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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Aug 26.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03

첫 유럽, 첫 도시 

2016.09.08 

Frankfurt am Main, Deutschland


 비행기에서 겪는 새벽은 난생처음이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무지갯빛 평선은 이곳이 하늘임동시에 새벽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검은 하늘 속 뿌옇게 펴 오르는 새벽빛이 겨우 재워놓은 심장을 다시 깨운다. 쿵쿵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한국 시간 오후 12시 5분, 베트남 시간 오전 10시 5분, 독일 시간 새벽 5시 5분. 착륙까지는 3시간이 남았다.

 10시에 맞춰져 있던 시계를 5시로 옮겼다. 숫자를 5개나 훌쩍 넘기고서는 혼자서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환승을 기다리면서도 시계의 시간을 바꿨지만 손목에 시계를 돌릴 때마다 해리포터 속의 헤르미온느가 된 기분을 느낀다.  


 눈치껏 사람들을 따라가 조용히 입국심사를 받았다. 여권과 내 얼굴을 훑어본 직원은 한마디 물음도 없이 도장을 찍어준다. 괜히 겁을 먹었다 생각하곤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수화물을 찾으러 나오니 이미 짐들이 벨트 위를 돌고 있었다. 부디 나의 짐이 지나가지 않았기를 바라며 슬쩍 빈 공간을 찾아들어갔다. 10시 방향쯤 에리카가 보였지만 아는 척을 해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긴 비행 속 잠이 나의 용기를 다 가져가 버렸는지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힐끔힐끔 그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튀어나오는 미소에 그가 내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긴 비행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숙소에 갈지 물어보았다. 뉘른베르크 근처에 사는 에리카는 기쁜 목소리로 가족이 마중을 나온다고 말했다. 여행을 끝낸 이의 표정은 가볍기만 하다.

 

 에리카는 자신의 짐을 찾고도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짐을 찾고 입국장을 나서고 공항셔틀을 타는 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안내해 주는 내내 이곳은 2터미널이라며 셔틀을 타고 1터미널로 가서 S반을 타고서 중앙역까지 가라고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다. 내가 셔틀에 타는 그 순간까지 에리카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물어보고 나의 짐을 들어주었다. 

 "좋은 여행이 되기를"

 그렇게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사귄 친구는 공항에서 만나고 공항에서 헤어졌다. 


 에리카덕에 무사히 1터미널의 공항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표를 끊는 곳에서 가벼운 혼란을 겪었다.  애초에 내가 도착한 터미널이 2터미널이란 것도 몰랐던 나는 지하철 타는 법도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 끊는 법을 몰랐다. 그저 기계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된다고 알고 있던 나는 빨간 기계 앞에서 몇 번이고 캔슬버튼을 눌러야 했다. 

 독일의 티켓머신은 먼저 도착역을 고르고 원하는 시간대를 고른 뒤 티켓의 종류를 고른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시간대가 생략되기도 한다. 또는 목적지 입력이 없이 시내의 거리를 구분해 둔 존(zone)을 선택하고 기간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도착역을 선택하는 것부터 막혔다는 거다.

 한국과는 다른 승차방법과 직접 열어야 되는 수동문, 존의 구분과 표의 종류까지 다 검색해 놓고서는 정작 중요한 공항에서 시내 가는 표를 어디로 어떻게 끊어야 되는지를 알아보지 않았다. 눈치껏 역이름에 도심, 중앙역 따위를 찾아보았지만 그런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유심을 현지에서 구매할 생각이었기에 핸드폰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고 열심히 캡처한 블로그글도 나를 도와주지 못했다.

 눈앞이 핑 돌았다. 실실거리는 웃음이 튀어나오고 애꿎은 핸드폰만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그런다고 와이파이가 잡히거나 로밍이 되지도 않지만 두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뒤로 빠져 사람들이 어떻게 표를 끊는지 지켜보았다. 대부분이 관광객인지 사람들은 몇 번이고 캔슬버튼을 눌렀고 나 역시도 그때마다 입술을 뜯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다시 한번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City나 Main station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검색창에 알파벳을 넣어보아도 뜨지 않는 목적지에 결국 캔슬을 눌렀다. 뒤로 빠지려 몸을 물리자 불쑥 머리가 반쯤 까진 아저씨가 튀어나왔다. 아저씨는 메인스테이션을 외치더니 툭툭 버튼을 눌렀다. 먼저 F를 눌러 프랑크푸르트를 선택하고 거기서 다시 중앙역을 찾은 다음 싱글티켓까지 눌러 결제창까지 띄웠다. 어벙벙하게 보고 있자 돈을 넣으라 손짓까지 했다. 지갑을 꺼내 결제를 하면서도 나의 마음은 고마움이 반, 의심이 반이었다.


 엉겁결에 뽑게 된 티켓을 손에 쥐자 아저씨는 플랫폼번호를 알려주고 가야 할 곳을 가리켰다. 땡큐를 외치고 캐리어를 챙겼다. 된 건가?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발은 착실하게 아저씨가 알려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플랫폼을 찾고 기차를 기다리다 문득 내가 너무 쉽게 남을 믿은 건가? 싶어졌다. 더럭 덮쳐오는 겁에 소심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 보았던 아저씨가 또다시 나타났다.

