.

 모니터에 연착이 뜨고 난 뒤 4시간 동안 나는 내가 타는 비행기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당황을 넘어 분노하게 만들었다.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잠에 빠져들고 그나마 불이 켜져 있던 기념품점도 문을 닫았다. 이제 을씨년스럽다는 말밖에는 게이트를 묘사할 다른 단어도 생각나지 않을 때쯤 에니카를 만났다. 


 독일인인 에니카는 인도네시아 남자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맨발로 공항을 가로지르며 충전기를 찾아 헤매던 그는 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모니터만 바라보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화면은 그대로야. 기다리는 거 지루하지? 독일로 가는 거야? 유학? 여행이야? 혼자 가는 거야?"

 경쾌하게 쏟아지는 질문들 사이에 나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섞여 들었다.

 "4시간째 기다리고 있어, 혼자 하는 여행이야. 사실 조금 무서워."

 엉망인 문법과 떨리는 목소리에도 에니카는 내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는 웃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혼자 가는 여행이 얼마나 재미있고 대단한지에 대해 길게 설파하던 에니카는 저 멀리 꽃아 둔 핸드폰을 한번 확인하고는 내 여행계획을 물어봐왔다. 서툰 영어로 열심히 말하는 사이 차가웠던 손발에 온기가 돌고 떨리던 몸이 가라앉았다.


 "독일만 한 달 여행한다고? 지루하지 않아? 왜?

 독일인이 왜 지루한 독일을 여행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사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사나흘에 한번 도시를 바꾸고 국경을 바꾸는 게 피곤했고 쉬고 싶어 떠나는 여행에서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았다. 독일은 한 달을 보내기에 적당히 안전하고 적당한 물가고 흥미로운 역사를 가진나라였다. 

  문제는 이 문장을 어떻게 영작하냐는 것이었다.

 "어... 많은 사람들이 독일은 지루하다고 말하는데(이 부분에서 에리카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독일의 역사가 흥미로워. 그리고 나는 한 장소에 오래 있는 걸 좋아해. 그래서 독일을 한 바퀴 돌고 싶어." 

 서툰 영어에도 에니카는 찰떡같이 이해하고는 독일의 이것저것을 추천해 주었다. 지하철 타는 법, 유심구매하기, 독일인들이 얼마나 규칙을 좋아하는지. 나 역시도 띄엄띄엄 말을 꺼냈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게 힘들지 않았는지, 장거리연애는 힘들지 않은지. 그리고 내가 독일을 잘 즐길 수 있을지에 대해서.

 그렇게 신나게 떠들다 보니 4시간째 변함없던 모니터도 반짝이며 바뀌었다. 


 드디어 탑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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