 "중앙역 갈 거지? 저기 커플도 같은데 가는데 같이 있자"

 뒤를 가리키는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백발의 노부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하니 손을 흔들어주던 부부는 인상이 좋았다. 그렇게 나는 중년 아저씨와 노부부와 함께 단거리 일행이 되었다.

 어색함을 풀려던 건지 아니면 경계를 풀고 싶었던 건지(어쩌면 둘 다일) 아저씨는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주로 노부부와 대화를 나누었지만 간간히 나에게 떨어지는 질문도 있었기에 잔뜩 긴장하고 귀를 세웠다.

 "학생이야?"

 툭 던져진 말에 답을 못하고 헤매었다. '이건 무얼 알고 싶어 물어보는 걸까? 내가 대학생인지? 유학생인지? 아니면 내가 학교 안 간걸 안 걸까?' 과대 해석이고 지나친 생각이었다. 그냥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는 걸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잘 알지만 그때의 나는 나에 대한 질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어색하게 꺼낸 "노" 한마디에 아저씨는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물어왔다. 한국을 대답하자 듣고 있던 노부부가 본인들의 고향을 얘기해 주었다.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나지만 대답을 듣고 나도 그 나라에 관한 말을 몇 가지 던진 것 같다. 그리고 들어온 열차에 나란히 올라탔다. 


 시내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아저씨는 도와준 사람들에게 받았다며 네모난 기념품 통을 꺼내보였다. 작은 소품들이 들어있는 통에는 한국 전통 기념품도 하나 끼어있었는데 부러 콕 집어 자랑하는 게 아마도 이걸 보여주러 이 통을 꺼냈구나 싶어졌다. 아저씨는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어색히 웃기만 하고 답을 안(못)하자 금세 노부부랑 대화를 이어갔다.

 낯선 소음을 배경으로 나는 낯선 풍경들을 구경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어색하게 인사하고 다시 한번 고맙다 말하고 캐리어를 끌었다. 흘깃 뒤를 보니 노부부가 고맙다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는 게 보였다. 아저씨 역시 거절하지 않았다. 원래 돈을 줘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애초에 저 아저씨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부부였던 것 같고 나는 돈도 없었기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해서인지 양심이 조금 덜 찔렸다.


 인파를 따라 중앙역을 나오자 햇살이 들이쳤다. 9월의 독일은 흐리다던데 내가 마주한건 푸른 하늘이었다.

 독일에서 볼 줄은 몰랐던 커다란 금호타이어 간판을 지나 첫 숙소인 한인 민박으로 향했다. 미리 캡처해 온 화면을 바라보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분명 금방 나온다던 건물은 보이지 않고 울퉁불퉁한 길바닥은 캐리어를 턱턱 물며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10분 남짓한 길이 1시간 같았다.

 겨우 찾은 숙소는 유백색 건물의 3층에 위치해 있었다. 돌계단을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들고 올랐다. 처음으로 온전히 내 힘만 가지고 캐리어를 들다 보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많은 짐을 들고 온 건가 싶었다. 약간의 무상함과 함께 나는 땀범벅인 채로 첫 숙소의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준 건 사장님의 아들이었다. 그의 순진무구하면서도 잔인한 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냔 물음에 나는 굉장히 진이 빠졌다. 나도 타고 싶었다... 단지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했을 뿐... 그리고 나는 거기 묵는 내내 엘리베이터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보통의 체크인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남아있는 빈 침대덕에 수월히 짐을 풀었다. 미리 짐을 맡기고 가장 급한 핸드폰부터 해치우러 길을 떠났다. 숙소 와이파이로 근처 마트까지의 길을 캡처하고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무사히 마트에 입성하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물 한병도 손에 쥐었다. 계산대에서 유심카드를 요청하자 아주머니께서 몇 가지 물어보고 카드 팩 하나를 꺼내주었다. 결제를 마치고 문밖을 나오자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백색과 갈색으로 이루어진 별돌집, 회색돌이 깔린 보도, 강변을 따라 펼쳐진 공원과 뛰노는 개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유럽에 왔구나.

당시 내 사진 찍기 능력은 마이너스를 찍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강변공원 벤치에 앉았다. 외국보다는 한강 공원인가 싶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공원을 뛰어다니는 각양각색의 강아지들이 여기가 서울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커다란 셰퍼드와 이름 모를 개들이 열심히 달리다 주인들의 부름에 서둘러 곁으로 돌아간다. 커다란 개들이 목줄을 안 한 것도, 그리고 주인의 말을 그렇게 잘 듣는 것도 신기했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자 푸른 하늘 위를 어지럽히는 비행기구름들이 보였다.

 푸른 도화지 위 하양 크레용. 여기저기 낙서된 높은 하늘.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순간을 평생 사랑하겠구나.' 하고.


 아직도 그때의 길을 기억한다. 덥게 느껴질 정도로 높이 떠있던 태양과 그 아래 빛을 받던 크림색의 벽돌집들, 반대로 그늘진 곳에서 불어오는 조금 차다 싶은 강바람과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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